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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기도제목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열방과 민족들 위에 주님의 주권과 승리를 선포하는 기도
  •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열방 위에 능력으로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이다!
  •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영원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며, 이슬람의 거짓의 영, 미혹의 영, 폭력의 영을 예수의 이름으로 땅에서 묶습니다. 하늘에서도 온전히 묶어주소서!
  • 특별히 성경의 잃어버린 땅 터키를 위해 영적 전쟁을 하는 기도동역자들을 더 많이 세워주소서!
  •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말씀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더 많은 중보기도자를 세워주소서!
터키와 중동의 교회와 목회자들과선교사들과 성도를 위한 기도
  • 터키와 중동의 모든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고, 특별히 터키의 81개 모든 주에 교회를 세워주소서!
  • 터키에서 우리와 동역하는 삼순의 오르한 목사, 앙카라의 이산 목사, 말라티아의 팀 사역자, 반의 바히트 목사, TeK회장 알리 목사와 제카이 목사, 아흐멧 목사, 움베르토 목사를 축복하소서! 계속 현지의 교회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동역이 계속되게 하소서!
  • 터키의 동역자 Partners in Turkey (김바나바, 권강혁, 길예평, 김선희, 김종훈, 안소냐, 안바울, 장과장, 조요한, 최권능, 탁요셉, 허강한, 홍갈렙, 팀스톤, 문KH, 김에녹, 윤성희, 임사라, 박HS, 선보아스, 조JH, 황DS) 사역자들의 가정과 사역들을 보호하시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 이집트의 동역자 Partners in Egypt (허드슨, 김젝키, 김요엘, 민SK, 김데이빗), 쿠르디스탄 동역자 Partners in Kurdistan (이밀카/하나), 아르메니아 동역자 Partners in Armenia (백승환), 그리스 동역자 Partners in Greece (박데이빗 /레이철) 사역자들의 가정과 사역을 축복하소서!
  • 코로나 사태를 속히 종결해주시고, 이 시대 교회들이 깨어나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현재 50유닛의 교회 개척자 (CP)들을 위한 기도
  • 주님께서 친히 모든 CP들과 가족들을 늘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날마다 새 힘을 더하소서
  • 코로나 사태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늘 먼저 구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실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사역들 위에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풍성한 열매들을 허락하소서!
  • 인터넷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PIMO 사역들과 그 외 SNS/온라인 사역들을 통하여 수많은 무슬림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역사가 더 강력하게 일어나게 하소서!
SWM 선교회 및 동역하는 교회와 개인을 위한 기도
  • SWM USA/Korea 운영이사교회들, KBP 이사/회원들, 후원이사들, 다윗의 조약돌 회원들, 그 외 기도동역자들의 가정과 자녀, 일터와 사역들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연합을 힘써 지키게 하소서!
  • SWM USA/Korea 모든 사역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분별력 가운데 모든 사역들을 잘 결정하고, 착하고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게 하소서!
  • 터키의 Foundation (VAKIF/바크프/재단)이 올해 안에 등록되어 터키와 중동에 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게 하시고, 현지 교회들이 BAM 사역들을 통해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자립하게 하소서!
  • 육신의 연약함으로 기도하는 동역자들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고, 코로나 사태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개인/사업/교회가 속히 안정되게 하소서!
마지막 때 영적 대추수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기도
  • 이 천국 복음이 속히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편만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마 24:14)
  • 아랍연맹 (22개국: 알제리, 이집트, 수단, 코모로, 지부티, 모리타니, 모로코, 소말리아, 리비아, 튀니지,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카타르,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위에 강력한 영적 돌파가 임하게 하소서!
  • 이스라엘 (시 122:6)의 평화와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속히 채워지게 하소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미국을 긍휼히 여기시고, 진정으로 회개하며 주님께 온전히 돌이키게 하소서!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2020. Wint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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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성경의 잃어버린 땅, 터키

이세웅 금향로 편집인

2020년 겨울호부터 계간지로 발간하는 선교매거진 “금향로가 차기까지”는 파수꾼의 깃발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06년 시작된 SWM 선교회는 터키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응답한 개인기도자들과 지역교회들이 연합하여 기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 부르심에 순종한 기도자들에게 매주 현장의 소식과 기도제목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하고 2006년 1월부터 매주 기도제목을 이메일과 SNS로 보내드리고 있다. 마치 심장이 뛰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으신 것이다. 파수꾼의 사명은 멀리 보고 미리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 것을 외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그분의 대위임령을 가장 중요한 명령으로 생각하고 본 것을 외치는 것이 바로 이 선교 매거진의 존재 이유이다.

이번 겨울호의 주제는 “성경의 잃어버린 땅: 터키”이다. 터키의 영적 부흥이 무슬림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현장 사역자들과 SWM 리더들이 마음을 다해 글을 준비했다.

SWM 선교회 국제/미국 대표인 김진영 선교사의 발행인 칼럼 “Why Turkey? 왜 터키입니까?”는 터키와 이슬람권의 영적 전쟁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어떤 의미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인구 대비 세계 최대 미전도종족인 터키가 바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요람이기에 터키의 영적 회복은 반드시 되어야 하며 우리의 연합과 기도를 통하여 이슬람권은 회복될 것이다.

SWM 선교회 김성간 선교사는 리더십 칼럼 “터키 선교의 터닝 포인트: 영적 전쟁과 중보기도”를 통해 우리의 중보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지난 15년 동안의 터키 연합중보기도운동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2007년 터키 말라티아 순교 사건과 터키 연합중보기도회로 시작된 영적전쟁, 2010년 아랍의 봄 혁명 이후 시리아 내전, 난민 그리고 교회개척운동 마지막으로 터키의 기독교 박해와 팬데믹 사태로 치닫고 있는 터키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말하고 있다.

현장 사역자들의 귀한 통찰력 있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20년 이상 사역하고 있는 김선희 사역자는 “터키 선교 분석 및 연구”에서 터키 선교가 되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와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오스만제국(1299-1922)의 영향력을 잘 설명하고 있다.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곳이며, 이웃 국가 및 중동의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경제와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1922년 오스만제국이 패망하고 1923년 터키공화국이 탄생한 후 지금까지 97년 동안 터키는 어떻게 생존했으며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서방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말한다. 세속국가인 터키가 에르도안 정부 이후 신 오스만 주의를 표방하며 이슬람으로 회귀하고 있다. 최근에 겪고 있는 경제침체를 터키의 이슬람화로 극복하려는 움직임 속에 강화된 언론 통제는 터키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 외부 세계와의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현재 상황 속에서 터키가 어떻게 노력하며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터키의 선교에 청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최근에 터키에서 추방된 존 마틴(보안명)은 “터키의 영적 각성은 이슬람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주제로 귀한 글을 썼다. 선교학 박사이기도 한 존은 고대로부터 터키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 세계성과 지금의 영적 어두움의 배경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가 가지는 선교적 희망의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특히 이슬람권에 끼칠 영향력이 어떻게 터키를 통해 나타나게 될지 말하고 터키는 결국 이슬람권으로 가는 복음의 다리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말라티아의 팀 스톤 사역자를 통해 2007년 말라티아 순교 사건과 그 이후 13년 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듣는다. 2007년 4월 18일 민족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5명의 터키 청년들이 저지른 살해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터키인들을 경악하게 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후 모든 선교단체와 말라티아 교인들은 그 땅을 떠났지만, 팀과 사라 스톤 부부는 말라티아에 남은 틸만 선교사 미망인인 수산나 게스케와 세 자녀를 돌보고 말라티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말라티아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 엄청난 영적전쟁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소수의 터키 성도들을 양육하며 교회개척자들로 세워가고 있다. 그 13년의 스토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제는 말라티아 뿐 아니라 엘라즈으, 툰젤리 그리고 에르진잔과 에르주름, 비틀리스와 무쉬 등 교회가 없는 주에 교회를 개척하는 팀들이 일어나고 있고 아직도 교회가 없는 터키 동북부 지역의 교회 개척을 꿈꾸고 있다.

금향로 편집부에서 특집으로 꾸미고 있는 현장 및 이슈에는 이번에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개조된 “아야 소피아”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또한 기획 기사 “에르도안과 터키”는 에르도안의 터키 정부가 무엇을 추구하며 그 현실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집 기사이다. 지난 20년의 터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집은 “응답하라 연중회”이다. 2010년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에서 진행된 특별좌담회 영상을 글로 정리해서 나눈다. 좌담 호스트는 현 할렐루야교회 김승욱 목사이며 패널리스트는 트랜스폼월드 대표 루이스 부시, 베델교회 고 손인식 목사, 터키 개신교교회 협의회 제카이 탄야 목사, 파토스 재단 김종필 목사로 특별좌담회를 통해 터키 연합중보기도회의 의미와 이것을 통한 터키의 영적돌파가 어떤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2010년의 감동이 느껴질 것이다.

이번 특집에서 시작하는 “케빈의 이야기로 여는 성경” 시리즈는 앞으로 여러 회에 걸쳐 소개될 예정이다. 킹덤 비즈니스 GOA 여행사를 터키 앙카라에서 운영하고 있는 권강혁 사역자는 지난 10년의 터키 사역을 통해 경험한 사도 바울의 1, 2, 3, 4차 전도여행을 저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사도 바울의 현장을 느끼며 더욱 생생하게 성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월간 금향로에서 “안나의 골방”을 쓰던 강안나 사역자가 계간지에서 “안나의 외침”으로 계속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나누며 도전한다. 미션 프론티어 기사는 C. 앤더슨의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우리는 가서 그 땅을 취할 것인가?”를 소개한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땅을 취할 것을 도전하고 있다. “터키는 지금”과 “중동의 오늘”을 통해서는 현재의 터키와 중동의 주요 이슈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겨울호 계간지 발행을 통해 전문 선교 매거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학술적인 매거진이 아니라 현장을 더 깊이 이해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터키와 중동 이슬람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데 실제적 도움이 되는 고민과 연구 그리고 제안이 다루어지는 전문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봄호는 3월 발행 예정이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계속 현장의 하나님 나라를 나눌 수 있도록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발행인 칼럼

Why Turkey? 왜 터키입니까?

김진영 선교사

왜 이렇게 영적으로 무너지고 황폐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이 땅과 백성들을 버리셨는가?
이 땅과 백성들은 다시 복음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터키 민족은 누구인가?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제가 1994년부터 러시아 칼미키야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중 추방을 받고 2002년 터키로 왔을 때, 그 당시 터키 인구 6,500만 명 가운데 기독교인 숫자가 약 3,000명으로 기독교인 비율이 0.0046%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패트릭 존스턴 (Patrick Johnston)이 쓴 세계기도정보 (World Operation)에서 가장 복음화가 되지 않는 넘버 원 국가가 터키라는 사실은 매우 큰 충격이었습니다.

터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눈물과 땀, 수고와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믿음 때문에 순교의 피를 흘린 땅이었습니다. 또한 터키는 복음으로 로마제국을 변화시키고 전 세계를 향한 선교의 중심이었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영적으로 무너지고 황폐하게 되었을까?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과 백성들을 버리셨는가? 이 땅과 백성들은 다시 복음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터키 민족은 누구인가?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수많은 질문들을 갖고 기도하는 중에 이 땅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고 아버지의 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땅과 백성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의 강력한 진을 보게 하셨고 이슬람 종교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영들의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며 이스마엘 자손이 돌아오도록 왕의 대로를 수축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터키와 이슬람권과의 영적 전쟁은 오직 기도, 우리의 하나됨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연합된 기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영적 전쟁의 승리임을 깨닫고, 2007년부터 연합기도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아랍의 봄, 중동의 변화, 전쟁과 테러의 상황 가운데 흩어지는 수많은 난민들을 향한 긍휼과 구제의 사역이 201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부터는 난민들 가운데 교회개척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선교의 중요한 시기에 저는 ‘왜 터키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기를 원합니다.

터키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모스크로 바뀐 아야소피아 교회 iStock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로마제국의 박해와 고난 가운데 눈물과 땀과 기도와 순교의 피를 뿌리며 전파되었습니다. 안디옥을 중심으로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밤빌리아, 수리아, 길리기아, 무시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르메니아,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등 전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와 교회개척의 중심지가 바로 오늘날의 터키입니다. 그러나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성도들은 흩어지거나 죽임을 당하고 교회는 파괴되거나 이슬람 모스크로 변했습니다. 터키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며 방황하는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영적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터키 땅과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터키는 투르크 민족과 이슬람 종교를 이용하는 사탄의 진이 있는 곳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 ⓒPeter Hermes Furian/Getty Images

투르크 민족은 과거 고구려와 이웃한 돌궐 사람입니다. 이 민족은 몽골에 의해 서쪽 초원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인 오늘날 터키로 이동하게 됩니다. 중국의 위구르,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터키 이렇게 7개 민족이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투르크계에 속하며 인구는 약 1억 7천만 명입니다. 이 투르크 민족은 이동 중에 이슬람을 접하게 되는데, 고대로부터 유일신 개념인 천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일신 알라를 받아들입니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지하드의 개념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투르크 민족의 정복정신에 잘 맞았으며, 윤리와 도덕, 엄격한 법질서가 투르크 유목 사회의 전통적 개념인 퇴레 (Tore)와 일맥상통하여 이슬람을 민족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투르크 민족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셀주크 제국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전 세계로 확장하게 됩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이슬람 지도자인 칼리프가 되어 투르크 오스만 제국은 전 세계 이슬람 포교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터키는 역사 가운데 이슬람 확장에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이슬람을 통한 사탄의 강력한 진이 있는 곳입니다. 사탄은 이 땅을 향한 복음 전파를 가로막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확장되지 못 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터키는 왕의 대로를 수축하기 위한 관문 지역입니다

왕의 대로는 B.C. 1900년 전부터 역사 속에 이미 존재했으며, 성경 민수기에 ‘King’s Highway (왕의 대로)’로 기록된 무역과 교통의 중심 도로입니다. 이 왕의 대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대로’로 표현되며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 40: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사 19:23-24)

앗수르는 오늘날의 시리아, 이라크, 이란, 터키, 아르메니아 지역을 포함하는 역사에서 사라진 앗시리아 제국입니다. 마지막 때 앗수르 사람, 애굽 사람들이 왕의 대로를 통해 서로 왕래하며 이스라엘과 더불어 세 나라가 세계 중에서 복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이 말씀은 장차 마지막 때 성취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날은 메시아의 재림과도 연관이 있으며 동시에 사탄의 마지막 때입니다. 이집트, 앗수르, 이스라엘 세 나라가 세계 중에 복이 되는 그 날에 말씀이 성취되지 못 하도록 사탄과 악한 영들은 방해하고 가로막고 있습니다. 따라서 앗수르 지역의 백성들과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왕의 대로가 수축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사 62:10)

마지막 때 터키는 왕의 대로를 수축하기 위한 전진기지, 전략적 기지이고 사탄이 포기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터키의 복음화, 투르크 민족과 이웃 민족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며 왕의 대로를 수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 땅과 백성들을 지금 흔들고 계십니다.

SWM 선교회는 터키와 중동 및 이슬람권의 복음화와 영적 부흥을 위해 섬기고 있습니다. 왜 터키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 곳, 사탄의 진이 있는 곳, 왕의 대로가 수축되는 전략적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터키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터키로 보내주신 여러 민족의 복음화, 나아가 중동지역을 향한 거룩한 부르심과 영광스러운 사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리더십 칼럼

터키 선교의 터닝 포인트영적 전쟁과 중보기도

김성간 목사

2007년 터키 안탈리아 제1회 연중회

터키 개신교 협의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섬기셨던 앙카라 구원교회의 이산 외즈벡 목사님은 이슬람의 영을 ‘두려움의 영, 폭력의 영, 거짓의 영’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터키를 비롯한 모든 이슬람권 지역에서 강력한 영적 돌파와 복음의 역사가 편만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이 있으며, 이를 위해 신실하게 싸울 중보기도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글에서는 터키 연합중보기도 운동의 배경 및 의미와 함께 터키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들을 짚어볼 것입니다. 또한 이때에 어떻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터키 연합중보기도 운동의 배경

터키는 역사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고, 초대 교회 성도의 기도와 눈물, 순교의 피가 담겨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나아가 로마 제국의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당시 온 천하에 선포하며 결국 로마 제국까지 기독교로 정복한 초대교회의 요람입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이 함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강력한 이슬람의 영에 묶여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 민족은 그 후 500년 이상 전 세계 이슬람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때부터 기독교 선교 활동이 있었으나 그 열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2007년 당시 터키의 7천만 명 인구 중 예수를 믿는 성도의 수는 약 3천 명으로 0.005%도 안 되는 비율이었습니다.

