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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기도제목

하나님의 나라가 온 열방과 모든 민족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는 기도
  • 2021년 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이 예수의 이름으로 온 열방과 모든 민족 가운데 임하시고, 주님의 은혜의 영광과 능력을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 2021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늘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모든 성도와 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게 하소서.
  •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며 방황하는 잃어버린 영혼들, 특별히 무슬림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결박에서 풀어지게 하시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 터키와 이슬람권의 땅과 백성들을 계속해서 흔드시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대면 복음전파가 가능하지 않지만 온라인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더욱 힘있게 전파되게 하소서.
  • 코로나 팬데믹이 속히 종결되게 하소서! 여러가지 염려와 걱정,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욱 기도에 힘쓰게 하시고, 안전한 백신이 속히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게 하소서.
터키와 중동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성도를 위한 기도
  • 터키와 중동의 모든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고, 특별히 터키의 81개 모든 주에 교회를 세워주소서!
  • 터키에서 우리와 동역하는 삼순의 오르한 목사, 앙카라의 이산 목사, 말라티아의 팀 사역자, 반의 바히트 목사, TeK회장 알리 목사와 제카이 목사, 아흐멧 목사, 움베르토 목사를 축복하소서! 계속 현지의 교회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동역이 계속되게 하소서!
  • 터키의 동역자 Partners in Turkey (김바나바, 권강혁, 길예평, 김선희, 김종훈, 안소냐, 안바울, 장부장, 조요한, 최권능, 탁요셉, 허강한, 홍갈렙, 팀스톤, 문KH, 김에녹, 윤성희, 임사라, 박HS, 선보아스, 조JH, 황DS) 사역자들의 가정과 사역들을 보호하시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 이집트의 동역자 Partners in Egypt (허드슨, 김젝키, 김요엘, 민SK, 김데이빗), 쿠르디스탄 동역자 Partners in Kurdistan (이밀카/하나), 아르메니아 동역자 Partners in Armenia (백승환), 그리스 동역자 Partners in Greece (박데이빗/레이첼) 사역자들의 가정과 사역을 축복하소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현재 50유닛의 교회 개척자 (CP)들을 위한 기도
  • 주님께서 친히 모든 CP들과 가족들을 늘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날마다 새 힘을 더하소서!
  • 코로나 사태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늘 먼저 구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실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사역들 위에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풍성한 열매들을 허락하소서!
  • 지난 1월 5일에 자동차 사고로 소천한 레다무사 목사와 네마 사모, 둘째 딸 조마나의 유가족 큰딸 나르덴과 사위 오사마, 특별히 아들 스티븐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평강이 임하며, 막내아들 조나단이 후유증이 없이 온전히 회복되게 하소서!
SWM 선교회 및 동역하는 교회와 개인을 위한 기도
  • 2021년 1월과 4월 사이 20개 교회의 특별집회 가운데 사용되는 영상 (5개의 영상)을 통해 이슬람권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불이 많은 지역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잘 전달되게 하소서.
  • 터키의 Foundation (VAKIF/바크프/재단)이 속히 정부에 등록되어 교회가 합법적으로 창조적이고 다양한 사역들을 더 많이 진행할 수 있게 하소서.
  • 지교회 자립을 위한 BAM사역을 통해 현지에 스몰 비지니스가 잘 정착되고 이 사역을 진행하는 KBP 이사들과 임원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소서.
  • 육신의 연약함 중에 있는 동역자들을 온전히 치유해주소서.
마지막 때 영적 대추수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기도
  •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속히 전파되게 하소서! (마 24:14)
  • 미전도종족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계속 더 강력하게 이어지게 하시고,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군대인 중보기도자를 세우셔서 영적 대추수가 더 강력하게 일어나게 하소서!
  • 투르크창 7민족 (위구르족,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터키) 가운데 속히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22개의 아랍연맹 국가들에게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 이스라엘의 평화와 회복 (시 122:6)이 이루어지며 이방인의 충만한 수 (롬 11:25)가 채워지게 하소서!
  • 미국과 한국을 긍휼히 여기시고, 세계 선교의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이 되게 하소서!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021. Spring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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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선교하시는 하나님

이세웅 금향로 편집인

선교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회복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끄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에 이번 봄호의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로 정했다. 선교에 필요한 수많은 조각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먼저 자신의 임재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신다. 중요한 선교전략이 필요하고 재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라고 해서 선교의 문이 열리고 교회가 개척되는 것이 아님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터키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권 선교의 문은 서기 622년 이후 약 1,400년 동안 열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알리는 선교보고와 간증들을 듣고 있다.