2007년 초, 이러한 터키 영적 상황에 거룩한 불만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한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기도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터키 안탈리아에서 터키 및 중동과 이슬람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한 연합중보기도회(이하 연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선교는 우리의 힘과 능과 지혜로 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 됨을 힘써 지키지 않았던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미처 다 예측하지 못했지만, 이슬람의 ‘두려움의 영, 폭력의 영, 거짓의 영’과 영적 전쟁을 새롭게 선전포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1차 터닝 포인트: 말라티아 순교 사건

2014년 틸만 선교사의 미망인 수산나 선교사가 함께 순교한 우르 형제의 추모식에 참석한 모습 ⓒMorning Star News

2007년 연합중보기도회가 있은 지 2개월 후인 4월 18일, 터키 말라티아에서 독일 선교사 틸만과 터키 현지인 목사 네자티와 우르 형제가 극우민족주의 무슬림 청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터키 내부적으로는 터키 교회가 수면 위로 올라와 터키 현지인들에게 개신교의 존재가 인식되었고, 외부적으로는 터키 교회가 전 세계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순교 사건은 연합중보기도 운동이 시작되면서 곧바로 찾아온 터키 선교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에서 터닝 포인트는 늘 ‘영적 전쟁’과 ‘영적 돌파’ 두 가지를 동반합니다. 2007년 첫 터키 연합중보기도회로 시작된 이슬람의 영, 특별히 ‘두려움의 영’과의 더 치열한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말라티아 순교 사건 직후 터키 교회와 성도 중 일부는 복음을 위해 담대해지는 모습을 일시적으로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터키 교회와 성도는 이슬람의 ‘두려움의 영’에 강력한 공격을 받고, 영적으로 위축되는 시간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영적 공격은 그 땅의 선교사들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려움의 영’과의 영적 전쟁으로 터키 교회와 성도는 잠시 위축되었지만, 곧바로 주님께서는 영적 돌파를 위한 나팔을 불게 하는 연합중보기도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셨습니다. 이듬해 2008년에는 더 많은 중보기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영적 전쟁에 가담했고, 2009년에는 터키 교회 현지인 지도자들도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이슬람의 ‘두려움의 영’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에베소 Celebration and beyond’라는 이름으로 모인 연합중보기도회에는 전 세계 27개국에서 온 1,200여 명의 중보기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놀랍게도 약 700명의 터키 현지인 성도들도 함께 모여, “터키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외치며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하는 영적 돌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0년 연합중보기도회 이후 터키 현지 목사들과 성도들이 입을 모아 고백하는 것은 “우리도 터키를 복음화 할 수 있다”라는 영적 담대함입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여러 지역 교회들의 전도 집회 및 프로그램, 노방전도, 부활절과 성탄절 야외 행사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터키 선교와 현지 교회에 큰 영적 돌파입니다.

제2차 터닝포인트: 아랍혁명, 시리아 내전, IS 출현, 난민 발생 및 교회개척운동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대 ⓒ REUTERS/Zohra Bensemra

2010년 연합중보기도회 이후 그해 12월 정부의 독재와 부패에 분노한 튀니지 한 청년의 분신자살로 아랍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시위는 알제리, 요르단. 이집트, 예멘으로 먼저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이어 다른 아랍 국가들로 확산하며 전례가 없는 대규모 시위 운동 및 혁명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국가의 종교가 이슬람인 나라들에서만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시리아에서는 아랍혁명이 2011년부터 현재까지 내전으로 이어졌으며 미국, 러시아, 터키, 이란 등의 나라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4년부터 IS, 또는 ISIS, ISIL로 표기되는 비승인 이슬람국가 테러 단체가 시리아와 이라크를 중심으로 중동지역에 출현했습니다. IS의 목표 중에 하나는 정통 이슬람이 아닌 모든 종교와 민족들, 특히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절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찾기가 쉽지 않지만,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최소한 38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구의 절반이 넘는 1,100만 명이 국내실향민 (Internally Displaced People/IDP)과 난민(Refugee)으로 정든 고향을 떠났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IS의 만행으로 인해 지난 2014년 1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이라크에서만 최소한 1만 8,802명이 사망했고, 최소 3만 6,245명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다고 UN이 발표했습니다. 또한 이라크의 IS 점령 지역에서 대략 3,500여 명이 노예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이라는 UN의 보고 (2016년 1월 발표)가 있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이슬람의 ‘폭력의 영’으로 너무나 많은 영혼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이슬람 ‘폭력의 영’의 무참한 공격으로 사상자들이 너무 많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난리와 전쟁은 터키와 중동 선교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아랍혁명과 시리아 내전 및 IS 만행들로 인해 수많은 무슬림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처참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실체를 보게 되었고, 참 진리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마음이 열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갈망이 생겨났습니다. 이슬람과 영적 전쟁 가운데 아주 강력한 영적 돌파가 일어난 것입니다.

현재 터키에는 약 4백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시리아에서, 그리고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이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난민 성도들이 모여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터키 각처에서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며 기도했던 교회개척운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터키 선교의 놀라운 영적 돌파입니다.

제3차 터닝포인트: 터키 현 정부의 노골적인 기독교 탄압, 그리고 코로나 19 팬데믹

레젭 타입 에르도안 대통령을 비롯한 터키 고위 인사들이 지난 7월 24일 금요일 아야 소피아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한 가운데 이맘이 꾸란을 낭독하고 있다 ⓒAP

최근 난민들 가운데 새 교회들이 세워지고, 이에 자극을 받은 터키 현지 교회들도 영적·양적 부흥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맞서 터키 현 정부는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과 내용으로 터키의 교회를 압박하고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최근 터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선교사들을 근거 없는 이유와 거짓 혐의로 추방하고, 재입국을 거절하거나 거주비자 연장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작년 2019년 한 해 동안 터키 정부가 추방한 미국 국적 선교사들만 33가정이고, 올해 2020년 상반기에는 10가정을 또 추방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추방과 재입국 거절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한 터키 정부는 터키 기독교 역사의 상징인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교회를 이슬람 사원으로 전락시키며 계속 기독교를 향한 이슬람 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보이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닌 그것들 뒤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있는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특별히 이슬람의 ‘거짓의 영’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휩싸이게 한 코로나 19 팬데믹 사태는 터키와 중동 지역을 포함한 세계 선교에 또 하나의 엄청난 터닝 포인트입니다. 21세기 인류의 역사가 BC (Before Corona 19)와 AC (After Corona 19)로 구분된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터키에서도 오프라인의 대면 예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선교에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없는 공동체의 모임, 예배, 만남, 전도, 그 외 여러 사역들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반전의 우리 하나님께서는 새롭고 강력한 영적 돌파를 허락해 주십니다. 코로나 19 감염 및 확산 위험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집에 갇혀 있는 무슬림 영혼들에게 각종 인터넷 사역들과 SNS 및 온라인 사역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어떤 장애물이나 거침이 없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온라인 사역들은 국경의 제한도 없습니다. 현재 터키에서는 PIMO (Partners in Internet Ministry Outreach)라는 네트워크를 통하여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된 복음을 코로나 이전보다 더 광범위하게 온라인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우리는 잠시 매여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결코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고 편만하게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거짓의 영’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가만히 방관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또한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마주하는 이때, 터키와 중동지역의 영적 돌파와 부흥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 영혼들이 깨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슬람의 ‘거짓의 영’에 묶여 있는 무슬림 영혼들이 영적으로 깨어나 이슬람의 실체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눈을 뜨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인 이때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졸거나 자는 교회와 성도들이 깨어나고, 계속 깨어 있도록 또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일들을 “아멘! 주님, 행하시옵소서!”라고 말씀을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이때에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기도보다 더 강력한 영적 돌파를 이뤄내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감히 우리가 응원하고 송축하는 기도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아멘, 주님 그렇습니다! 터키는 여호와의 것입니다. 중동은 주님의 것입니다. 아랍연맹 나라들은 주님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은, 미국은, 모든 나라는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속히 이루시옵소서!

셋째, 연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 각자의 기도가 사탄과 그의 강한 진을 향한 한발의 저격이라면, 성도의 연합된 기도는 사탄과 그의 강한 진을 융단 폭격하는 것이라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함께 더 모일수록 더 연합할수록 우리의 기도는 그만큼 더 강해집니다.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비록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모이지 못하지만,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모일 수 있습니다. 아니,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SWM선교회가 매주 목요일 온라인으로 모이는 연합기도회의 의미와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연합하여 터키와 중동과 이슬람권의 영적 돌파와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파트너 칼럼

터키 선교의 분석 및 연구

김선희 사역자

Why Turkey?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곳이며, 이웃 국가 및 중동의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서 경제와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이슬람 외교정책에 매우 고무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럽 사회에 터키의 전략적 역할이 점차 강화되어 왔다. 터키는 1952년 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서 중동지역의 전략적 파트너가 되었고, 아랍국가들과 러시아를 포함한 이스라엘 등 모든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서 어두운 긴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15세기 이후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한때 유럽의 오스트리아,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구소련의 코카서스 지역 및 중앙아시아의 대륙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중동 정치의 중심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무너지고, 터키의 민족주의 지도자 아타투르크에 의해 1923년 터키 민주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근대 터키는 민족주의 이념과 함께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여 좀 더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 이후 많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터키 군대는 스스로 헌법을 수호하는 중재자의 역할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터키 민주화와 세속적 가치에 도전하는 세력을 축출하고, 쿠데타를 여러 번 감행해왔다. 터키는 오랫동안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2005년에 멤버십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터키의 인권 유린 및 종교 탄압 그리고 인구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쿠르드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 등 여러 부분으로 인해 가입 절차가 멈춰있다.

터키는 자신들의 민족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한다고 비난하는 쿠르드 분리주의자와 1980년 이후부터 터키 동부 곳곳에서 민족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또 백 년 동안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도 아직 해결책을 찾지못한 채 묻어 두고 있다. 2010년부터 들어온 시리아 난민들과 주변 국가의 난민들로 인해 터키는 그야말로 포화 상태가 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보유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 제국

투르크멘 족장 오스만 1세는 유목민으로 지금의 터키 땅에 들어와서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코카서스 및 발칸 지역의 유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지배하였으며, 이스탄불을 수도로 하는 술탄 중심의 군주 왕정 정치가 1922년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종식하였고, 소아시아와 발칸 국가들을 오스만 제국이 통합하였다. 15~16세기 오스만 제국은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하여 이슬람 세력을 구축하였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이 비엔나 전투로 좌절되고 더 유럽으로 나가지 못하자 오스만 제국은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다. 1900년 오스만 제국의 부와 권력은 이미 내부의 균열과 함께 세계열강에 의하여 나뉘었으며, 술탄은 통치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의 분할과 술탄 통치의 무능력을 배척한 젊은 터키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으로 터키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였다.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가 이끄는 당은 이슬람을 국가 종교로 두지 못하도록 헌법으로 정하였다.
1950년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취했으며, UN 가입 2년 뒤 NATO에 가입하여 중동의 군사 충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63년 터키는 유럽경제공동체 (EEC)와 계약을 체결하여 유럽 시장에 진출하였다.
1974년 터키군은 북키프로스를 무단으로 침공하여 그곳에 있는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고 많은 충돌을 일으켰으며, 아직도 분단 상태인 키프로스의 북쪽을 터키가 차지하고 있다. 1980년 터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치적 교착 상태와 시민 불안을 이유로 계엄령을 내렸다. 그리고 터키 동남부 곳곳에서 쿠르드노동자당 (PKK)이 독립을 위한 내전을 시작하였다.

2002년 강경 이슬람에 기반을 둔 정의개발당 (AKP)을 이끄는 에르도안이 총리가 되는 승리를 거둔 뒤 의회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 터키군을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2003년 이스탄불의 주요 회당 근처에서 차량 폭탄, 영국 영사관과 영국 은행에 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며, 새로운 리라 통화가 도입되는 화폐 개혁이 있었다.
2007년 터키 아르메니아인 언론인 흐란트 딩크의 암살을 시작으로 말라티아 기독교인 살해 사건, 트라브존 가톨릭 신부 살해 등 극단주의 종교적 탄압이 있었다.
2008년 터키의 세속주의 헌법을 바꾸어 여성들이 이슬람의 상징인 히잡을 학교나 병원, 어느 곳에서든 착용하게 하였다.

2010년 가자 지구를 향하는 구호 소함대에 대한 이스라엘 특공대의 습격으로 터키 활동가 9명이 사망한 후 터키는 이스라엘에 그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요구했다. 2013년 이스탄불의 녹지 공간 중 하나를 개발하려는 계획으로 인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경찰이 폭력으로 대응하고 무산되었다.
2014년 에르도안 총리는 터키 첫 번째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5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총리 시절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 혐의로 기소된 236명의 군 장교를 축출하였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높이려 했지만 국민 투표에 필요한 지지율을 얻지 못했다. 터키 정부가 시리아 폭격 임무에서 러시아 군용 제트기를 격추하자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인 러시아가 경제 제재를 가했다. 유럽연합은 터키에 30억 유로 (317억 달러)의 협상을 하여 난민의 유럽 진출을 막게 하였다.
2016년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곧 실패했다. 에르도안은 페툴라 귤렌과 연루된 혐의로 수천 명의 군인과 판사를 구금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실패한 쿠데타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는 동안 16개 TV 채널과 모든 인터넷 소셜 미디어를 중단시켰다. 2018년 터키군이 시리아 북서부에서 ‘올리브 가지’ 육상 및 항공 작전을 시작하여 아프린 마을을 포함해 쿠르드족의 통제 아래 있던 넓은 지역을 점령했다. 2019년 미국은 시리아 북부에서 군대를 철수하였고, 터키 군대가 이 지역에서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터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그의 정의개발당 (AKP) 당원들에게 “터키는 내 나라이며, 나는 대통령직을 이끌어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내가 언젠가 ‘타맘(Tamam: 충분하다)’고 말할 때가 올 것이며, 그때 기꺼이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몇 시간 뒤에 약 50만 명의 트위터 사용자가 “Tamam”이라고 게시물을 올렸으나, 그의 지지자들은 바로 수비에 뛰어들어, “아니요, 절대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에르도안과 함께 갈 것입니다”라고 게시했다.

터키의 검열

2013년부터 2019년까지 터키의 인터넷 사용자 수

터키의 페이스북 사용률은 2020년에 46.68%로, 3,700만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터키의 전체 8,300만 명 인구 가운데 56% 이상의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여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언론매체는 그를 비판하거나 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많은 기자나 언론매체가 소리 없이 사라져 갔으며, 수많은 언론인들이 교도소에 수감되는 등, 최악의 언론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 7월 인터넷의 한 플랫폼에서 에르도안의 딸이 네 번째 자녀를 출산한 것에 대한 비난이 있자, 가혹한 인신공격이라며 ‘부도덕한’ 플랫폼은 완전히 금지되거나 통제될 것을 경고했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강제하는 법을 채택하였다. 콘텐츠 삭제 요청이 있을 때, 트위터 및 페이스북과 같은 회사는 48시간 이내에 이러한 요청을 처리해야 한다. 만약 이를 준수하지 않는 매체에는 광고 금지, 최대 6백만 달러의 벌금, 최대 90%의 대역폭 감소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심각한 사용의 제약을 받게 된다.

터키의 신 오스만 주의 (Neo–Ottomanism)

중동의 칼리프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순니파 이슬람 터키는 주변 국가들 사이에 ‘빅브라더 (큰형님 기질)’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이고, 소수의 수피 무슬림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와 함께 에르도안 정부에서는 중동의 신흥 세력과 협력하여 오랫동안 신 오스만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에르도안 정부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형제애를 다지면서 새로운 외교정책으로 유럽 연합과 미국의 세력을 견제하는 ‘신-오스만주의 (Neo-Ottomanism)’를 추구하며 오스만 시대로 돌아가려는 열망을 보이고 있다.
터키와 역사적, 문화적 유대 관계가 있는 오스만 제국의 주변 국가들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연스러운’ 칼리프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2년부터 에르도안과 그의 정부는 순니파 이슬람을 통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도 무슬림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터키는 ‘지리적 전략 비전’으로 ‘보호자’와 ‘형제’의 역할을 하면서 시리아의 극단주의 순니파 무슬림 단체와 소말리아에 원조 정책을 펼쳤다. 터키는 새로운 동맹을 찾는다며 ‘공통 이슬람 가치’에 대한 강조와 함께 아프리카에 뛰어들고 있다.

중동 여러 국가들은 터키의 경제적 성공 때문에 터키처럼 되기를 열망한다. 터키 제품이 수입되고, 터키 학교 및 대학이 설립되고 터키 건설 회사와 대기업은 새로운 공장을 열고 있다. 또한 터키 연속극은 중동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중동의 국가들은 현대적 이슬람 생활방식을 터키로부터 배우고 있다.

신뢰의 회복

그러나 터키는 사실상 포퓰리즘 외교 정책으로 많은 신뢰를 잃었으며, 에르도안의 불확실한 외교 방향은 주변국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서방의 동맹국 대부분은 터키에 대해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에르도안 초기 정부의 정책인 신 오스만 시대를 열어갈 야심 찬 계획은 시리아의 예상치 못한 장기적인 내전으로 인하여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는 난민 보호국으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특별히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중동에서 떠오르는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던 터키의 신 오스만 제국의 위상은 세계 정세의 변화를 타고 민감하게 파고드는 정치와 경제에 의해 다시 재조정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 역시 스스로를 ‘보수-민주적’ 대중 정당으로 인식시키려 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강경 이슬람에 뿌리를 두면서 주변 정세를 살피고 있다. 중동의 주변 국가들과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피나는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해왔지만, 신 오스만주의 민주주의라고 믿도록 신뢰할 수 있는 부분에 많은 한계와 의심의 여지를 여러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터키는 국가 안보가 아닌 경제적 상호 의존에 입각한 외교 정책의 내재화로 이슬람 주변 국가들 사이에 중간 세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터키의 주요 경제 및 정치 포럼에서 이슬람 지역의 균형 잡힌 협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노력했으며, 중동의 평화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중재의 역할을 감당하려 노력하고 있다.

터키 선교에 대한 소망

세계 인구의 24.1%, 18억 명이 무슬림이다. 이들 중 이슬람 종파의 가장 큰 순니파에 속하는 15억 인구가 중동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그중 20%인 약 3억의 인구가 시아파에 속한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무슬림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며, 많은 회심자들이 나오길 기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풍습, 생활 방식이 다른 것으로 인해서 무슬림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시각이나 고정 관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터키는 14세기 오스만 제국이 되기 전에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났던 곳이며, 그들의 신앙생활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터키 대부분의 지역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교회와 수도원, 예배 처소들이 남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거나 박해를 당하고 순교하기도 했다. 터키의 여러 곳에서 보여주었던 참 예배의 모습이 다시금 새롭게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주님의 은혜의 구원이 다시금 이 땅에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파트너 칼럼

터키의 영적 각성은 이슬람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존 마틴

아마시아와 영적 어둠

터키 아마시아의 키벨레 여신에게 제사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신전 (암벽)

터키 흑해 해안에서 약 1시간 반 떨어진 북 아나톨리아 산맥의 뒤편에 자리 잡은 아마시아는 지구상에서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곳 중 하나이다. 33만 명이 넘는 이 지역의 인구 중에서 터키 신자 2~3명과 이라크와 이란에서 온 소수의 기독교 난민을 제외하면 알려진 다른 기독교인은 없다. 10여 년 전, 페르시아 난민들 사이의 정기적인 예배 모임을 정부 당국이 막은 이후, 이 도시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의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시아의 영적인 어두움은 최근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 도시는 고대 시대에 형성되었고, 학자들은 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성곽의 기초가 4,0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시아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와 160km 떨어져 있다. 현재 도시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히타이트의 주신인 폭풍의 신 테슙의 큰 조형물이 아마시아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아, 아마시아가 히타이트인들의 제사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 시대에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바위 언덕을 잘라 묘지로 만들었으며, 폰투스 왕들의 무덤과 제사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4세기 초 기독교로 개종한 테오도라는 로마 병사에 의해 잔혹하게 불에 타 순교하였다. 당시 키벨레 여신에게 바쳐진 중요한 신전이 불에 완전히 타버렸는데, 로마 당국은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여겼다.

스트라보의 세계지도

물론 초기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아마시아에도 복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수백 년 동안 동부 기독교인들은 아마시아와 그 주변에 살았다. 그러나 이 도시는 7세기 아랍 무슬림 침략자들의 초기 목표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결국 11세기에는 투르크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아마시아는 문화 교육 중심지로 알려졌다. 무슬림들의 종교 교육기관인 마드라사가 아마시아 전역에 퍼졌고, 오스만 술탄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자기 아들을 보내 교육을 받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슬람은 영적 어둠의 두꺼운 베일을 이 도시 위에 펼쳐 놓았고 이 어둠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뚜렷이 나타난다. 외국인 사역자들은 이 도시의 거주권을 얻기가 매우 힘들며, 단기 봉사 단체들도 당국의 추적을 받고 있다고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아나톨리아

아이리스 강 옆에 서있는 스트라보의 동상 ⓒ Erturac

아마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로 철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를 들 수 있다. 스트라보의 세계 지도는 로마 세계에 알려진 모든 지역을 포괄했는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많은 부분이 포함되었다. 지도 중앙에는 스트라보의 고향이며 현대 터키를 구성하는 아나톨리아 반도가 눈에 띄게 그려져 있다. 지도 제작에 대한 스트라보의 접근 방식은 중세시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서양의 지도제작자들은 아나톨리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세계의 중심에 그렸다.

아나톨리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스트라보 이후 이어진 성경의 역사와도 이어진다. 후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은 동역자인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출발하였고, 우리가 오늘날 터키로 알고 있는 지역의 복음화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그들의 모든 열정을 쏟았다.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성경 지명인 안디옥, 이고니온, 갈라디아, 본도, 골로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7개 교회와 그 외 많은 지역은 모두 현대 터키에 포함되어 있다. 클레멘트, 폴리카르포스, 바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존 크리소스톰 등 교회의 중요한 초대 교부들도 모두 아나톨리아 출신이었다. 실제로 이 지역은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슬람이 발흥하여 아랍 세계에 도착하였고, 이후 투르크 무슬림들과 함께 아나톨리아의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었고, 아나톨리아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슬람 세계의 권력 중심이 바그다드의 아랍 지배에서 새로 정복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오스만 투르크로 이동하면서 이슬람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토착 정통 기독교 인구는 수백 년 동안 무슬림 이웃과 함께 살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들에 패배하고, 이후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인들이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일으킨 후, 인구 교환 조율 과정에서 정통 기독교인들(약 130만 명)은 강제적으로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혀 그리스로 보내졌다. 이러한 강제이주는 현대 터키에서 새로운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새 정부의 의지였다. 동시에 1830년대 후반부터 터키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사들은 활동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터키에는 30년 동안 거의 복음의 증인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1950년대부터 터키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흩어진 나그네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 1:1-2)

오늘날 터키 기독교인들의 상황은 베드로전서 1:1에 나온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공식적으로 터키 인구의 99%는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율은 터키 인구 8천만 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알레비파 같은 소수 이교도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약 6,000명의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이 터키 전역에 흩어져 있다. 그들은 터키 인구의 0.008%에 해당하며, 미국이나 한국의 대형교회 건물 하나에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스탄불, 이즈미르, 앙카라 등 터키의 도시 중심지에 살고 있다. 터키의 일부 지방에는 아직도 단 한 개의 정기적인 교회 모임이 없으며, 흑해 지역과 같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 속에 겨우 몇백 명의 터키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처럼 현대 터키의 이슬람 배경을 가진 많은 기독교인들은 포위되었다고 느낀다. 그들은 개종과 동시에 가족과 분리될 수도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직업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기독교 신앙을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기도 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미혼 신자들은 그들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된 부모에 의해 지역 교회의 모임에 가는 것이 금지되는 경우가 많다. 공개적으로 목회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살해의 위협을 받는다. 교회는 내부에 잠입한 비밀경찰들의 존재로 공포에 휩싸여 있다. 그러한 첩보 행위에 대한 수많은 사례가 터키 전역의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일부 개종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압박이 너무 커져서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거나 기독교 신자인 것을 비밀로 하고 신앙을 이어간다. 나의 경험은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자로 길러내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돌아서는 이들이 절반 이상일 수도 있다.

희망의 이유 하나,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비록 지금까지 묘사된 상황이 암울해 보일지 모르지만, 전 세계 신자들이 터키의 복음의 진전에 대해 희망을 품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터키는 더 큰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 전역에 걸쳐 복음이 퍼져가는 것에 대한 소망의 이유가 된다. 이 소망의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모든 나라, 족속, 백성, 방언에서부터 모인 무리의 환상을 보았다. 터키의 교회들과 선교사들은 분명히 터키어, 쿠르드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이들도 함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외칠 것임을 굳게 믿고 사역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 터키의 교회가 작아 보이고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약해 보일지라도 이 비전은 확실하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희망의 이유 둘, 종교의 자유가 있는 터키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는 또 있다. 바로 터키는 이슬람 세계에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무슬림 다수국이지만 터키는 공식적으로 세속적인 헌법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를 갖고 있다. 비록 지난 1년 동안 60명 이상의 외국인 기독교 사역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되었고, 개종에 따르는 사회적 압력이 있으며, 정부의 종교 자유의 원칙이 항상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터키는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믿을 권리를 보장한다. 터키에는 사형제도가 없으며, 개종에 따르는 죽음의 위협이 훨씬 덜하다. 하지만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는 여전히 개종에 대해 사형이 내려지기도 한다. 또한 터키에서는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도 허용된다. 터키 정부는 심지어 교회 집회를 보호하기 위해 연방경찰을 보내기도 하는데 그 비용을 교회에 부담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자유는 종교적인 구도자들이 정부의 억압, 검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거의 갖지 않고 기독교를 연구하고 탐구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연구를 하고 있다. 터키는 30세 미만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젊은 인구층이 많은 나라 중 하나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와 교회, 복음에 대한 풍부한 자원이 터키어로 제공되었고 온라인에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터키의 기성세대들은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무슬림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들을 무슬림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터키의 젊은이들은 사려 깊은 연구와 성찰을 통해 개인의 종교적 확신에 도달하는 데 더 높은 가치를 둔다.(Jenny White. Muslim Nationalism and the New Turk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이러한 변화는 터키의 복음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 터키 이슬람 정부의 레젭 타입 에르도안 대통령은 ‘경건한 세대’를 길러내기 위해 수백만 리라를 종교학교 건설과 종교인 양성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그러한 노력이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확실히 터키의 젊은 무슬림들은 이슬람교, 특히 그들이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분을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라. 터키에서 기독교 회심자의 대다수는 대학생과 젊은 전문가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희망의 이유 셋, 중앙아시아 전역으로의 전파 가능성

터키에 복음이 계속 뿌리내리게 되면서 터키 문화 영향의 물줄기를 따라 중앙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다. 터키인 조상의 뿌리는 오늘날 몽골을 구성하는 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를 가로질러 이주하여 마침내 아나톨리아에 도달했다. 오늘날에도 투르크어는 불가리아에서 중국의 서쪽 지역까지 사용되고 있고, 그들의 언어는 상당 부분 다른 투르크어 화자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터키는 이 지역 전역에 상당한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터키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는 중앙아시아와 심지어 중동 전역에서 인기가 있다. 터키의 기업 및 교육 기관들도 이 지역에 센터를 설립했다. 터키 텔레비전 산업이 중앙아시아 전체를 위한 복음 콘텐츠를 생산한다고 상상해 보라!

희망의 이유 넷, 이슬람 세계에 비추는 복음의 빛

또 다른 희망적인 이유는 터키에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은 무슬림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백만의 민족들이 전쟁, 가난, 종교적·정치적 박해를 피해 난민과 망명 신분으로 터키에 오고 있으며, 시리아에서만 4백만 명 이상이 왔다. 많은 난민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치는 기독교인이다. 또한 망명 신청자들의 다수가 터키의 다른 난민들과 교회들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터키 정부는 도시 중심지에 난민이 모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터키 전역 60개 이상 도시에 난민들을 배치하고 있다. 이 도시 중 많은 곳은 복음의 증인들이 없었다. 특히 터키 남동부 지역은 유럽, 미국, 한국 선교사들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곳이다. 지금 이란 등지에서 온 기독교 난민들은 다른 난민들과 그 도시 터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빛을 밝게 비추고 있다.

터키를 방문하는 다른 여행객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와 같은 부유한 아랍 이슬람 국가들에서 온다. 많은 아랍 관광객들이 이스탄불의 명소를 보러 오거나 동부 흑해 지역의 산이나 터키 지중해 연안의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온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나라들 중 일부는 복음 전도에 극도로 저항하고 있는데, 터키의 교회와 선교사들은 전략적으로 이러한 관광객들과 접촉하는 기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터키 땅에서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어 그들의 집으로 복음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기도한다.

복음의 다리가 될 터키

위의 네 가지 이유와 그보다 많은 이유로 우리는 터키가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복음의 가교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기도할 수 있다. 아마시아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상당 부분이 영적 어둠에 싸여 있지만, 터키에서 성령의 움직임에 대한 증거는 점점 커지고 있다. 터키의 교회와 선교사들은 더 큰 영적 각성의 움직임을 증언하고 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이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 온 기독교인들의 복음 증거를 통해 생겨났다. 전도하고, 제자 삼고, 교회를 세우는 이러한 현대판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아버지께서 능력과 담대함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터키를 세계 선교의 중심지로 사용하시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것이다.

존 마틴(보안명) 사역자는 터키 흑해지역에서 사역했다. 왕성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서 교회를 세우며 교회가 개척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한 증인이다. 지금은 독일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터키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파트너 칼럼

말라티아 교회 이야기

팀 스톤 사역자

아마시아와 영적 어둠

틸만 선교사 묘역

“말라티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틸만을 찾을 수가 없군. TV를 켜봐.”

그 전화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다. TV의 모든 채널에는 경찰과 구급차가 가득했다. 들것에 실린 어떤 사람은 힘없이 움직였고, 어떤 사람은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의 세 친구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을 위해 지독히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이었다. 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다급한 기도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들어서자 TV가 켜져 있었고, 아내는 틸만의 미망인 수산나 게스케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와 그녀에게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백하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파란 눈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말들은 터키 전역과 터키 교회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바뀌었다. 터키 TV는 이 영상을 며칠 동안 방송했고, 신문들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를 인용한 헤드라인으로 가득했다. 한 무슬림 신문 기자는 “그녀는 한 문장으로 1,000년 동안 1,000명의 선교사가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했다”라고 썼다.

2007년 그날

(왼쪽부터) 네자티 아이든, 우르 육셀, 틸만 게스케 (사진=월드와치모니터)

수산나과 틸만 게스케 부부는 2003년 터키 동부의 말라티아 도시로 이주한 독일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작은 기독인 그룹에 합류했고, 작지만 성장하는 지역 내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었다. 터키인 목사 네자티 아이든과 쿠르드계 소수민족 출신인 우르 형제의 도움으로 틸만과 수산나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땅에 살게 되었다. 틸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통역사로 일하며 작은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2007년은 민족주의자들과 종교 단체 간의 싸움, 군과 정부 그리고 다른 강력한 세력들 간의 긴장, 국가 내 엄청난 불안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해였다. 신문에는 기독교인들을 외국 공작원과 배신자로 묘사하며, 기독교 교회에 대한 심각한 거짓 비난을 하는 자극적인 기사들로 가득했다. 2006년에 흑해 트라브존시에서 로마 가톨릭 신부가 살해되었고, 삼순시에서 또 다른 신부가 칼에 찔렸다. 2007년 1월에는 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이 이스탄불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모든 공격자는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젊은 10대 남성들이었다.

말라티아시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압력이 극심했다. 정부는 이미 그곳의 외국인 가족들에게 엄청난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 정부는 외국인 사역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노동허가증을 주지 않았다. 한 가족은 이미 그곳을 떠났다. 틸만 게스케는 노동 허가증을 받지 못한 후 사무실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떠나야 할지 남아야 할지에 대해 수산나와 의논했다. 틸만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성경 공부 자료의 터키어 번역 작업을 끝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사무실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그는 터키인 네자티 아이든 목사가 근무했던 지르베 출판사에서 방을 빌려 사용하였다. 바로 그 사무실에서 순교 사건이 일어났다.

수산나 선교사 가족

엠레 규나이든이라는 청년은 네자티 목사에게 다가와 복음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며 예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성경 공부에도 나왔고 심지어 교회 청년 모임과 볼링도 쳤다. 네자티의 아내 셈사는 네자티에게 엠레에 대해 경고했었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네자티는 “나도 그를 믿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해 알려달라고 요청했어요. 안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운명적인 그날 아침, 엠레는 친구들을 성경 공부에 데려와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날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모스크에 들러 씻고 목욕을 하고 기도를 했다. 그들은 정결 의식을 마친 뒤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우리의 행동은 이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적힌 메모가 들어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밧줄과 칼이 들려 있었다. 교회의 네 번째 멤버 굑한은 모임에 늦게 되었다. 두어 시간 늦게 도착한 그는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이 잠긴 것을 발견했다. 그는 노크를 했고, 안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당황한 그는 우르 형제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대답하는 우르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니, 아니 - 사무실에 오지 마시오”라고 우르는 말했다. “골든 아프리캇 호텔로 가세요. 거기서 만납시다.” 굑한은 자신이 문 앞에 있다고 설명하려 했으나 우르는 점점 강하게 “가요!”라고 말하며 “호텔로 가!”라고 말했다. 심히 걱정된 굑한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경찰을 불렀다.

몇 명의 경찰관이 신속하게 도착했고, 곧 지역 뉴스의 카메라가 따라왔다. 사무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경찰은 문을 부수고 열었다. 문 안에는 세 명의 기독교인이 의자에 묶인 채 베이고 고문당하고 목이 잘렸다. 청년 중 네 명이 즉시 체포되었고, 엠레 규나이든은 창문을 통해 탈출하여 4층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넘어져 경찰에 붙잡혔다. 틸만과 네자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우르는 죽어 가고 있었다. 구급차에서 그는 공격자들이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자 고문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곧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고, 우르는 목숨을 잃었다.

그 위기에서 친구들은 수산나의 가족을 도울 사람들을 찾았다. 누가 요리를 할 수 있는지, 누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지, 누가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누가 자원하는지 명단을 만들었다. 틸만이 묻힌 지 며칠 후, 우리 가족은 말라티아에 도착했다. 요리와 청소하는 일 그리고 기자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수산나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지만, 매일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우리는 그녀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나는 남고 싶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내가 떠나야 한다고 말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났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때 16명의 사역자로 이루어진 강력한 팀이 사라졌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단체에 의해 옮겨졌고,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떠났다. 남은 사람은 미망인 한 명과 그녀의 세 자녀뿐이었다. 그 주 일요일, 우리는 그 공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았다. 30명 이상의 터키 신자들이 있던 강한 교회에는 10대 후반의 젊은 소녀 3명만 남았다. 목자들은 손을 놓았고, 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미망인 수산나는 자신이 남아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느꼈다. 그녀는 이제 왜 틸만이 남아야 할지 떠나야 할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는지 이해했다고 말했다. 틸만은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느꼈고, 수산나는 계속 머물도록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떠나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그녀는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큰딸 미칼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 아빠는 이 사람들을 위해 죽었어요.” 미칼은 13살이었다.

우리가 말라티아에 와서 몇 명이 채 남지 않은 교회를 만난 지 하루 이틀도 안 되어, 아내 사라는 나에게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해야 해요. 이 교회에는 무엇보다 우리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며칠 더 기도하고, 이스탄불에 있는 우리 교회의 터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말라티아에 있는 새 아파트를 빌렸다. 초등학생인 두 명의 아이와 이제 걷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우리는 새집으로 왔다.

그날 이후

지르베 출판사 건물

순교가 일어난 후 첫해는 쉽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잃은 몇몇 신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머무르지 않았다. 한번은 공원에서 한 청년을 만난 뒤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 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와 이야기했던 남자의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 가족은 그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가 당신과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요. 다시는 그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그 청년은 전화기를 빼앗겼고, 우리는 몇 년 동안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의 가장 강한 신자들 중 몇몇은 안전한 도시로 이사했다. 그들은 말라티아 교회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은 이해했지만, 그들 가족의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라면 가족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곳, 친척들이 매일 그들을 보는 마을에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고 말았다.

실망스러운 가운데 희망의 흔적도 보였다. 한 가지 격려는 일마즈라고 불리는 남자와 그의 가족이었다. 일마즈는 순교한 터키인 목사 네자티의 친구였다. 지르베 출판사가 ‘누가 교회를 돕기 위해 말라티아로 이사하시겠습니까?’라고 요청했을 때, 일마즈가 응답했다.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은 교회가 다시 살아나도록 돕기 위해 말라티아로 이사했다.