계간지 금향로는 짧지 않은 글들을 싣고 있다. 이슬람권 선교와 하나님 나라를 수축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 귀한 글을 준비하였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짤막한 내용이 아니기에 글을 읽는 것 자체가 도전이 될 수 있지만, 성경을 읽을 정도의 독서 근육과 묵상을 하시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즐기며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글들이기에 끝까지 정독해 주시리라 기대한다.

이번 호에 글을 실어주신 분들은 보안의 문제로 자신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현장의 증인들이다.
터키 동남부 교회들의 큰 형님인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 아흐멧 규베네르 터키 목사님은 자신의 간증과 더불어 교회가 전혀 없는 터키 동남부에 어떻게 교회가 개척될 수 있었는지 담대히 증언하고 있다.
터키 동남부 안디옥개신교회의 아지즈 형제는 시리아에서 사탄숭배자였는데 생명의 주님을 만나게 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담담히 나눈다. 현재 터키의 시리아교회 네트워크의 코디네이터로 수고하며, 시리아 청년들에게 꿈을 꾸게 하는 이레청소년학교에서 아내인 아말과 함께 섬기고 있다.

페르시아권역 사역자인 조셉탁 사역자는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이란과 터키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임재를 “새로운 선교를 이끌어 가시는 역설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풀어내고 있다. 여섯 가지 역설을 말하면서 기존의 선교전략이 아닌 하나님의 새로운 포도주가 부어지는 경험을 나눈다.

김밀알 사역자는 이란과 터키 사역을 통해 가정이 겪은 고통과 하나님의 인도를 나누고 있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영광이 있는 곳으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순종하며 온 여정을 나눈다. 그리고 빅드림스쿨과 아프간교회 개척을 하게 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나누며 연합하여 사역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하며 기뻐한다

임사라 사역자는 또래의 젊은이들과 후배들을 위해 귀한 글을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임재와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마지막 대추수가 일어나는 그 시작을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벅찬 마음을 “하나님의 임재, 부흥을 갈망하며”라는 글로 나눈다.

안디옥개신교회의 안바울 사역자는 “터키에서의 교회개척의 원리들”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터키에서 교회가 개척되고 있고 개척될 수 있는지 이스탄불 새소망교회의 예를 통해 나누고 있다. 이스탄불 새소망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던 잭발론 사역자는 터키에서 추방되어 현재 미국에서 터키와 중동 교회개척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터키 기도운동의 중심에 서서 지난 20년 동안 사역해 온 허강한, 강안나 사역자 가족의 이야기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는 터키의 영적전쟁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글이다. 영적전쟁을 찬양과 예배 그리고 기도로 이끌어가는 영적 전사 가정의 삶을 통해 앞으로의 영적전쟁을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중보기도자 김경희 권사님의 “하나님이 개입하신 복된 만남들”은 지난 70년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순종케 하셨는지를 자녀들을 위해 쓰신 글이다. 고인이 되신 남편의 신앙을 지금도 이어가시면서 중보기도자로 15년 동안 섬기고 계시는 귀한 권사님의 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2005년부터 SWM 선교회 본부사역을 시작한 이은옥 선교사는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 SWM 선교회 이야기”를 통해 터키와 이슬람권의 영적돌파와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자세히 나눈다. 기도하는 부르심을 따라 시작된 SWM 선교회가 어떻게 이슬람권에 교회개척사역을 하게 되었는지, 또 터키 아웃리치 사역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다.

영광의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열어 가실 때 먼저 자신을 나타내시고 선포된 복음에 대해 가난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영혼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신다. 우리들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비밀을 터키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권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발행인 칼럼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

김진영 선교사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선교 (Mission)이며,
선교적 삶 (Missional Life)이며,
선교사의 삶 (Missionary Life)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Presence)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며 성령의 임재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성령의 세례 혹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고전 12:1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성령이 임하시고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 (Indwelling), 혹은 성령의 표현, 능력 (Manifestation, Demonstration)으로 나타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그의 능력을 그리스도인에게 부어 주시고, 충만케 하여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하는 과정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그의 능력과 은사가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또,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인을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 전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충만한 능력과 은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그의 내주와 능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성령 세례로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확증입니다. 또한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 내적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표현, 능력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또한 그의 목적과 뜻에 따라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루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하는 복음 전파 사역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성령 임재와 세례가 임하기도 합니다. 그의 뜻을 따라 한순간 공동체에 임하는 특별한 역사를 통해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 온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해 나가도록 역사하십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기도할 때에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고 말씀하셔서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이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고, 세계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18세기 진젠도르프가 이끌었던 모라비안 공동체는 24시간 기도운동을 통해 강력한 성령의 역사 (임재,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이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확장되었고 자발적으로 팀을 이루어 온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200여 년간 계속되는 기도운동과 선교운동을 통해 전 세계로 3천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선교 (Mission)이며, 선교적 삶(Missional Life)이며, 선교사의 삶 (Missionary Life)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의 뜻을 이뤄 드리는 선교적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파트너 칼럼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 아흐멧 목사의 삶과 간증나의 삶, 나의 교회

아흐멧 목사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안으로 여러분께 인사합니다. 주님의 복이 언제나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제가 섬기는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를 어떻게 세워 가시는지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아흐멧 목사와 가족

이슬람을 가르쳐주세요

저는 1965년에 디야르바크르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독일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연말에 한 달의 휴가를 받아서 오시곤 했지만, 저는 8살까지 아버지 없이 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3년 독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마을에서 방앗간을 열었습니다. 그 시절 시골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도시나 시내에 나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방앗간은 24시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투르크멘 알레비였는데, 주변 마을의 대부분은 순니파 쿠르드족이었습니다. 알레비들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믿지만, 라마단 기간의 금식이나 하루 5번의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니 무슬림들은 알레비들을 진짜 무슬림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많은 면에서 정죄했습니다.

저는 13살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돕기 시작했습니다. 제 나이가 어려서인지는 몰라도, 저에게 오는 거의 모든 고객은 저에게 ‘너희들은 무슬림이라 말하면서 왜 금식하지 않느냐, 왜 기도하지 않느냐, 정결의식은 하고 있느냐’와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에 대답도 못했을뿐더러 알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위축되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같은 질문들을 계속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멀리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손님이었고 할 수 없이 그들의 일을 봐주어야 했습니다.

일 년이 다 될 무렵 저는 질문들에 대해 지쳤고,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내가 무슬림이면 이슬람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이제 이슬람의 의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들은 큰 열정으로 저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기도 핸드북’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 책에는 기도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 정결의식을 어떻게 행하고 어떤 기도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3개월 만에 모든 세부 사항을 배웠고, 어머니께 “저는 이제부터 이슬람의 모든 의무를 지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잘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제 기도 (이슬람식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강하게 반응하셨습니다. “너는 분명 무슬림이란다.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너에게 다른 것들을 가르치고 있구나. 그들의 종교는 틀렸고, 우리들의 종교가 옳단다. 그 사람들이 하는 예배의 어느 것도 꾸란에 없단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슬람을 사랑하게 되다

저는 알레비이면서 알레비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알레비에 관한 책들은 많지 않았지만, 저는 그 책들로 시작해서 차츰 이슬람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 순니 무슬림에 관한 책들을 보았습니다. 6년간 많은 책을 읽은 덕분에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제 주변의 95% 이상의 사람들은 꾸란이나 이슬람 관련 책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으로 인해 저는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것을 알고, 사람들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저는 정부 기관에서 운전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슬람을 사랑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 관련 이야기를 할 때, 저는 의도적으로 주제를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이 축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온통 종교였습니다. 저는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고, 이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꾸란은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직장 상사가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포장을 열어보니 꾸란이었고 저는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읽어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꾸란을 읽으며 배운 것들은 저를 심판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판사처럼 다른 이들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왜 기도를 하지 않으시고, 꾸란이 하라는 일들을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며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몇 년간 꾸란을 연구했습니다. 어느 날, 어려운 질문과 여러 문제들이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깊은 불행과 불안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알라를 찾을 수 없었고 무신론이 더 이성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신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알라를 믿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론자의 소원

1988년에 친구와 카페에서 신문을 읽다가 하나의 광고를 보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싶습니까?”라는 광고였습니다. 저는 신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한 것은 광고에 나온 주소였습니다. 주소는 미국이었고, 그 사실은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당시 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터키를 떠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독교인이라 말하고 미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소로 성경이 필요하다고 적어 보냈습니다.