두 번째 격려가 되는 일은, 살인 사건 재판 첫날 법원 청사에서 있었다. 기자들과 사진사, 경찰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한 청년이 우리 근처로 왔다. “제 이름은 베닷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 <패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따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2년여의 세월 동안 우리에게 온 유일한 신자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교자들을 고문하여 죽게 한 5명은 그와 같은 나이였다. 남은 신자들은 미지의 청년들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거의 6개월 동안 그는 진심으로 예수께 헌신하겠다고 우리를 설득하였고, 우리는 마침내 베닷에게 세례를 주고 가족으로 맞이하였다.

말라티아의 열매

툰젤리

이 모든 것이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의 일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고통과 은혜, 비극과 승리를 겪어왔다. 슬픔의 무덤과 세 명의 어린 소녀들만 남았던 말라티아의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은 강한 교회로 다시 세우셨다. 교회는 이제 새로운 지방에서 전도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세 개의 새로운 교회가 탄생했다. 툰젤리 지방에 있는 교회는 일마즈와 벤자민이 이끈 우리 말라티아 교회 전도팀이 세운 것이다. 툰젤리로의 한 전도 여행에서, 일마즈는 마을 근처의 동굴을 보고, 탐험하기 위해 올라갔었다. 동굴에서 그는 분명한 십자가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1915년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박해당하고 살해되던 사건에서 마을 사람들은 아르메니아 난민들을 동굴에 숨겼다. 그들이 나라를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안전하게 지켜주면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일마즈의 조상 중 한쪽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이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마즈는 동굴에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당신의 자녀들을 구하려고 했으니,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울며 주님께 기도했다. 일마즈와 그의 가족은 툰젤리로 이주하였다. 말라티아 교회는 축복하며 그들을 파송했으며 일마즈는 현재 툰젤리에서 교회를 이끌고 있다.

말라티아 청각장애인 교회의 모습
엘라즈으

1915년 이전에 엘라즈으 시는 터키 전역에서 가장 많은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신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 도시에는 기독교 고등학교가 있었고, 심지어 신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이후 교회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거의 100년 동안 엘라즈으에서는 예수에 대한 증언이 없었다. 우리는 엘라즈으에 여러 번 방문하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지만, 몇 년 동안 거의 열매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핵심이 되는 적은 신자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 도시로 이주한 중년의 한국인 사역자와 엘라지으 대학에 온 미국인 가족의 도움으로 소그룹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교회가 탄생했다. 내가 성경책을 전해주었던 한 사람은 몇 년 동안 보이지 않았다가 신자가 되어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현재 그 미국 가정은 이사했지만, 새로운 두 가족이 이 모임에 들어왔고, 엘라지으 교회에는 주일마다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많은 현지인 신자들이 있다. 거의 100년 동안 예수의 빛이 사라진 듯했던 곳에는 이제 또 다른 횃불이 높이 들려지고 있다.

살인사건의 첫 재판에서 만났던 젊은이 베닷은 한 달에 세 번씩 엘라지으를 찾아가 교회를 세우고 훈련한다. 그는 미전도 지역인 엘비스탄과 무쉬에서 복음전도를 하는 것 외에 이곳 말라티아의 리더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각장애인 교회

하나님은 또한 말라티아에 청각장애인 교회를 세워주셨다. 이 교회는 터키 전역의 청각장애 무슬림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들은 매우 큰 기적이다. 한 번은 우리 도시에서 첫 번째로 예수께 나온 청각장애인 아흐메트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근처에 앉았고, 우리는 곧 그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흐메트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남자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그의 삶을 듣게 되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가 있었고, 거의 3시간 떨어진 마을에 사는 농부였다. 그는 물건을 사기 위해 우리 마을에 왔고, 차를 마시려고 가게에 막 들른 참이었다. 오, 내 심장이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지! 어느 교회와도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청각장애로 태어난 이 사람, 설사 성경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이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더 길을 잃은, 잃어버린 양이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 찻집으로 이끄셨고, 그의 마음의 언어로 예수님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한 명의 터키인을 만나게 하셨다. 오, 기적위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오병이어의 삶과 하나님의 능력

말라티아 쿠루트루쉬 교회 성도들

지금 돌이켜보며,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경탄한다. 우리가 처음 말라티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나는 압도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위해 잔인하게 고문당했던 교회의 짐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이셨던 구절을 기억했고,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제자들이 예수께 그들의 필요를 보여드렸을 때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다. 나는 제자들의 혼란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맡기신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주님, 우리에게는 이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으며, 이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부분에서 내 마음이 울렸다.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일은 너무 크고, 저는 너무 작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더라도, 예수님은 그냥 “내게 주라”고만 하신다. 제자들이 적게 있는 그대로 예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은 넘치게 만드셨다. 그는 5,000명을 먹여 살리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행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을 가져다가 축복하시고 찢은 후 사람들에게 돌려주셨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가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순종이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작더라도 예수께 드리면, 그는 그것을 넘치게 만드신다. 그는 그것을 축복하고, 그것을 깨뜨리시고 - 그렇다, 때때로 그것은 아픔을 준다 - 그리고 기적을 행하신다. 그것은 여전히 나를 흥분시킨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쉽게 만나를 내리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을 통해 그들을 목양하시기로 선택하셨다. 그것은 그가 나를 통해서도 다른 이들을 목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조차도 그의 모험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모험인가!

2016년 SWM 이사회에서 사역보고를 하는 팀과 사라 사역자

여기 말라티아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10년 동안 우리는 터키 동남부를 위해 기도했다. 10년 동안 우리는 추수를 위해 더 많은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풍성하게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이 땅에 많은 신실한 파트너들을 우리 곁에 보내주셨다. 특히 SWM과 쿠르트루쉬 교회와의 동역을 통해 많은 전도팀을 여러 미전도 지방으로 보낼 수 있었다. 특별히 지금, 이렇게 많은 외국인 사역자들이 터키에서 추방되는 상황에서 터키 현지인 사역자들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우리가 쫓겨난 곳에서 머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터키의 남동부를 축복하시는 데 사용하신 것은 우리 교회만이 아니었다. 10년 전 우리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 지역 전체에 교회가 두 개밖에 없었다. 당시 복음 관심자들은 예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교회를 찾기 위해 9시간 이상 운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아다나, 말라티아, 디야르바크르, 반에는 강력한 전도팀을 가진 교회들이 있고, 아드야만, 가지안텝, 툰젤리, 엘라즈으, 마르딘에는 새로운 교회가 있다. 이제 거의 모든 복음 관심자들은 그의 집에서 한두 시간 안에 교회를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예수의 증인이 없는 지방이 아니다. 이 모든 교회의 전도팀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터키 남동부의 지방을 위한 기도에 응답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비록 우리는 박해와 위협을 받았고, 동료들은 추방당했고, 창문이 부서지고, 성경책이 타버리는 일을 겪었지만, 사역은 계속된다. 지도를 보며 하나님께서 터키의 남동부에서 행하신 일을 기뻐하며 우리는 눈을 들어 터키의 북동부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12개의 비어있는 주들이 보인다. 12개 주에는 공개적인 예수의 증인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SWM과 쿠루트루쉬 동역자들, 그리고 터키에 있는 우리의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해 앞으로 10년 안에 이 12개 주마다 적어도 하나의 가시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더 많은 사역자가 보내지도록 기도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실 수 있는 주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바치고, 그가 우리를 부수고,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한다.

하나님, 주님의 빛이 없는 빈 땅을 봅니다.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주님, 우리를 기도로 도와줄 동역자들과, 어두움 가운데 들어갈 하나님이 선택하신 형제자매의 훈련을 도울 사역자들을 보내주소서. 당신의 이름을 빛내기까지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쏟아져 나와 잃어버린 자들에게 흐르게 하소서. 아멘!

기획 기사

에르도안 정부와 터키

김은현 SWM 간사

터키를 이슬람의 대표 국가라고 표현한다면 실제로 터키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터키라는 나라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슬람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라고는 하지만 시작부터 이슬람을 지우려 노력한 나라에 이슬람의 대표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터키는 터키 공화국 이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터키인들은 100년이 채 되지 않은 터키의 역사 이상으로 600년을 이어온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구 세계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이슬람 색채를 지워나가던 터키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이슬람의 색을 진하게 칠하고, 서구 세계를 향해있던 얼굴을 돌려 중동지역,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터키의 변화와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정부를 알면 현대 터키를 알 수 있다. 현대 터키가 어디에 와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일지 아는 것은 터키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21세기 술탄

술탄은 이슬람 종교적 권위자인 칼리프가 정치적 지배자에게 내린 칭호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술탄은 칼리프의 지위까지 겸하는 정교일치의 지도자라는 뜻으로 변했다. 오스만 왕조의 술탄제도는 1922년 케말 파샤 아타투르크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사라진 술탄은 21세기에 다시 등장했다. 바로 ‘21세기의 술탄’이라고 불리고 있는 터키의 대통령 레젭 타입 에르도안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터키의 총리를 지냈으며,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을 2017년 통과시켰다. 개헌된 터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중임할 수 있는데,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선거를 시행해서 당선되면 다시 5년을 재임할 수 있다. 2003년 총리에 취임한 이래 17년째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은 개헌으로 30년 장기 집권의 문을 열었다. 2033년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해진 에르도안은 오스만 왕조의 술탄에 비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 AP=연합뉴스

레젭 타입 에르도안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1954년 2월 2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노동자 계층 출신인 그는 이스탄불 이맘 하팁 고등학교와 마르마라 대학교 경제행정학부를 졸업했다. 이슬람 순니파인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에 적극적이었다. 에르도안은 대학 시절 이슬람교 기반의 정치인 네흐메틴 에르바칸을 만나게 되는데, 에르바칸은 이슬람주의자로서 처음 총리가 된 인물이다. 에르도안은 에르바칸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1970년대 이스탄불에서 정치에 입문했고, 공식 세속주의 사회인 터키에서 정치적 이슬람을 포용하며 정치 경력을 쌓아갔다. 1994년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의 의장을 역임하면서 이스탄불 민선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2001년에는 새로운 이슬람계 정당인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했다.

AKP는 터키의 2000~2001년 경제 위기 때 전통적으로 세속적인 정당들이 붕괴한 후, 2002년 11월 총선에서 터키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세속주의 정당 대부분이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상황에서 에르도안의 경건하고, 상대적으로 깨끗한 정치적 이미지는 그의 2002년 선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2003년 총선에 승리하며 제59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 이후 수많은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특히 집권 첫 10년 동안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 성과는 에르도안에게 충성스러운 보수적인 지지자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총리 취임 후 사회기반시설 건설과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국내총생산 (GDP) 성장률을 연 7%대로 향상시켰고, 경제적 성과에 힘입어 최초로 총리 3 연임에 성공하였다. 2014년 터키에서 처음 실시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며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16년 7월 군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곧바로 지지 세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대규모 숙청 작업을 하였다. 이후 2017년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터키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아우르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2018년 조기 선거를 통해 재임에 성공하며 두 번째 임기를 이어오고 있다.

에르도안의 인기 비결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그의 거친 언어나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의 옹호를 좋아한다 ⓒ AFP

에르도안은 가난하지만, 재능 많은 젊은이, 축구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교통국에서 근무할 때 콧수염을 자르라고 하자 아예 사표를 냈다는 일화는 그의 이슬람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여준다. 선거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이력을 가진 에르도안을 터키인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르도안의 정치적 삶은 마치 영웅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출신의 비범한 재능,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하는 영웅 서사의 기본을 닮았다. 에르도안은 1999년 이스탄불 시장 재임 중 이슬람을 찬양하는 시를 읊은 이유로 시장직에서 쫓겨나고 4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2001년 터키의 경제위기로 세속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높아졌고, 어지러운 정국 속에 에르도안은 AKP를 창당하며 총선에 승리함으로써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후 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이르는 최고의 권력 자리에 오르게 된다. 2016년의 쿠데타의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더 큰 힘을 거머쥐게 된다. 무엇보다 터키 국민이 에르도안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발전 때문이다. 에르도안의 총리 취임 이후, 마이너스였던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계속 증가하여 2010년에는 9.1%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와 교통체계, 의료체계도 강화되었다.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그의 거친 언어나 이슬람 가치의 옹호를 좋아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터키의 서민층은 에르도안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긴다고 한다. 이전의 세속정권의 정치가들이 지배 엘리트 출신이었던 반면, 노동자 계층이었던 에르도안은 서민층에게 심리적인 연대감을 주었다. 또한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에르도안의 AKP 정부가 세속주의 정부 아래에서 소외됐던 보수적인 무슬림들을 대변한다는 것도 인기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 터키에서는 종교와 세속주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AFP

에르도안 정부의 성격

1. 이슬람주의
아타투르크와 세속주의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 간의 영토 분쟁 와중에서 쇠퇴 과정을 밟아가며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하고 제국이 분해되는 굴욕적인 순간에, 무스타파 케말은 열강의 세력을 터키에서 몰아내고 1923년 터키 민족국가를 세웠다. 600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케말은 서구의 문명 세계를 따라잡기 위해 서구적 산업화를 추구하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 제국이 몰락한 이유를 낡은 이슬람 문화라고 생각하고 서구의 선진 문명을 배우는 것에 주력하였다. 케말은 서양처럼 이름에 성을 도입하였고, 터키 의회는 그에게 아타투르크(투르크의 아버지)라는 성을 헌정했다. 아타투르크의 1923년 터키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지배이념은 바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였다. 아타투르크는 헌법을 제정하고 세속화, 서구화, 민주화를 추구했다. 그는 터키의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하고 열강의 세력에서 독립적인 주권국가를 추구하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이에 따라 광범위한 서구화가 이루어졌으며 종교를 정치와 분리하려는 것과 함께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칼리프 제도를 없애고 남성의 터번, 여성의 히잡 착용을 금지했다. 이슬람법을 대신해 서구의 법 제도를 도입하고, 아랍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슬람 예배에 사용되는 언어도 아랍어 대신 터키어로 하도록 했다.

이러한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개혁은 군대와 엘리트층에서 지지를 얻었지만, 이슬람 신앙심이 강한 서민층과 지방 주민들에게는 저항을 받았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공화국 설립 이래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세속주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슬람의 교리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중 하층민들을 ‘교화’하려고 했지만, 터키를 탈 이슬람화하기에는 종교의 힘을 넘어서지 못했다.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아타투르크의 추종 세력인 군부는 ‘헌법의 수호자’로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거나 정부가 개혁주의를 벗어난다고 판단되면 개입해 이를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에 여러 이름으로 세워졌던 이슬람 정당은 군사 쿠데타나 헌법재판소의 판결 등으로 해산되기를 반복했다.

세속주의는 정치에서 종교를 분리하는 대의를 이루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세속주의 정당들의 경제적 무능, 군부의 잦은 쿠데타와 억압에 터키인들의 불만은 높아져 있었다. 그러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이슬람 민주주의’를 들고나온 정치인들이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일부 세속주의 비평가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부인 에미네(왼쪽)가 히잡을 두르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 REUTERS

아타투르크의 세속주의 터키는 1995년 총선에서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복지당의 승리에 기울기 시작했다. 군부의 압력에 복지당은 해산했지만, 에르도안은 2001년 정의개발당 (AKP)을 창당했다. 초기 AKP는 이슬람 정당이 아닌 ‘보수주의’ 정당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수적인 민주주의 정책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집권당이 된 이후에는 확실히 세속주의와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다. 에르도안은 세속주의의 대항마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슬람주의자들은 에르도안의 굳은 지지기반이다. 2016년 7월 세속주의 수호를 자처하는 군부의 쿠데타를 막은 에르도안은 세속주의 세력을 없애고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는 데 더욱 힘을 내고 있다.

에르도안과 이슬람주의

에르도안의 이슬람에 대한 헌신은 그의 경력 초기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7년 이스탄불 시장에 재임 중이던 그는 터키 동부 시르트에서 연설하며 이슬람을 전쟁에 비유한 시를 읊었다. 그는 이 시 낭송으로 터키의 세속적 정체성을 위반했다는 죄로 기소되었고, 종교적 증오를 선동한 혐의로 4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러나 AKP 창당 후 2002년 총선에서 압승한 뒤 법을 바꾸어 정치 제한에서 자유로워졌다. 에르도안 총리 집권 초기에는 반세속주의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2006년 후반부터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제르 대통령 임기 말부터 세속주의자들은 AKP의 압둘라 귤을 견제하려 했지만, 압둘라 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군부와 야당의 반대, 세속주의자들의 반정부 시위는 별다른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세속주의자들은 AKP를 해산하려고 시도했지만, 헌법재판관 1명 차이로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에르도안은 점차 정부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세속주의 세력은 약해져 갔다.

에르도안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적인 세속정부로부터의 억압에 대항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슬람주의 정책은 교육 부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에르도안은 신앙심이 깊은 젊은 세대를 양성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경건한 세대의 양성을 위해 이맘과 무에진을 주로 양성하는 공립 이맘 하팁(Imam Hatip) 학교를 증설하였고, 많은 공립학교를 이맘 학교로 전환하였다. 2013년에는 대학과 공공기관에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2014년부터는 기존 공립학교 규정에서 머리를 보여야 한다는 조문을 삭제하고 히잡 금지 조치를 완화하였다. 2017년 터키의 새 교과과정은 노골적인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데, 유치원에서 종교적 가치를 가르치도록 허용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종교를 필수로 가르치게 했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고, 이슬람 교육을 의무화했다. 교육부는 또 지하드 개념을 이슬람법과 기초 종교학 과목에 새로 넣었는데 애국심을 고취하는 차원이라고 발표했다.

에르도안 정부에서 공무원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국가종무국의 역할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최근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 강화에 상징적인 사건은 아야 소피아의 지위를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꾼 것이다. 아타투르크가 1934년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전환했던 것은 터키의 서구화와 세속주의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르도안 정부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 전환은 그의 이슬람주의 비전에 따라 세속적인 유산을 지워나가는 연장선에 있다. 또한 이 사건은 터키의 종교적 소수민족과 세속주의 무슬림들을 소외시키고, 에르도안의 이슬람 지지기반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뉴욕타임스》는 “터키의 이슬람주의자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라고 평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15년 1월 12일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환영식을 위해 오스만 제국의 전통 군복을 입은 군인들 사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 AFP/Getty Images
2. 신오스만주의

에르도안은 대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구현하여 터키를 다시 전통의 강자로 만들고자 한다. 아타투르크는 세속적 교육체계 아래 오스만 제국의 평가를 축소했지만,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을 세계를 호령했던 영광의 제국으로 보고 있다.

한때 동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다스리던 거대한 오스만 제국은 1900년대 산업혁명을 이룬 열강들에 밀려 쇠락했다. 아타투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유를 순수한 투르크족이 이슬람 문화에 더럽혀졌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내내 권력의 옆에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해 온 이슬람교를 축소하려 했다. 대신 투르크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이슬람 종교에서 벗어난 순수한 투르크족 국가에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은 터키인에게 자부심을 주는 위대한 제국이며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로서 터키가 오스만 제국의 직속 후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현대 아나톨리아 반도에 사는 터키 시민에게는 붕괴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의 외교정책은 다부토을루 전 총리가 이끌었는데 그는 ‘이웃 국가와의 갈등 제로(Zero Problems with Neighbor Countries)’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다부토을루는 중동 지역의 문제는 오스만 제국 영향권 안의 국가들이 문화유산을 고려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러한 변화를 오스만 제국의 후손이며, ‘투르크의 맏형’을 자처하는 터키가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는 이를 ‘신오스만주의’라고 부르고 있으며, 에르도안은 이슬람 세계의 리더가 되고자 한다.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의 이미지를 현대 터키에 가져오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2018년 8월 에르도안 대통령은 만지케르트 전투의 승리 947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2071년 당의 비전을 언급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는 비잔틴제국을 물리치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입성했으며, 오스만 제국이 시작되었다. 에르도안은 아나톨리아 반도가 투르크화되어 범이슬람 제국의 영광이 시작되었던 만지케르트를 강조하였다. 이는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는 그의 새로운 오스만주의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만지케르트 승리 1,000주년이 되는 2071년 비전을 언급하며, 경건한 세대를 키우고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강조하고 있다.

2016년 쿠데타 ⓒ AP
3. 권위주의

한때 이슬람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거론되던 에르도안 정부의 터키는 날이 갈수록 반민주적인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에르도안은 2002년부터 터키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그가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고 연이은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의개발당이 경제성장과 복지 확대의 성과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2017년 개헌으로 더 많은 권한을 갖게 된 에르도안은 ‘제왕적 대통령’, ‘21세기 술탄’, ‘터키의 히틀러’ 등으로 불리게 된다. 《가디언》에 따르면 에르도안은 2016년 1월 히틀러의 독일이 효과적인 대통령제의 예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에르도안을 독재적인 지도자라고 말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은 무참하게 제거된다는 것이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는 터키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경호원들은 미국에서 기자들을 괴롭혔고, 한 독일 풍자가가 TV에서 에르도안을 불쾌하게 한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구속된 기자들을 풀어달라" 2016년 실패한 쿠데타 이후 100명 이상의 기자들이 체포되었다 ⓒ AFP
언론탄압

주목할 만한 언론 검열 및 탄압은 2013년 반정부 시위 때 발생했다. 2013년 5월 에르도안의 부패 혐의와 이스탄불 공원을 쇼핑센터로 만들려는 계획은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주류 언론은 시위에 대해 보도를 하지 않았고, 시위 내용을 보도했던 친야 성향의 뉴스 채널인 Halk TV와 Kanal 등에는 고발과 벌금 부과가 이루어졌다. 에르도안은 2013년 시위 이후, 언론의 정치화를 더욱 강화했다. AKP의 집권 12년 동안 1,863명이 넘는 기자들이 반 정부적 시각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사들은 정부 기자회견 참석과 질문요청에 제한을 받았다.

에르도안 정부는 소셜미디어 검열과 통제에도 힘을 쏟고 있는데, 2014년 9월에는 정부가 법원의 명령 없이 웹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인터넷 통제를 강화했다. 2015년 2월 페이스북에서 에르도안을 비판한 13세 소년이 체포되었고, 2016년 에르도안에게 차를 대접하지 않은 웨이터가 체포되었다. 터키 형법은 대통령 모욕죄로 최대 징역 4년에 처할 수 있다. 대통령 모욕죄는 언론통제와 더불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남용되고 있다. 2014년과 2017년 사이에 거의 1만 3천 건의 대통령 모욕 사례가 접수되었다. 2020년에는 소셜미디어 규제법이 의회에 통과되어 소셜미디어에 대한 검열이 더욱 강화되었다.

터키 정부는 망명 중인 페툴라 귤렌이 실패한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cpimages (왼쪽) ⓒ reuters (오른쪽)
인권침해와 반테러법

언론탄압과 인권침해가 대놓고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반테러법’ 때문이다. 반테러법은 1991년 분리독립을 요구한 쿠르드족과의 분쟁 과정에서 제정된 법이다. 이는 테러 가담자의 처벌 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합을 해치는 목적을 가진 모든 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반테러법은 누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무분별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터키는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테러법과 대통령 모욕 혐의를 씌우고 있다. 에르도안을 ‘독재자’로 부른 야당 지도자는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했고, 트위터에서 에르도안을 모욕한 야당 의원은 징역형을 받았다. 에르도안의 포스터를 찢은 10대 소년들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EU(유럽연합)는 터키의 반테러법이 언론탄압과 인권침해를 일으킨다며 EU 가입 자격에 제동을 걸고 있다. 특히 귤렌 세력에 대한 에르도안의 ‘숙청’은 유럽연합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귤렌은 전 세계적인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히즈메트 운동은 터키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귤렌이 2013년 말 AKP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에르도안은 귤렌의 지지자들을 공직에서 제거하기 위해 여러 명의 사법 관료들을 제거하거나 재배치했다.

에르도안과 2023비전, 이스탄불에 걸린 2011년 총선 배너 ⓒ Myrat

에르도안에게 막강한 수준의 권력을 준 것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를 몰아내려던 2016년 7월에 발생한 쿠데타였다. 대통령 집권 2년 만에 에르도안은 쿠데타 돌풍을 마주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했고 에르도안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전국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귤렌과 그 지지자들을 테러 조직으로 낙인찍고 쿠데타 세력으로 몰았다. 현재까지 귤렌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는데, 15만 명 이상의 군인,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 교사들이 해직되었고, 5만 명 이상이 쿠데타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숙청과 탄압은 유럽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에게서 인권탄압과 비민주적인 조치라고 비난받았으나, 에르도안은 압도적인 의석수를 바탕으로 국가비상사태를 3개월 더 연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하인츠 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대표는 터키 쿠데타와 에르도안의 진압과정 이 히틀러의 ‘라이히슈타크 방화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며 비판했다. 히틀러는 화재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독일을 장악했었다.

터키는 2017년 개헌으로 의회 민주주의에서 대통령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헌법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유럽 국가들은 터키가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때 이슬람 민주주의의 성공한 모델이었던 터키는 언론탄압과 반대파 제거, 쿠르드족을 억압하는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적 통치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레젭 타입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18년 10월 앙카라 의회에서 연설한 뒤 집권 AKP 의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AP

에르도안 정부의 과제

초기의 에르도안이 개혁적이고 독실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다면, 현재로 올수록 에르도안은 독재자의 모습에 가깝다. 그의 장기집권 계획은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강화하고, 강해진 권력으로 다시 이슬람이 터키의 주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아타투르크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을 터키의 이슬람화는 에르도안의 독재 권력을 바탕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터키를 이슬람화하고 독재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정의개발당과 에르도안의 목표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3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터키 공화국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3년을 준비하고 있다. 2013년 에르도안 총리 재임 시절 발표한 비전 2023은 무역, 에너지, 의료, 운송 분야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 EU 가입과 쿠르드족 민병대를 해산하고 민족 화합을 이루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국가적 목표와 비전은 2023년을 거쳐 2053년과 2071년까지 상정되어 있다. 2053년은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정복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고, 2071년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을 상대로 승리한 지 1000년이 되는 해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가 과거 오스만 지역인 중동과 그 너머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이를 통해 위대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오늘날 에르도안 정부는 국내외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반으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게 된 2017년의 개헌 국민투표율은 85.32%이었고, 찬성이 51.41%, 반대가 48.59%였다. 높은 투표율은 격양된 터키 국민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르도안에 대한 지지와 반대가 반으로 갈리는 분열된 터키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AKP는 2019년 3월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승리했지만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이즈미르의 3대 도시에서 패배했다. AKP 대부분의 유권자 지지층은 주로 아나톨리아와 지방의 보수적 지역에 살고 있지만, 경제의 중심인 이스탄불은 AKP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터키의 경제 역시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급격한 상승, 실업률의 증가와 함께 터키 리라화는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 대한 국내적인 반대와 언론 탄압 외에도, 터키는 적대적인 세계에 직면해 있다. 터키는 시리아 내 반아사드 반군에 대한 지원으로 역사적으로 적국이었던 러시아, 이란과 정면충돌했다. 아랍의 봄 당시, 터키가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한 것으로 인해 이집트 및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동 군주들과의 유대관계는 타격을 입었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터키와 미국의 정책 차이로 미국과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하다. 시리아 전쟁으로 국제화된 쿠르드족 문제도 쉽지 않은 부분이다.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절반과 격렬하게 반대하는 절반이 있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게 만든다. 아타투르크가 군부의 세력으로 집권한 반면, 에르도안의 권력은 민주적 절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10일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다시 전환하는 법원의 결정 후, 사람들이 터키 국기를 걸치고 아야 소피아를 바라보고 있다 ⓒ REUTERS/Murad Sezer

터키의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젊은 세대를 뜻하는 말)는 사실상 에르도안의 집권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이다. 에르도안은 교육시스템에 보수적인 이슬람 가치를 넘치게 주입했고, 경건한 세대를 키워 이슬람화를 완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Z세대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경제는 무너져가는데 권위주의만 심화되는 터키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6월 대입 시험 하루 전날 있었던 에르도안 대통령의 라이브방송에는 수천 개의 비판 댓글이 달렸으며, 트위터에서는 #OyMoyYok (내 표를 얻지 못한다)는 해시태그가 번지기도 하였다. 당장 2023년 총선에서 유권자의 12%를 차지할 Z세대는 터키 미래의 중요한 방향키이다.

1923년 7월 24일,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은 신생 공화국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들과 스위스 로잔에서 조약을 맺고 독립국 지위와 영토 경계를 인정받았다. 지난 7월 24일, 이 로잔조약 체결 기념일에 다시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 이슬람 예배가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코로나19 이후 터키 더욱 심각해진 경제문제와 시리아와 리비아에서의 군사 작전에서 고전을 겪고 있는 에르도안 정부가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이미지를 회복해 지지층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꾼 결정이 터키인들이 세속적인 이슬람 국가로서 가졌던 ‘자긍심’을 앗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리나 멘도니 그리스 문화부 장관은 “에르도안은 터키를 6세기로 되돌렸다”라고 말했다.

오스만 제국의 옛 영광을 재현해 안으로 지지 기반을 강화하고 밖으로 강력한 주권과 이슬람 수호자의 이미지를 과시하려는 에르도안 정부의 전략은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까? 집권 후 꾸준히 세속주의의 반대길을 가고 있는 에르도안은 자신의 꿈을 수많은 터키인들과 공유하며 진정한 강국으로 갈 수 있을까? 이슬람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평가받던 터키의 이슬람 주의로의 회귀는 멈추지 못하는 흐름이 되었다. 제국의 사라짐을 경험한 기억이 있는 터키 국민들은 이슬람주의 정권이 과연 터키를 성장하게 만들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해야 할 것이다.

미션 프론티어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 우리는 가서 그 땅을 취할 것인가?

C. 앤더슨

‘위기 속에 당당하라.’
우리 모두 이와 같기를 원하지 않는가? 이 문장은 유명한 리더십 전문가인 마이클 하얏트가 얼마 전에 강연하였던 화상토론회의 주제문이었다. 사업가와 비영리 리더들을 향해 그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현실을 솔직하게 직시하는 것과 결국에는 당신이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이죠”라고 말했다.

이 세상은 몇 달 전과는 매우 다른 곳이 되었다. 국경들은 닫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격리되거나, 봉쇄 조치나 혹은 자택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자리는 없어졌고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몇 달 전에는 매일 뉴스에서 듣는 사망자 수에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사망자 수가 증가한다는 소식을 예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는 신명기 1장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보며 귀를 기울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기를 놓쳤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순종하지 못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받지 못하고 몇십 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야 했다.

전례 없는 기회의 때

세계적으로 퍼진 코비드 19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날을 앞당길 독특하고도 유례없는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많은 도전들과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배가시킬 엄청난 기회가 왔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지경을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히 신뢰하여 이 역사적 순간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슬프지만 가능한 대안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헛된 수고를 하며 광야를 떠돌 수도 있다.

위기는 새로운 사역으로 연결된다

우리 중 세계적인 유행병을 겪어본 이들은 거의 없다. 우리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먼저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거인과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었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일에 맞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 우리는 어려움과 역경을 마주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아왔다. 수년 전, 남편과 나는 네팔을 섬기고 있었다. 우리들은 산악 왕국과 그곳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역은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우리의 세 아이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네팔어도 꽤 잘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시작하였던 운동은 배가하고 있었다.

멋진 삶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예상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맞았다. 이민국에서 비자 처리가 갑자기 중단되었다. 네팔을 강제로 떠나게 되며 우리 가족은 불확실한 미래로 내던져졌다. 국경을 넘어 인도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애쓰면서 임시로 머물 곳을 찾았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휩쓸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혹은 적들이 우리의 사역을 중단시키려고 벌인 일인가?

그 투쟁의 시기에 쉬운 응답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다. 신뢰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엄청난 필요들을 보게 하셨고 전에는 참여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회들에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다.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네팔에서 계속 머물며 항상 하던 일을 했다면 보지 못했을 훨씬 더 많은 열매를 이곳에서 보게 되었다. 변화는 힘든 과정이었고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 변화로 인하여 우리 두 사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관점을 바꾸시고, 우리 눈을 열어 기회를 보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God)의 생각인가, 좋은 (Good) 생각인가?

신명기 1장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6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가서 약속한 땅을 취할 때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한 가지 제안을 가지고 나아온다. 그들은 정탐을 제안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전에 좀 더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3절에서 모세는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정탐’을 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낸 것은 좋은 생각인가, 혹은 하나님의 뜻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명의 정탐꾼이 그 땅에 들어간다. 그들은 돌아와서 그 땅은 좋은 땅이라고 보고한다. 그 점에서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들 중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선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다른 열 명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거인들과 수많은 난관들에 주목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안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셨던 것을 열둘 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26절에서 우리는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라는 비극적인 말을 보게 된다. 그들의 대다수의 의견은 두려움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거인들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를 보고 저항했고, 거역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다. 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다시,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40년간 광야를 떠돌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슬퍼하며 그 땅에 들어가려 애썼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하나님의 때를 놓쳐버린 것이다. 전쟁에 심히 패한 후, 그들의 길었던 40년간의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다. .코비드 19 상황을 맞이한 선교사, 목회자, 그리고 기독인 리더들인 우리들과 이 이야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우리들은 역사상 매우 독특한 시기에 놓여있다. 정말이다. 그러나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변하지 않았다. 지상대명령은 특정 시대에만 적용되는 명령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이 완성될 때에만 멈출 수 있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은 코비드 19 기간 동안 꽤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 임무는 달라지지 않았다.

팬데믹이 만든 기회들

1. 여분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봉쇄 조치 기간에 우리는 집에 머물러야 한다. 운동하러 가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는 활용 가능한 시간이 있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잃거나 그들이 일하던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여분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사역 운동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특별한 기도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위대한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열방 중에 일어날 새로운 운동을 위해 누구를 동원하여 함께 기도할 수 있을까?

2. 지금은 특이한 개방의 시기이다

나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총리가 코비드 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뉴스를읽었다. 나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질병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영향을 주고 있다.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바이러스는 최근 역사상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어려움과 위기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두려움, 굶주림, 절망, 그리고 질병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특이한 개방성을 만든다. 로렌 커닝햄은 YWAM의 부활절 설교에서 “복음을 향해 거대한 문이 열리는 시기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삶에서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삶이 불확실하다고 느낄 때, 우리들은 새로운 것을 고려하는 것에 마음이 열린다.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이러한 위기 속에서 복음의 연결 다리들을 찾을 때 영적인 대화들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3. 팬데믹은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증명할 엄청난 기회를 만든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가서 ‘평화의 사람’을 찾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들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실천할 놀라운 기회들을 얻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함을 분명히 나타내어, 잃어버린 자들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아오게 되기를 소망한다.

4.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공동체에 “굶주려”있다. 그들에게 이 공동체를 우리가 제공할 것인가? 이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틈으로 우리가 들어가 함께 참여할 것인가? 우리가 진실하고 진정한 공동체를 제공할 때, 가상이건 대면하는 공동체이건, 복음을 듣지 못했던 이들은 그 공동체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공동체와 교제로 초대하기에 이처럼 멋진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다.

5. 온라인 플랫폼의 이해와 활용의 큰 증가

제자삼기 훈련을 위해 Zume 강의나 내가 개설한 제자삼기운동 강의(dmmsfrontiermissions.com)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들이 생겨났다. 이는 복음 전도와 제자삼기에도 마찬가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줌, 팀즈, 구글 행아웃 등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하여 자택에서 근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노년 세대, 젊은 세대, 빈곤층, 부자들 모두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울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로 인해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있는, 접근이 제한된 국가들에서 모임을 시작할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났다. 소셜 미디어와 페이스북 광고들이 평화의 사람들을 찾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미디어투무브먼트 (Media2Movements) 사역은 이에 관한 훌륭한 훈련 과정을 만들어왔다.