11개월 후에 이스탄불에서 소포가 왔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에 있는 분들이 편지를 받아서 이스탄불에 있는 분들에게 저를 연결해 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는 제가 편지를 보낸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소포를 열자, 안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한 권은 “종교를 넘어서”라는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마태복음이었습니다. 저는 신이 없다고 확신했기에 마태복음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연락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30분 만에 책을 다 읽고, 책의 뒤에 있는 10개의 질문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책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였습니다. 저는 책을 대충 읽었기 때문에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누구지?’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책을 읽었을 때 예수가 구원자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10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몇 번 더 읽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책을 읽으며, 문제들에 대해 답을 했습니다. 이렇게 1년 동안 성경 통신 과정을 했습니다. 수업 자료 아래에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저는 1년이 다 되어갈 무렵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외국인 억양을 가진 누군가가 전화를 받자 저는 매우 흥분하였습니다. 저는 그 상황이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미국에 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남자에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고, 몇 가지 질문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또한 저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동쪽으로 갈 계획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가 언제인지 날짜를 물었습니다. 7월 15일이었습니다.

1989년 나를 방문한 형제 (오른쪽에서 두번째)

저는 매우 기대하며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고, 마지막 연락에서 외국인 형제와 7월 15일 12시에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12시에 디야르바크르 중심가의 도우카프 지역의 아타투르크 동상 옆에서 그를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7월과 8월의 디야르바크르는 일반적으로 42~44도까지 올라갑니다. 디야르바크르의 여름은 참을 수 없이 무덥습니다. 저는 이 외국인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면도를 하고,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맸습니다.

저는 손에는 제임스 본드 가방을 들고, 정장을 입은 한 사람이 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12시경 한 명의 외국인이 오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 사람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복장도 가방도 제가 예상했던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와서 저에게 ‘당신이 아흐멧입니까?’라고 물었었을 때,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저의 손님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마음을 숨긴 채 디야르바크르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라마단이었고, 저녁이 되어 그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시골 마을로 왔습니다.

그는 3일간 우리 집에 머물렀습니다. 첫째 날 그는 저에게 “제가 이곳에 왔으니 성경에서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모두 물어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미국밖에 없었기에, 미국에서의 운전기사의 월급이 얼마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운전기사의 월급이 얼마인지 말해주고, 저에게 성경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식탁에 있던 두 개의 물컵을 가지고 와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컵을 산이라고 비유하며 양옆에 놓았습니다. 두 산 사이에 커다란 낭떠러지가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두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필요하며, 이 다리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미국은 우주까지 간 굉장히 발전한 나라인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미국 사람일 수가 있지?’

그는 3일 동안 머무른 후에 다른 사람들을 방문하기 위해 저와 헤어졌습니다. 저는 1년 뒤에 그를 다시 초대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미국에서의 삶에 관해 물어보았고, 그는 저에게 성경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관심을 끈 것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매우 행복했고, 평화롭고, 매우 쾌활했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살고 있었고, 또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 또한 저 사람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는 행복하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 왔고,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가 버리고 온 곳으로 가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우 이상했습니다. 그는 제가 무엇이든 질문하면 대답해 주었고, 성경을 열고 저에게 진짜 삶에 관하여 설명했습니다.

행복은 미국에도 다른 나라에도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이 책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어떠한 질문을 하든지 그 책을 열어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저는 보물을 찾는 것처럼 이 책을 읽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진지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정말로, 주님이 말씀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로부터 4년후, 1991년 봄에 저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여정과 부르심

제가 믿기 시작했을 때 데르비시라는 형제가 디야르바크르에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바빴기 때문에 그에게 양육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에 한 선교사 가정이 디야르바크르에 정착했습니다. 저는 이스탄불의 형제들을 통해 그들을 소개받았습니다. 저는 디야르바크르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집은 그곳에서 60km나 떨어진 시골에 있었습니다. 제 일은 편안했고, 수입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집을 사기로 결정하고, 집을 산 후에 디야르바크르로 이사 가는 것 대신 세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저에게 “당신의 직장이 디야르바크르에 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로 이사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또한 매일 저녁 집에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아내와 상의한 후 디야르바크르로 이사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와 자주 만났고 몇 년 동안 신앙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이 기간에 또 다른 외국인 사역자들이 우리 도시로 이사를 왔고, 우리는 1994년부터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1995년 부르사에서 열린 가족 캠프에 참여했습니다. 이 캠프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찬양하는데 성령님께서 강한 방식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빨리 디야르바크르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이후에 친척들과 다른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제 친척 중에 믿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20~25명 정도 되었습니다.

어느 날 형제들이 저에게 와서 놀라운 제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서 사역하도록 당신을 부르십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교회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제안이 정말 두려웠고, 즉시 거절했습니다. 저는 정말 용기가 없었습니다. 또 확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주의 영이 저를 도와줄 것이고, 제가 이 길에 헌신하게 될 것을 말했습니다.

이 제의는 저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두렵게 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이에 대해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알았다고 대답했고, 또 저에게 정부에서 현재 얼마의 월급을 받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터키 리라로 대답하자, 그들은 달러로 환산하여 800달러 정도로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저에게 “그만큼의 돈을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200달러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는 이 돈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돈마저 거절하기를 원하시는군요.”

집으로 와서 아내와 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내 역시 2년 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셨다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집도 있고, 이 돈이면 충분합니다. 만약 충분하지 않다면,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부르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한 후에 직장에 가서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시간을 교회 사역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9년간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경찰이 우리를 국가를 위협하는 단체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모임 장소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의 우려를 없애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축의 비전

우리는 적은 돈을 모았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오래된 도시의 성벽에는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었고 우리는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를 떠날 때 맞은편에 있는 낡고 무너지려는 집을 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돈이 많지 않았고 약 3천 달러 정도만 있었습니다. 집을 파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가격을 물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터키 리라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가격을 달러로 환산하니 3천 달러였습니다. 우리는 매우 기뻐하며 그 집을 샀습니다.

116m2 의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큰 지출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재정이 없었기에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5년간 금식하고 기도하며, 이 장소에 새로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에 필요한 재정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다른 장애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터키에서는 오래된 교회를 복원하는 것과 새로운 모스크를 건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반면에 새로운 교회를 짓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디야르바크르 시장과 만났습니다. 시장은 매우 민주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디야르바크르에는 몇백 개의 모스크가 있습니다. 하나의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신은 만드세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주님께서 주신 응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계획서를 준비했고, 숨기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세 례터, 강단, 장의자 등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적어 넣었습니다. 그 상태 그대로 시장에게 가서 보여주었습니다. 시청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모든 상황을 아는 가운데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장소가 역사 보호구역이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 대해 다른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 및 자연보전 유산 위원회’는 시청의 허가를 보고, 실수로 이 계획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고난이 주는 축복

'교회 사건 유럽 집행위원회에 보내지다'의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

우리는 2001년 6월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공사 8개월 후에는 꽤 많이 진척되었습니다. 건물이 우뚝 솟자,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언론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들은 ‘해적 (무허가) 교회, 집이라 불리는 교회를 만들다’, ‘불법 교회’ 등의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이 뉴스는 매일 언론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은 검찰이 기소를 승인했고, 교회 건축을 중단시켰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6년 형으로 기소했습니다. 이 재판 절차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큰 복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놀라운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마치 이전의 사람은 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손으로 역사하심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과 위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 장소가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말했지만, 언론은 전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건물을 미국의 기지나 유럽의 놀이터처럼 근거 없는 말을 들어 명예를 훼손하였습니다.

2004년 10월 5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아흐멧 관련 기사
무허가 교회에 무죄'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를 열고 복음을 전한 아흐멧, 첫 번째 판결에서 무죄 선고를 받다

이 소식은 또한 외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외 언론은 이 사건을 불의하다고 표현했고, 우리의 희생에 대해 말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언론에서 이렇게 나오자 정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유럽 인권 위원회의 대표단과 대사들이 우리를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압력과 불공정한 법에 대응해 정부는 2003년 7월 19일에 헌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이전 법에서는 ‘필요에 따라 모스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법은 ‘필요에 따라 종교 시설을 만들 수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디야르바크르 동쪽의 작은 교회는 터키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요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루신 분은 분명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는 힘에서 온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