미전도종족 가운데 제자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우리의 제한된 신념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다. 제자 운동들의 시작을 위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다섯 가지

1.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라

이 시기는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게 만든다.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와 기적을 믿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우리의 상황은 이것을 요구한다. 첨단 기술을 다뤄야 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당신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현장 중심의 사역자라면, 줌으로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올라야 할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배우고, 변화하고, 성장해야 한다.

2. 창조적으로 생각하라

이 시기에 거대한 적들과 맞서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혁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모델들과 방식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 시기에 제자들을 배가시키는 핵심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이전 방식만 고수하고 있는가? 항상 해오던 방식으로만 사역하고 있는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당신의 상상력이 하나님의 창조성과 연결되어 있는가? 전도하고 제자를 삼는 일에 있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들을 기꺼이 실험해 볼 의지가 있는가?

3.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보다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관점, 바로 하나님의 관점을 달라고 기도하라. 이전에 해오던 방식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반대로 당신이 이전에는 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가능해진 새로운 일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새로운 것을 향해 믿음으로 충만한 발걸음을 내디디라.

4. 위험을 감수하라

검증되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최근에 누군가와 왓츠앱 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 방식을 사용하여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까?”라고 그들이 물었다. “아직이요! 하지만 당신이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때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 믿음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5. 협력하여 일하라

이전과는 달리 이제 우리는 반드시 함께 협력해서 일해야만 한다. 영역주의와 교파주의는 제자운동을 시작하는 일에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다. 누구와 함께 일할 것인가? 그들의 장점과 당신의 장점을 합칠 것인가?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은사와 재물을 합할 때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때를 놓치지 말라!

로렌 커닝햄은 YWAM 부활절 설교에서 그의 사명을 전하며 “때를 놓치지 말라!”는 호소로 마무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놓쳤다.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일어나 그 땅으로 가야 한다. 이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영혼들의 큰 추수를 거두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반드시 길러져야 하며, 운동들은 시작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배가는 반드시 이 때에 이뤄질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우리는 불타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그 땅으로 나아가야 한다.

출처: https://www.missionfrontiers.org/issue/article/in-the-age-of-the-coronavirus-will-we-go-and-take-the-land

이슈 & 히스토리

아야소피아

이세웅 금향로 편집인

아야 소피아 (터키어) 또는 하기아 소피아로 알려진 소피아 교회는 터키에 방문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헬라어인 하기아 소피아는 영어로 ’Holy Wisdom’, 한국어로 ‘거룩한 지혜’라는 의미이다. 아야 소피아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는데, 2020년 우리는 아야 소피아 교회의 슬픈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현장을 바라본다. 아야 소피아는 AD 537년 부터 916년 동안 교회로, AD 1453년 부터 481년 동안에는 모스크로, AD 1934년 부터 86년 동안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AD 2020년 부터 다시 모스크로 바뀌었다.

2020년 7월 10일 터키 최고법원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하도록 판결하고 곧이어 에르도안 대통령은 행정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7월 24일 금요일, 이슬람 첫 공식 예배가 아야 소피아에서 열렸다. 소피아 박물관을 이슬람 모스크로 변경한 터키 정부의 결정에 대해 유네스코 (UNESCO)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소피아 박물관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유럽연합, 미국, 이집트, 그리스는 강도 높은 비난을 하였고 그리스 정교회 총주교 및 로마가톨릭 교황, 세계교회협의회는 깊은 우려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터키 정부는 국내적 사안이라며 외부인들의 참견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사실 2013년부터 이슬람 지도자들은 아야 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복원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으며, 현 터키 정부의 가정 큰 정치적 지지 세력인 이들의 요구를 결국은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터키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슬람화를 가속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아야 소피아 교회의 축조 그리고 역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신하들 ⓒ Roger Culos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재위 306~337년) 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건물이 완공된 것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시대인 36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최초 건물은 약 반세기 후, 반란에 의해 불타고 만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요한 크리소스톰이었는데, 그는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웅변가였다. 그는 소피아 교회에서 설교하며 당시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에우독시아의 부패와 사치, 부도덕한 성생활 및 잔인한 노예제도를 비난했다. 심지어 에우독시아 황후를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의 방탕한 왕비 이사벨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그는 체포되어 폰투스 (본도)로 추방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항의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두 번째 건물은 415년,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건물도 100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반란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그 이유는 ‘니카 반란’으로 알려진, 비잔틴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가 아니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비잔틴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가 아닌데다, 더욱이 천민 출신의 곡예사 테오도라를 왕비로 삼았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부패한 간신들이 들끓었다. 이를 이유로 당시 정치 세력인 청색당과 녹색당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시위와 폭동이 거의 모든 공공건물을 휩쓸었는데, 이때 아야 소피아도 불타고 말았다.
하지만, 반란은 진압되었고, 위기를 극복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피아 교회가 불탄 지 39일 만인 532년 2월 23일 “아담이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전무후무한 교회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황제는 트랄레스의 유명한 구조학자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수학자 이시도루스에게 이 역사적인 건축 사업을 맡기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황제가 직접 측량에 나서기도 했으며, 5년 동안 매일 100명의 기술자와 1만 명의 인부를 동원했다.

소피아 교회는 전형적인 로마풍의 건축 양식으로 537년 12월 26일,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제막되었다. 소피아 교회의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건물로 들어오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나님께 그와 같은 훌륭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감사했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솔로몬 왕이여! 내가 당신보다 더 훌륭한 성전을 지었소”라고 외쳤다고 한다. 20년 뒤 지진이 일어나 동쪽의 아치와 세미 돔, 거대한 돔이 손상되었고, 재건을 시작해 56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한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막식 행사를 주도했다. 소피아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지만, 현재의 건물 구조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그대로이다. 가히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라고 불릴 만하다.

537년 이후 지속된 소피아 교회는 1453년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 되었다. 아야 소피아의 건물 외부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네 개의 첨탑이 올라가 있는데, 이 첨탑들은 교회에서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면서 오스만 제국이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1922년에 멸망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 세속주의를 주장한 아타투르크 초대 대통령은 1934년 소피아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꾸게 된다. 따라서 소피아 건물은 916년 동안 기독교 교회로, 481년 동안 이슬람 모스크로, 86년 동안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외랑과 내랑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
돔에 그려진 천사의 모습 ⓒ 황제의 문 위에 있는 모자이크 Christophe Meneboeuf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처음 서게 되는 곳이 외랑이다. 외랑에서는 당시 세례를 받지 못했던 신자들이 서서 예배를 드렸다. 지금은 석관과 세례를 주었던 세례소, 그리고 벽에는 앞서 두 차례 지어졌던 건물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있다. 내랑으로 들어서면 아치형 천장이 번쩍거리는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것이 그대로 전해진다. 원래는 거대한 돔, 세미 돔, 이치형 천장, 복도 등 4에이커 (약 5천 평) 면적이 전부 황금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는데, 사람의 얼굴이 든 프레스코 그림이나 모자이크를 용납하지 않는 이슬람이 사람 모습이 있는 부분을 흰 도료와 횟가루 반죽으로 덮어 버렸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크고 작은 아홉 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그중에 가장 크고 가장 중앙에 있는 문으로는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황제의 문 위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숨겨져 있었으나 1033년에 발견되어 박물관이 된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886~912년 사이 레오 왕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레오 왕은 당시 교회법으로 금지하는 재혼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용서를 빌면서 세 번째 부인에게서는 자식 얻기를 구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수는 왕에게 복을 내리는 제스처로 오른손을 들고 있으며, 그의 왼손에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는데 그 책에는 그리스어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당

대리석 기둥들 ⓒ Mark Ahsmann
샹들리에 ⓒ Florian Wizorek

황제의 문을 지나 본당으로 들어서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방대한 규모와 조화로운 질서에 압도된다. 본당은 길이가 약 90m, 폭이 약 75m이며 본당과 내랑, 외랑을 합친 면적은 약 2,200평에 이른다. 거대하고 불규칙적으로 세워진 44개의 받침대로부터 4개의 아치가 서 있다. 동서의 직경이 31m, 남북의 직경이 32m이며, 15층 건물에 해당하는 56m 높이의 거대한 돔이 있다. 이 돔의 꼭대기에서부터 창문이 있는데, 40개의 서까래와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돼 중앙의 큰 돔을 띠 모양으로 두르고 있다. 창문은 실내를 밝게 해 주는 동시에 거대한 돔이 주는 중압감을 상쇄해 준다. 돔의 중앙 천장에는 아랍어로 된 꾸란 구절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비잔틴의 교회가 이슬람의 사원으로 개조된 후 19세기경에 쓰인 것이다. 돔의 네 귀퉁이에는 그룹(Cherub) 천사가 날개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데, 약 10세기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양쪽에 있는 녹색 기둥들은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밖의 기둥들 역시 여기저기의 신전 혹은 마르마라해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 건물을 지을 때, 각지에 흩어져 있는 좋은 대리석을 모아 오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기둥의 머리는코린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그 중앙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의 칭호인 ‘바실레우스’와 아우구스타’의 인장이 모노그램되어 있다. 또 인장 양쪽에는 마치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아칸서스 나뭇잎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코린트 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성 모자상 모자이크 ⓒ Florian Wizorek
미흐랍과 촛대 ⓒ Florian Wizorek
민바르 ⓒ Mikestravelguide

여덟 개의 기둥 위에는 직경 7.5m짜리 커다란 나무 원판에 초록색 바탕의 금색 글씨로 신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그리고 이슬람 초기 네 명의 후계자 (아부 바르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와 무함마드의 두 외손자 (후세인, 핫산)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 글씨는 중앙 돔의 꾸란 구절과 함께 당시 유명한 서예가인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가 썼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철로 만든 샹들리에는 오스만 제국 때의 것으로, 지금은 전구가 들어 있으나 처음에는 기름으로 등을 밝혔고, 이전에는 촛불을 사용하였다. 본당 정면은 오스만 제국의 솜씨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와 9세기경에 그려진 성모자상의 모자이크가 박공 머리에 있다. 어린 예수를 무릎에 앉힌 성모 마리아는 푸른 빛 옷을 입었다. 아치 아랫 부분에 거대한 천사장 미카엘이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크리스털 지구의를 들고 있다. 그의 거대한 날개는 초록, 흰색, 푸른색으로 그의 발까지 뻗치고 있다.

반대편에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있지만, 날개 부분만 겨우 보일뿐이다. 이곳은 제단 혹은 제대에 속하는 부분으로, 오스만 제국 때 몇 가지 시설물을 추가했다. 격자창으로 된 왼쪽 위 예배실은 풋사리가 왕을 위해 만든 것이고, 중앙 정면의 미흐랍은 메흐메트 2세 집권 당시에 만들었다. 미흐랍 양옆에 있는 두개의 촛대는 술탄 술레이만이 헝가리에서 가져와 이곳에 기증한 것이며, 미흐랍의 오른쪽에는 꾸란 낭송대가 있는데 16세기 경 술탄 무라드 3세 치하 때 세워졌다.

대리석 항아리 땀 흘리는
대리석 항아리

꾸란 낭송대 앞에는 금요 합동 기도회에 사용되는 설교대 민바르가 있다. 민바르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술탄의 문장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어 터키인들의 돌세공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민바르 앞 바닥에는 녹색, 붉은색 대리석 석판들이 ‘오푸스 알렉산드리움’이라 불리는 원형 무늬로 모자이크되어 있다. 이 무늬는 다른 중요한 건물이나 궁전에서 많이 눈에 띈다. 비잔틴 황제의 발이 닿는 바닥의 중앙 원을 ‘세계의 배꼽’이라 여겼는데, 비잔틴 황제가 하나님을 대리해서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본당 입구 양쪽에는 두 개의 커다란 대리석 항아리가 있다. 고대 도시 페르가뭄 (버가모)에서 발견된 것으로, 무라드 3세가 이곳에 옮겨와 예배 의식 전에 세정할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한 농부가 페르가뭄 왕국의 아크로폴리스 근처에서 밭을 갈다가 똑같은 모양의 항아리 세 개를 발견했다고 한다. 농부는 이를 지방 관리에게 알렸고 관리는 왕에 게 이 사실을 고했다. 왕은 그 가운데 두 개를 이스탄불로 가져오게 하고 나머지 하나는 농부에게 선물했다. 농부는 항아리를 선물 받은 것으로 알았으나 그 항아리는 금화로 가득 차 있었다. 농부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농부의 정직성에 감탄하여 항아리의 금화는 가져가고, 그 항아리가 발견된 지역의 농토를 농부에게 하사하였다.

아야 소피아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본당 북쪽에 위치한 ‘땀 흘리는 기둥’이다. 기둥 밑에는 항상 지하수가 흐르는데, 기둥 자체에 난 수많은 구멍이 물을 빨아들여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땀 흘리는 기둥’이라는 이름도 그런 기능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기둥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비잔틴의 황금시대를 일구어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어느 날 사원 안을 거닐다가 두통이 심해져 이 기둥에 머리를 댔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이 기둥을 찾아와 만지기 시작했고 정말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적의 기둥’으로도 불렸다. 사람들이 너무 만져 기둥이 부서지는 바람에 지금은 청동으로 아예 기둥을 둘러싸 버리고 구멍 하나만 남겨놓았다. 이 구멍을 통해서만 축축이 젖어 있는 대리석 기둥을 만져 볼 수 있다.

2층 갤러리

갤러리 올라가는 길 ⓒ Florian Wizorek
2층 갤러리 천장의 모자이크 ⓒ Serafita
2층 갤러리에 있는 황후의 자리

2층 갤러리는 내랑 북동쪽 끝에서 올라갈 수 있다. 갤러리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닌 편편한 언덕처럼 되어 있다. 바닥에는 큼지막한 돌들이 그대로 깔려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벽들은 비잔틴 시대 건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축조돼 있다. 2층이라고 하나 현대식 건물로는 5층 높이라 갤러리에 도착하기까지는 다소 힘들다. 하지만 당시 2층에서는 노약자와 여인들이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배려로 계단이 아닌 언덕처럼 오르막 길을 해 놓은 것이 특이하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교회의 거대함이 두 배로 늘어난다. 가운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 ‘세계의 배꼽’에서는 황제가 예배를 드리고, 위층 한가운데 초록색 원 안에서는 황후가 예배를 드렸다. 로마 황제들은 세계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이고 그중에서도 아야 소피아라고 생각했다.

갤러리 벽도 모두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마치 하나의 병풍이 펼쳐져 있는 듯하다. 커다란 대리석 돌덩이를 일정한 두께로 잘라 여러 개로 조각내 가져온 뒤 다시 벽에 차례로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로 첫 공사를 한 뒤 대리석을 덧붙여 놓은 것인데, 이런 공법을 건식법이라고 한다. 대리석은 어떤 물체와 오랜 기간 접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중간에 공간을 만들고 안으로 못을 사용하여 박았다. 그래야만 대리석이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천장은 모자이크로 되어 있고, 어느 부분은 회 칠한 뒤 채색되어 있다. 모자이크만 있는 곳은 뒤에 회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은 무언가 감추기 위해 회반죽으로 덮었다는 뜻이다. 회반죽으로 덮었다고 해서 꼭 성화나 인물화가 있었다고 단정 지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화를 떼어가 버린 흉한 모습을 덮은 곳도 많기 때문이다. 즉 오스만 제국이 이 성전을 취하기 이전부터 일부 기독교인들이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Serafita 데이시스 성화 모자이크

다시 왼쪽으로 돌아 이어지는 회랑 앞에 서면 ‘천국과 지옥의 문’을 만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많은 열매가 조각되어 있고, 지옥의 문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 천국과 지옥의 문을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뒤를 돌아보면, 벽면을 아름다운 성화가 가득 채우고 있다. 작은 돌조각이 모여 완성된 모자이크화로, 성화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 간구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홍조 띈 얼굴의 평화스러운 모습, 마리아의 수줍어하는 듯한 모습, 고뇌에 찬 세례 요한의 얼굴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 벽면에는 두 개의 벽화가 나란히 있다. 제일 왼쪽으로부터 조에 황후와 콘스탄티누스 9세의 모습이 보인다. 각각 황후와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것을 기리는 모자이크이다. 이 두 작품은 ‘성화 파괴 기간’ 이후에 완성돼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예술성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조에 황후 옆에 선 남편의 얼굴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 번이나 결혼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전 남편의 얼굴을 들어내고 새 남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 번째 남편은 무척 나이 들어 보이는데 황후의 얼굴은 여전히 꽃다운 나이의 얼굴이다.

갤러리 관람이 끝나고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문을 나서기 전에 거울에 비치는 모자이크 작품이 있다. 전사의 문 위에 있는데, 가운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 도시의 모형을 들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왼쪽에는 아야 소피아를 헌납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로마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온 장본인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야 소피아를 지어 봉헌한 자이다. 국가와 교회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며 이를 대행하는 자는 곧 황제임을 나타낸다. 즉, 동로마의 황제는 정치권과 종교적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조에 황후와 콘스탄티누스 9세
전사의 문 위 모자이크

성문을 나서면 철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2세기의 것으로 이곳을 장식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에서부터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니 크기가 맞지 않아 이제껏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지혜의 교회라 불리는 아야 소피아를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더해 여덟 번째 불가사의로 여기기도 한다. 당시 건축 기술로 그처럼 거대한 건물을 짓고, 또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는 것과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이에 필적한 만한 다른 건물이 없었다는 것이다.(이영희 『초대교회를 찾아서』, 홍성사, 2006)

건축물로서 또 역사적 종교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야 소피아의 앞으로의 시간이 평화의 이야기로 채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응답하라 2010

2010 에베소 특별 대담 돌아보기

정리: 금향로 편집부

진행자김승욱 목사 (현 할렐루야교회 목사)

토론 참가자고 손인식 목사 (베델교회 원로목사), 루이스 부시 박사 (트랜스폼월드 커넥션 대표),제카이 탄야 목사 (터키 개신교회 협의회 회장),김종필 목사 (파토스 파운데이션 대표)

손인식 목사님은 2020년 3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유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인터뷰는 지난 2010년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에서 진행되었던 특별 대담을 정리한 것입니다. 성경의 잃어버린 땅인 터키에서의 우리가 기도가 어떤 역할을 했고, 오늘 우리에게 다시 어떤 사명을 주는지 확인하고 도전하는 의미로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CTS 창사 15주년 특별 초대석으로 제작되었고, SWM 선교회 홈페이지에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 QR코드를 스캔하시면 해당 페이지로 바로 연결됩니다.

진행자

전 세계와 한국의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특별히 창사 15주년 특별기획 CTS 초대석으로 귀한 네 분을 모시고 이슬람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이 특별 대담의 진행을 맡은 김승욱 목사입니다.

특별히 이 자리는 2010년도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로 모인 자리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성도들 그리고 전 세계의 중보기도자들이 모였고, 또한 터키의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님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터키 땅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에 하나님의 특별한 부흥과 영적인 돌파가 있도록 기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슬람권을 향해 어떤 마음을 오늘날 갖고 계시며, 또한 우리가 이 마지막 프런티어로 부르심을 받아 이슬람권 선교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주님의 종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대담에 참여하실 분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트랜스폼월드 커넥션의 대표이자 세계선교 전문가인 루이스 부시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터키 개신교회 협의회 회장이신 제카이 탄야 목사님도 나와 주셨습니다. 제카이 목사님은 이번 2010 에베소 연합 중보기도회를 앞장서서 인도해주시고 축복해 주신, 정말 귀한 일을 해 주셨습니다. 또 베델 한인교회 담임 목사이시며, 특별히 이번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 대회장으로 섬겨 주신 손인식 목사님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13년간 필리핀에서 사역하시다가 현재는 보스턴에서 파토스 프로젝트를 이끄시며 미국에 새로운 부흥과 각성을 위해 섬기고 계신 김종필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네 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손인식 목사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이번에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어떤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역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손인식

연합중보기도회의 비전은 김진영 선교사님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인간이 시작한 생각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분명한 지시요 계시였다고 믿습니다. 김진영 선교사님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슬람권을 향한 새로운 접근과 선교적인 전략이 주변의 영적인 사람들 속에 파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전이 미국과 또 터키에 계신 선교사님들, 그리고 터키의 존경스러운 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까지 펴져 나가서 연합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회의 목적은 문자 그대로 연합의 의미가 가장 강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선교사님들이 각자 최선을 다해 달려오셨지만, 이제는 연합으로 같이 기도하면서 함께 나아가자고 하는 전진의 의미이고, 둘째는 성령의 마음을 읽어 드리고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한 덩어리로 움직일 중요한 때라고 하는 전략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진행자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연합하여 이슬람권의 특별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왜 특별히 터키에서 이 연합중보기도회가 진행되고 있는지 부시 박사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부시

터키는 이슬람 세계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민속 이슬람(Folk Islam)은 터키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이르며, 그 사이의 나라들이 투르크 문화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투르크창에서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로 지금까지 매우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990년에 추정되기로는 투르크창 전체에 2,000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헌신했지만, 지금은 매우 많은 수로 증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환상이나 복음 전파를 통해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투르크창에서 영적 돌파가 일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터키가 이슬람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진행자

이번에는 제카이 목사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2007년도에, 근대 터키에서 처음으로 순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순교 역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카이

2007년에 일어난 순교 사건은 우리 모두를 큰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물론 그동안 어려움들이 있었고 어떤 장애물들이 우리 앞에 있는지 이미 알고는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묶고 여러 차례 고문한 방식으로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것에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문이 열린 것 같고 마음의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영혼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순교한 형제와 가족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큰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회에 어려운 시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믿음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와 깊이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몇몇은 마음을 크게 다치기는 했지만, 성도들이 연합하며 믿음으로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는 결코 아무런 결실 없이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터키도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했다 혹은 그런 식으로 믿음을 나누지 말았어야 했다는 인식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이번에는 김종필 목사님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필리핀에서도 많은 무슬림 사역을 하시고 또 기도운동을 해오셨는데, 무슬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종필

제가 필리핀에서 직접적인 무슬림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슬림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필리핀에는 한 500만에서 600만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주변 무슬림 국가들을 다니면서 정말 영적으로 그곳에 있는 많은 어둠의 세력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무슬림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논리적으로 접근하거나, 기독교의 당위성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회복시켜 주시고 또 그들에게 복음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무슬림 전도에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인도네시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도네시아에 실제로 그러한 부흥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슬림 국가들을 다니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은 앞으로 기독교를 대체할 만한 엄청난 세력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이 이슬람이라는 것과 이슬람을 연구해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또 지금도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정말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슬람 연구에 귀한 대가들을 만나게 되어 이슬람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얻은 확신은 정말 온 세계 교회가 마지막 가장 어려운 무슬림 지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교회들에게 이슬람에 대해 알려드리고 또 함께 연합하여 기도하면 더 빨리 추수의 사역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감사합니다. 부시 박사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계시는데, 특별히 무슬림에 대해 우리 교회들이 알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부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슬람권 위에, 특별히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지기를 기도하고,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빛이 흘러나오기를 기도합시다. 무슬림 리더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가 인도네시아에 있었습니다. 남쪽 술라웨시 지역에 있는 포스라는 마을에 모코라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무슬림 리더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코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그 마을에 치유와 화평이 임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슬람은 많은 지역에 퍼져 있고 앞에서 언급하신 민속 이슬람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그룹들도 있지만, 우리가 온라인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본적인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슬람에는 움마 공동체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한 나라에 있고 무슬림으로서 움마의 일원이라면 그 나라는 소수집단 무슬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움마의 목표는 그 나라를 다수집단 무슬림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이미 다수집단 무슬림인 나라가 있다면 교육 기관 등으로 시작해서 사회 기관을 이슬람화하는 것이 다음 목표입니다. 이후 정부, 예술, 비즈니스 등 사회 전반으로 넓혀 이슬람화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더 급진적인 이슬람 사회로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다수 집단 무슬림이 이와 같은 상태로 발전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슬림 국가이며 이슬람은 헌법의 일부입니다. 이들은 ‘판차실라’라는 건국 이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헌법의 특성상 소수의 기독교인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로는 초자연적으로 일하십니다. 매우 극단적 무슬림의 성격을 가진 아체라는 지역이 한 예입니다. 이곳은 극단주의 이슬람을 실험해보던 지역입니다. 2004년 12월 25일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규모 기도 집회를 열었는데, 주제는 ‘예수님이 인도네시아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분이신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장 큰 재앙, 초대형 쓰나미가 24시간 이내에 일어났습니다. 그 진앙이 바로 아체였습니다. 그곳이 처음으로 열리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일할 수 있습니다. 무슬림 세계를 축복하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진행자

다시 제카이 목사님에게 질문하고 싶은데요,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특히 극단주의 이슬람이 많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를 보면서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주 적은 부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제카이

사실 저도 무슬림으로 자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터키의 분위기는 좀 더 세속적인 이슬람이고 서구적이지만, 대부분 무슬림들의 삶은 기독교인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자녀들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생계를 꾸려갑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곤 합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최근에 9.11 사건과 끔찍한 테러들이 이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혹은 무신론자이든 명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는 가장 강력한 힘이지만 잘못 사용하기 쉽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더욱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그저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족들과 자녀들을 위한 기회들을 찾으면서요. 물론 이슬람 극단주의로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진리에 눈이 가려져 있는데 이들은 더 많이 가려진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테러와 같은 고통을 가하게 되는 것이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폭탄테러를 보면 결국 고통당하는 이들은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무슬림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판단할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하게 퍼진 광범위한 두려움보다는 상황에 근거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다른 측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으로 90년대에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전 유고슬라비아였던 나라에서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터키와 많은 나라들의 언론 헤드라인은 ‘다시 십자군’이었습니다. 무슬림들의 마음에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겠습니까? 서로를 판단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이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진행자

계속해서 그 두려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열정,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이제는 무슬림들을 향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마음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가 많습니다. 손 목사님께서 이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 선교를 가로막고 있는 요소들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손인식

방금 제카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상 무슬림을 이해하는데, 일부 과격한 부분에서 오는 공포감이 기독교인, 또 한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오일 파워와 함께 무슬림 세계들이 점점 더 힘을 얻어 가면서 세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지난번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피랍되어 겪은 상황들이 아직도 가슴 속에 큰 공포와 상처들로 남아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서구 유럽 세계와 영국 그리고 미국까지도 무슬림 세계가 점점 확장되어서 아주 빠르게 유럽 사회를 덮어가고 있습니다. 또 한국에서도 무슬림 선교가 오히려 역류해서 거꾸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무슬림 파워에 대해 점점 더 가깝게 느끼게 되고, 이에 대한 경각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간의 하나의 속성과 죄성으로 보건데, 여전히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선교에 새로운 힘을 실을 수 있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까지 오셔서 사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의 선교를 배우고, 무슬림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우리가 되돌려드리는 영적 돌파를 통해 무슬림 세계를 향한 부정적인 시각을 고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감사합니다. 김종필 목사님, 무슬림들을 향해 우리가 더욱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종필

『기독교 백과(Encyclopedia of the Christianity)』에서는 현재 해외 선교사들의 숫자를 16만 5천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슬람권, 특별히 무슬림 국가에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은 그중 10%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90%가 비무슬림권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통계가 되겠지요. 우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그만큼 제약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서구 선교사들, 또 한국인 선교사들, 각 나라의 선교사들이 무슬림 국가에서 사역을 하고 있지만, 사역의 모습들을 조사해보면 85%가 현재는 구제 사역, NGO 사역, 교육 사역, 경로 사역 등과 같이 대부분이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봉사 차원의 사역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권에서의 전도가 샤리아로 인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고, 또 법적으로도 실제적인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기회의 제약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슬람권 선교를 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가 생각했을 때, 의외로 이슬람권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흥의 사례들을 보면 도리어 많은 통로가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NGO 사역이나 봉사 사역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길이 열려있다고 생각됩니다.

서구권 선교사들의 숫자만 본다면 이슬람권 사역자들의 65%는 자유주의 계통에서 온 분들이고, 30%가 복음주의 계통에서 온 분들입니다. 그만큼 서구권 사역자가 이슬람권 선교에 침투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가장 어려운 지역인 튀니지, 모로코, 베르베르족들, 알제리, 이런 나라들에서는 서구권 선교사들이 90년 동안 사역을 해왔지만,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단 한 개의 토착 교회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우선 튀니지만 하더라도 6만 명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베르베르족의 3분의 1 정도가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모로코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무슬림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모로코의 4개 마을, 4만 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어떤 경우는 집단 개종으로 온 마을이 다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부시 박사님도 말씀해 주셨지만, 이집트 같은 경우는 콥틱 내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고 콥틱 내에서의 부흥이 무슬림에게 직접 전도가 되어서 가장 큰 부흥이 실제 이집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제일 놀라운 것 중에 하나는 이란입니다. 호메이니로 시작한 근본주의 세력이 강력하게 이란 국가를 지배하게 되어 수많은 이란에 있는 시리아 기독교인들과 새롭게 생긴 개신교 교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교가 시작되었던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놀라운 추수가 이란에서 일어나서 아마 최소한 150만 명, 혹은 450만 명까지도 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나 놀라운 무슬림의 부흥. 이것은 제가 보기에 지구 역사를 진동할 만한 무슬림 역사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도 인도네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구상에 가장 큰 이슬람 국가가 인도네시아인데, 인도네시아에 일어난 부흥은 대한민국 인구를 능가할 만큼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슬람 세계에 선교하기가 어려운데 왜 어느 지역에서는 이런 놀라운 추수 사역이 가능했을까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슬람 세계가 닫힌 것 같지만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터넷이나 방송이나 또 아랍 진영의 아주 다양한 위성방송들이 외국인들에게 방영권을 주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 채널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이집트나 쿠웨이트 지역의 많은 회심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위성방송을 듣고 개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인터넷이나 공중파를 통해서도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둘째, 이란 같은 경우, 모르긴 해도 3분의 1 정도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돌아왔다고 생각됩니다.

셋째, 제카이 목사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호전적인 모습들, 십자군 전쟁의 아픔들, 또 기독교가 이슬람 국가들을 식민지배했던 굉장히 아픈 기억들이 무슬림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이나 제3세계, 라틴아메리칸 등에서 보이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호전적인 모습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주는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기독교의 이미지가 실제 이슬람의 한계를 느끼는 무슬림들로 하여금 기독교 진리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서 연락하는 무슬림들 중에는 기독교를 믿고 싶은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전도자가 없어서 누구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연구를 마쳤고, 기독교에 대한 진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들을 통해 우리 앞에 문이 닫혀 있어도 하나님의 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예, 김 목사님, 지금 세계의 이슬람 지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시고 있는 역사들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 어린 세대를 통해서 하실 일에 대해서 부시 박사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부시

4세에서 14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이 나이에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북한의 경우에도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정부의 교육을 받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제가 믿기로는 오늘날 가장 전략적으로 강력한 접근은 이 세대의 아이들을 구하고 (Rescuing), 다가가고(Reaching), 길러내는 (Raising) 것입니다. 4세에서 14세 아이들을 통하여 복음 전파가 가장 더딘 이 시대를 바꿀 황금기가 올 것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신앙을 가진 80%의 사람들이 4세에서 14세 사이에 회심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9세 이전에 세상을 보는 시각과 결정을 내리는 방식 등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린 세대의 비밀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아이들이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13세인 어린 예수님의 입을 통해 그의 적들을 침묵시키는 신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연한 어린 가지가 열방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 어린 세대에 의도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이다음 세대는 완전히 그들의 부모가 가진 전통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이슬람교이든 힌두교이든 기독교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세대는 인터넷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들을 양육하고 길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 기독인 세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린 세대들을 사용하셔서 예술, 비즈니스, 미디어, 정부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세계를 변화시킬 하나님의 대사로,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진행자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 사역들을 우리가 마음에 품으면서 특별히 우리가 에베소에서 연합중보기도회로 모이고 있는데요, 이 연합중보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과 또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을 조금 나눠주십시오.

제카이

먼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이벤트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길 기대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한 이벤트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거나 견고한 진을 향한 돌파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알려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 연합 중보기도회 같은 이벤트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영적 전쟁에 저희가 참여할 기회를 중보기도회가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영을 대적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영적 전쟁은 결국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과 사람, 그리고 여러 전략으로 준비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않으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많은 거짓에 속고 있습니다. 이슬람, 무신론, 유물론 (물질만능주의)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를 위해 기도를 모으는 것은 영적 관점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연합중보기도회가 가져온 또 다른 좋은 영향은 터키에 있는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여러분과 같이할 것입니다’ 등의 위로와 격려를 얻었습니다. 특별히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군대 전방에서 싸우는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큰 힘을 얻는데 마치 이와 같습니다.

한국분들처럼 터키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와서 기도회에 참석한 분들은 그동안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영적 상황을 마음속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도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변화를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시며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등등 여러 복합적인 생각들이 작용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합중보기도회의 열매는 이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드러날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하자면, 연합중보기도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문화와 인종을 넘어서 국경 없는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연합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좋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축구도, 경제도, 교육도, 정치는 더더욱 사람들을 연합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연합중보기도회에서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연합한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기적이었습니다.

손인식

저도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를 보면서 대회장으로 느낀 세 가지의 성과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 무슬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침묵하고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슬림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가장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일인데,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생각합니다. 지금 수많은 분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는 그 자체가 참 잘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먼저 느꼈습니다.

둘째, 연합하여 힘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힘을 얻게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항상 연합을 통해서 역사하시기에 여기 함께 모인 것이 잘 한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영적 돌파가 정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뤄지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셋째는 젊은 세대들이 함께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이전 세대가 모든 걸 주관하다가 그걸로 끝나면 그다음 세대는 없는 것인데, 이번에 젊은 세대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 사역에 주축이 되신 목사님들도 30, 40대 젊은 분들이시고, 참가자들도 젊은 세대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이슬람권 사역을 이끌어 나갈 다음 세대들이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번 대회를 보면서 마음 깊이 느꼈습니다. 산불의 예를 들어보면, 산불이 날 때는 항상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나는 게 아니고 어느 한 장소에 작은 불씨 하나가 던져졌을 때 온 산과 들판으로 번져 나간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의 일들로 성령의 불이 시작되었고, 그다음 퍼져 나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이번 대회를 통해서 강하게 느꼈습니다.

진행자

마지막으로 네 분께 자유롭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연합중보기도회를 통해서 새롭게 느끼신 점이 있으신가요?

부시

어젯밤 행사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인종의 참가자들이 한국어, 터키어, 영어로, 서로 다른 언어로 경배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이번 그룹에 대해 느낀 한가지 특성은 어떤 국적이든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이 표출되었지만, 특별히 예배가 드려지는 방식을 통하여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가 하나 됨을 느끼고, 유일하신 진리의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 헌신이 더 강해졌습니다.

김종필

역사적으로 터키는 성경에 나오는 배경입니다. 저희가 익히 들었던 것처럼, 창조의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렀던 장소, 안디옥 교회가 시작된 장소, 초대교회 모든 배경이 됐던 장소입니다. 신약성서 27권 중 17권이 터키를 배경으로 쓰였고, 11권이 터키에서 쓰여서 다른 곳으로 나갔다는 사실들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슬람이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 단절이 되고, 터키라는 나라를 눈여겨보지 않았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수많은 영국인과 서구인들이 터키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많은 한국인들이 터키를 사랑하고 터키에 몰려와서 기도하고 터키의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희생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을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터키는 우방 가운데서도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또 가장 많은 전사자를 냈던 혈맹의 국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지진과 또 월드컵과 또 순교자 사건을 통해서 심정적으로, 영적으로, 한국에 많은 기독교인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볼 때, 정말 터키에 대해서 우리가 거룩한 부담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전쟁을 통해서 빚을 졌다면, 이제 한국 교회가 이 터키를 향해서 영적인 빚을 갚으러 온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부시 목사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저희가 여기 와서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무엇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진 빚을 조금이나마 기도와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작은 불씨들이 일어나서 이 불씨들이 언젠가 큰불이 되었을때, 가장 큰 추수가 이 터키 땅에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카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조용한 한국 사람들을 가장 크고 강력하며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로 변화시키실 수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웃음) 정말입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하신것과 같이 사람들의 헌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영적 돌파를 이루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로 형제자매가 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서로 직접 대화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었는지 아마도 많은 정치가들도 알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손인식

저는 영적 리더들 뒤의 아내들의 섬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에베소 연합중보기도회를 위해서 주로 남성 리더들이 리더와 실무자로 뛰어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그 뒤에 있는 아내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적 리더들 뒤의 아내들의 섬김과 그들이 겪어야 하는 가정적인 뒷받침 또 함께 헌신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약해지신 여러 사역자 사모님들의 이야기를 여기 와서 들으면서, 정말 한 알의 밀알들이 있음으로 60배, 100배의 열매가 이번 대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구나 하는 마음속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희생과 그런 약함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의 강함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감동이었고, 우리 주의 종들이 아내를 잘 섬겨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대회를 마치고 실무를 이끌어오신 분들이 사모님들을 종일 업고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할 만큼 참 하나님께서 여인들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에 감동과 함께 회개를 느꼈습니다.

진행자

감사합니다. 손 목사님다운 마지막 멘트였습니다. 여러분, 이번 초대석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또한 새로 느끼신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터키와 무슬림들을 사랑해 주시고, 마음에 품어 주시고,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반드시 이곳에서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주인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바라면서 좀 더 확실한 정보와 확실한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할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그리고 함께 섬겨 주신 패널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케빈의 성경이야기

여정의 시작사울이었던 바울입니다

권강혁 사역자

'케빈의 이야기로 여는 성경'은 성경의 내용을 저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을 가까이 대하듯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상상하며 읽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다메섹 도상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밝고 빛나는 광채로 인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 대낮의 뜨거운 태양은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조차 힘들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방금 나타난 빛은 그냥 태양 빛이 아니라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빛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이 감기면서 얼마 전 예루살렘 공회에서 있었던 한 사건이 내 기억의 저편에서 소환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무덤에서 사라진 후에 부활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을 뒤덮었다. 예수의 제자라는 자들이 그의 부활을 목격했다며 거룩한 성전이 무너질 것이고 모세의 율법과 규례들이 고쳐질 것이라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 새로운 도에 가입시키는 중이었다. 그때에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공회 앞에서 궤사한 말로 예수라는 자를 증언하는 것을 듣고 무리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 후에 나는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다메섹의 여러 회당으로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광채도 광채였지만, 그 광채를 뚫고서 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 똑똑히 내 귀에 들리는데, 누구의 소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이 광채는 무엇이고 이 소리는 또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였다. 나는 그 음성에 답하여 ‘주여 누구시니이까?’ 물었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음성이 또 들렸으며 나는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배워왔던 모세의 율법서와 선지서,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시민으로 태어났던 나의 짧은 인생을 반추해 보았다.

다소 거리

내가 태어난 곳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라는 곳이다. 다소는 동방과 서방을 오가는 많은 배들이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곳으로 로마의 병사들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다. 도시의 북쪽을 바라보면 아주 멀리 동서를 가로지르는 타우루스산맥이 병풍처럼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기억이 허락하는 때부터 나는 천막을 만드는 재료인 동물의 가죽들이 가득 쌓여 있는 곳을 놀이터로 삼았고,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또 율법을 배우면서 유대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관해서 매일 들었으며, 우리 조상인 열두 지파가 모세의 인도 아래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또 기드온, 삼손, 입다, 사무엘, 다윗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리고, 바벨론 시대의 치욕적인 역사도 배웠고,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것도 들었다.

내가 사는 다소는 스토아학파의 중심도시여서 자연스럽게 헬라 문화와 수사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로마 군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집안일로 인해 로마법과 로마인들에 관해서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내가 경건한 유대인으로 자라기를 바랬던 아버지는 13살 성인식을 마친 후에 나를 모든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게 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사실 할아버지는 엄격하고 보다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에서 내가 수학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대중적인 힐렐 학파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나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율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스승인 랍비 가말리엘은 기록된 토라(모세오경)와 구전으로 내려오는 토라를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하여 가르쳐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두신 모든 것 – 역사, 자연, 문화, 사람 등등 – 에서 지혜와 명철을 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길리기아 관문바위

나는 토라에서 시작된 메시아에 대한 예시와 선지서 전체를 통틀어서 반복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믿고 우리 유대인을 구원하실 메시아에 관해서도 열심히 배웠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고 경건한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부끄러움에 없도록 살아온 사울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겪은 기이한 광채와 기이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내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언제 그를 박해했던가? 나는 단지 우리 조상의 유전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던 그 도당의 잘못된 믿음을 일깨워주려고 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메시아가 그렇게 나약한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루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 갔으며, 시편을 기억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쓴 글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깊이 묵상하였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Nasir, 나시르)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Netser, 네쩨르=나사렛)가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1)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그렇게 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아를 점점 깨달으면서 그제야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했던 나를 예수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이해되었다. 예수는 실로 우리 모두의 죄악으로 인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내 입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순간, 하늘이 열리면서 오래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로부터 예수의 십자가 죽음까지의 모든 성경의 계시가 내게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내가 당할 환난과 고난도 보았고,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큰 평강의 위로가 내게 임하였다. 환상 가운데, ‘사울아, 이곳 다메섹에 나를 따르는 경건한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있으니 그가 내일 네게 와서 네 눈을 뜨게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메섹- 직가

눈이 감긴 지 삼일째 되는 날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나니아라는 형제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아나니아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수하여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하니 내 눈의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앞이 보였다. 그 즉시 나는 형제 아나니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찾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막했다. 지난 30년 동안 내가 믿어왔던 믿음의 근간이 흔들린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인해 엘 샤다이, 아도나이의 여호와로 하나님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에, 어디서부터 우리 유대민족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다. 분명히 엄청난 방해와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준비가 필요했다. 먼저는 나와 함께 다메섹으로 왔으며 기이한 광채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동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언을 했고, 며칠 후부터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다메섹의 여러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듣는 사람들이 다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라면서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다. 나는 더욱 힘을 내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언했고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내가 배교했다며 나를 죽이기로 공모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스라

다메섹은 로마의 영토 하에 나바테 왕국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이 나바테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했는데, 곧 이혼하고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다. 이로 인해 유대와 나바테 왕국은 전쟁을 수년 동안 치르게 되었다. 이때 유대인이었던 내가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나바테 왕이 알게 되었고 나를 유대의 첩자로 오인한 당국자들이 나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 9:23)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 11:32-33)

여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벽을 내려간 나는 당분간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들과 만나지 않아야 할 것 같기에 일단 아라비아 광야로 내려갔다. 다메섹 남쪽으로 걸어서 나흘 거리에 있는 부스라 (Busra)는 대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고 주위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들도 많아서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부스라 주변에 있던 회당을 안식일마다 방문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사울로서 처음에는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거하니 점점 더 나를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당에 오는 것까지 금지하였다. 하지만 회당에 참석하는 이방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서 더 듣기를 원했다.

아라비아에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다메섹에서 보았던 환상과 들었던 예수님의 목소리를 상기하면서 그분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다시 한번 더 주님의 목소리 듣기를 기도했지만,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처음 주님을 만났던 다메섹으로 다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다메섹에 이르러 내게 세례를 베풀었던 아나니아를 다시 만나 서로 떡을 떼며 며칠 함께 지내면서 지난 3년 동안 아라비아의 삶을 나누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칠십 인을 세워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실 때 보내심을 받았던 아나니아는 내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직접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 주었다. 사실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대제사장들과 나의 옛 동료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니아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바나바도 꼭 만나보면 좋을 것이라며 나의 예루살렘행을 독려했다.

다소 - 바울 생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난 지 3년 만에 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이 세상 누구보다 확실히 믿는 사람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성전 주변에서 사도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는데 많은 믿는 사람들이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자칭하는 것은 술책에 지나지 않고 그들을 꾀어서 넘겨주려는 것이라며 의심하였다. 어떻게 사나운 이리가 갑자기 온순한 양으로 변할 수 있고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가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어 전도를 할 수 있냐며 믿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예전의 박해의 앞잡이였던 사울로 알고 두려워하여 나의 제자 됨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알려준 대로 예루살렘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가의 집을 찾아서 바나바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레위 지파 사람으로 구브레 사람인 바나바는 사촌인 마가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종종 오가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으며, 아나니아와 같이 칠십 인의 제자들 중 한 명으로 참으로 온유한 성품의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바나바도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하였으나 내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자며 집안으로 들여주었다.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깨닫도록 허락하신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한 성경의 비밀에 관해서 바나바와 나눔을 가졌다. 진심을 다한 나의 이야기를 바나바는 들어주었고, 또한 그의 이야기도 나에게 들려주었다. 함께 기도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랜 친구 같은 신뢰를 허락해 주셨다.

사실 스데반 집사의 박해 이후에 많은 사도들이 여러 지역으로 떠나고 남아있는 여러 제자들이 베드로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날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일로 인해 베드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다른 사도들도 지도자의 자리에 있기보다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세상 모든 민족이 천국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바나바가 중간에서 노력하여 앞장서서 나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적극적으로 중재하며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되었고, 공동체의 모임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예루살렘을 출입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를 변절자로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 나를 죽이려고 도모하였다. 믿음의 형제들이 이를 알고 헤롯이 아우스도투스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세운 해안 도시 가이샤라로 나를 데리고 내려가서 내 고향인 다소로 가는 배에 태워서 피신시켜 주었다.

다소-로마거리
다소-클레오파트라 문

몇 년 만에 고향에 왔는지… 벌써 가죽 냄새가 옛 향수를 자극하면서 집에 가까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 주었으나, 아버지와 형제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힐렐 학파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촉망받는 바리새인으로 성장한 아들로 인해 길리기아 지역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송과 부러움을 받던 집안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라는 자로 인해 아들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잘못된 소문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기고 아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나타났는데 예수라는 자가 죽은 후에 부활하였고 그가 그토록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라며 옛 동료였던 바리새인과 논쟁을 하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또 듣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 아들인 나 사울이 가족들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다. 성경을 알고 있던 분이기에 아브라함 때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해 오신 것이 바로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말씀드렸다. 하지만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만 되는 일이기에 나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이날 저녁에 어머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해 주셨고 그 음식에 담겨있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었지만,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 속사람은 한없이 울고 울었다.

집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와 형제들뿐만 아니라 함께 자랐던 친구들과 어릴 때 안식일마다 말씀을 들었던 회당장도 나를 찾아와 내가 다시 내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었던 옛날의 사울로 돌아오기를 설득하였다. 나는 다만 그들도 참된 진리에 눈이 뜨이기를 기도하였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림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마땅히 그 길을 택하는 것이 부름받은 자들의 도리임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 형제 곧 골육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면서 내 진심을 다하여 호소하였다. 하나님께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나를 부르셨음을 믿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을 때에도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나를 맡겼으며,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진리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달했다. 그렇게 몇 날을 여러 사람과 논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좋은 소식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비장한 표현으로 내가 다시 바리새인으로 산헤드린의 일원으로 예루살렘에 복귀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유산상속을 포기하고 집안과 절연을 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하셨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둘 중에 하나라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니 바라볼 곳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로 내 인생이 가야 할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만 나로 인해 부모님과 형제들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면서, 한편으로는 내 혈육들에게조차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참담함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고 집을 나서면서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은 자상하게 장막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옛 선진들의 이야기를 해 주시던 그 아버지의 눈빛이 아니었다. 집을 떠나면서 아라비아 광야로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아버지의 그 마지막 눈빛과 어머니의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으로 인해 잠시만 더 다소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다소는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장막 만드는 일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고 중계도시라는 특성으로 인해 세상의 소식을 쉽게 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소-바울기념교회

어느덧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 사건을 경험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로마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한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사도들은 더 멀리 땅끝이라 불리는 곳까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여기저기로 흩어져 갔다고 했다. 특별히 베드로가 주의 환상을 통해 고넬료의 대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가이사랴 지역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은 실제로 이방인 전도의 봇물을 튼 것이었다. 이렇게 이방인 전도에 물꼬가 트이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제자들이 다소에서 가까운 수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사이에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나는 다소의 한 지역에 터를 내렸고 일거리가 있을 때는 천막을 만들고, 일거리가 없을 때는 사람들과 만나서 복음에 관한 증거를 하고 있었지만 온 세상을 향한 사도들과 제자들의 활동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면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가 아직도 내게는 생생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다소에 있어야 하는지 무거운 마음이었다.

75세의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어 고난 중에 히브리 민족의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세를 훈련하신 하나님, 아둘람 동굴에서 다윗을 연단하신 하나님… 그렇게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를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준비되지 아니한 아브람을 불러서 준비시키신 것처럼 먼저 나를 부르셔서 내 속에 남아있는 배설물과도 같은 나의 옛 모습들을 닦아내게 하시고,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호흡이 있는 동안 구원을 이루어가는 평생의 훈련을 연습하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다소에서 내가 배웠던 가장 큰 교훈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사용하는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지, 세상 자체를 목적으로 세상에 끌려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느 4:17)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나 1:15)

우리는 한 손으로는 이 땅을 다스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야 한다. 더불어 부름받은 자들은 평지를 밟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을 바라보며 언제든지 떠남을 예비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유난히 바빴다. 이른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에 평소보다 많은 천막 주문으로 인해 재료를 준비하느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천막 만드는 일을 가끔 도와주는 생질이 일터로 나를 찾아왔다. 어떤 낯선 사람이 나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옛 동료들은 이미 나와는 소식을 끊었고, 외부에서 나를 찾으러 일부러 다소까지 올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질의 뒤를 따라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다. 멀리서 보이는 뒷모습,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요셉이라 불리는 바나바였다.

안나의 외침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강안나 사역자

주님만이 왕이십니다.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그 누구도 100% 옳을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분리, 나누어진 마음, 정죄, 비난, 고발...

아픕니다.
힘이 듭니다.
괴롭습니다.
성령님이 탄식합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만이 왕이 되게 하라!
예수만이 왕이 되게 하라! 예수만이 왕이 되게 하라!”

유일하게 선하시고 유일하게 옳으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왕이 되시며, 이 나라의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이 아닌, 주님 마음이 아닌
주님 생각이 아닌, 주님 뜻이 아닌 것들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거나 지배하지 않도록
그래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사상이나 이념들이
우리를 끌고 다니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나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보이시나요?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시나요?
땅에 속한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이 되어 사신 주님이 보이시나요?
가장 아름다우신 주님이 보이시나요?
오늘 우리가 무엇을 듣고 있나요?
바람과 폭풍이 아닌 우리 영 깊은 곳에서
속삭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나요?
로고스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교훈하시는 음성이 들리시나요?

수많은 정보와 뉴스
그리고 온라인으로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노출된 시대에
진심으로 주의 얼굴을 찾는 한 사람,
진심으로 주의 음성을 듣고자 주 앞에 나오는 한 사람,
진심으로 주의 마음 알아 함께 중보할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악한 것이라고 우리를 망하게 하고
선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게 아닙니다.
때론 선한 것이라도 우리를 망하게 하기도 하는데
많은 선한 것들이 선하신 주님보다
우선이 되고 먼저가 된다면
우리 인생은 망한 인생입니다.

유일하게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영원한 사랑의 본체이신
주님을 찾고 구하기보다
옳은 일에, 선한 것들에, 선한 이슈에,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
우리가 중독되어 산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망해가고 있는 인생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합니다.
서로가 자기만이 진실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상대방은 악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100%로 옳을 수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되시는 한 분,
나라의 경계와 존재 여부를 정하시는 한 분,
모든 것을 아시는 한 분,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한 분....
이 한 분만이 옳으신 분이십니다.

홀로 한 분이신 유일하게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며,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다시 오실
우리의 영원하고 아름다우신 왕,
이 한 분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비바람 몰아칠 때
우리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떠내려갈 것입니다.

오늘 지금 당장
주님 편에 서십시오.

주님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면
주님이 전적으로 기뻐하지 않는 편에 서 있다면
다시 한번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주님만이 옳으심을 고백하며 주님 편에 서십시오.

아니, 먼저는 들었고 들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와
매스컴의 소리를 향해 명령하여 잠잠케 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소리는 잠잠할지어다 너는 나에게
그 어떤 권위도 권세도 없음을 선포하노니 잠잠할지어다”

사람이 당신에게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매스컴이 당신에게 말하지 않게 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에게 말하게 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에게 가르쳐주시길 구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할지라도.
정말 우리가 따라가는 그것이.
사실이고 맞고 옳다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이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기준이어야 하며
주님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보고 느끼는지 물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도 이 일에 동의하나요?
주님! 당신도 이 일을 기뻐하시나요?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인가요?
주님! 당신이 이 일에 앞장서고 있나요?
주님! 이렇게 행하는 것이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인가요?
주님! 이것이 당신의 성품에 맞게 반응하는 건가요?
주님! 사람이 외치는 저 외침이 당신의 외침인가요?
주님! 당신이 이 땅에 주시기 원하는 메시지인가요?
주님! 당신의 백성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인가요?

주님 십자가 앞에 앉아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닌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음성만이 우리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외치라고 하실 때까지
우리는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것인가?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갈 것인가?

주님이 왕이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권리와 우리가 옳다고 하는
모든 주장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