우리는 교회로서 터키에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섬김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섬김을 주님께 맡기고 오직 주님의 영광이 커지기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터키 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존중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교회들과 동일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교회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년간의 신의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의 태도를 변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마르딘에 있는 오래된 교회와 마르딘 지역의 미드야트에 있는 교회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마르딘에 있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는데, 매년 7만 5천 명에서 9만 명의 방문자가 다녀갑니다.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에서 파송한 한 가족이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가족이 혼자서 사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우리는 마르딘 교회에 한 가정을 더 파송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해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변 도시에서 사역할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수년간 학생들을 훈련시켜 왔습니다. 이 훈련은 8개월의 과정이며, 현재 9명의 학생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사역을 위해 마르딘뿐 아니라, 바트만, 시이르트, 쉬르낙, 샨르우르파, 빈괼 그리고 다른 주변 도시로 가고 있습니다.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는 주변 도시들 외에 반, 말라티아 그리고 메르신을 잇는 삼각 지대 안의 20개에 가까운 교회들을 돕고 있습니다.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는 모두가 함께하는 가족 캠프, 청소년 캠프. 어린이 캠프, 리더들을 위한 세미나 및 다양한 사역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수년간 우리나라로 온 난민들을 위한 사역도 계속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디야르바크르 개신교회를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파트너 칼럼

믿음으로 완성된 구원의 기적

아지즈 사역자

어두움에 갇혀있던 시간들

저는 시리아의 아랍 순니파 무슬림 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무슬림이었지만, 16세에 이슬람이 참된 천상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슬람을 따르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다른 종교를 찾기 시작했는데, 이슬람 종교와 완전히 다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였고, 사탄을 떠올렸습니다. 그 후로 저는 ‘사탄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사탄숭배에 빠져들었고, 계급도 올라갔습니다. 저는 시리아 알레포의 사탄숭배 집회소의 다섯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사탄숭배의 여정은 약 17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군 복무와 직장생활 등 제 삶의 여러 단계에서 악마는 제 동반자였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1년 반 동안 군 복무를 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에 저격수로 훈련을 받았는데, 뛰어난 실력으로 특등 저격수가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쳤을 때, 저는 정보부의 비밀 요원으로 일할 것을 제의받았습니다. 그것은 제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이며,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어 고민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정보국에 의해 살인 기계로 훈련받았고, 이 일과 관련된 도덕적 정당성은 사탄숭배가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회계사로서의 직업은 저의 신분을 완벽하게 위장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탄숭배 리더십의 한 명으로 집회소의 회계 관리를 하였습니다. 또 정부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고, 새로운 청소년을 돌보고, ‘사탄학’을 연구하고 확립하는 등 많은 임무를 맡았습니다.

탄탄한 ‘사탄학’을 확립하기 위해 저는 그 지역에서 실천되고 있는 거의 모든 종교를 연구했습니다. 이슬람교 외에도 유대교, 스칸디나비아 신화를 연구했고, 가나안족, 아람족, 앗시리아족 등 이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민족의 이교도 신들과 신화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이집트의 신들,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 고대 그리스 신화도 조사했습니다. 물론 안톤 라베이의 “사탄의 성서” 및 그의 후계자 피터 길모어의 “사탄의 경전”도 읽었습니다.

저는 아랍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나 인질을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슬람과 사탄숭배에서 온 기독교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5주에 한 번씩 ‘검은 안식일’을 인도했습니다. ‘검은 안식일’은 매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사이의 밤에 열리는 사탄숭배 의식으로, 루시퍼에게 예배를 드렸고 그를 숭배하기 위해 동물을 도살해 제사했습니다.

저는 루시퍼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났고, 영역 지도자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혜의 악마인 바포메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역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다시 한번 영역 지도자인 마르두크를 구했습니다. 얼마간의 영적인 훈련 끝에 저는 마르두크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마르두크 외에도 특정 요청에 대해 악마 및 악령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회성 계약과도 같습니다. 사탄숭배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과 서로 주고받는 어떤 관계라는 것을 저는 한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보 조브 (Abo Zob)’라는 이름을 가진 악마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성기를 가진 벌거벗은 강한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브’는 성기를 뜻하고, ‘아보’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거대한 성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악마는 당신이 원하는 어떤 여자라도 일정 금액을 받고 데려올 수 있습니다. 저는 사막에 가서 그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여인을 알려주고 그에게 비용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내 집에 문을 두드릴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었습니다.

약속된 날, 정해진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고, 문을 열었을 때 놀랍게도 내가 지명했던 여인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집안으로 들였지만, 그녀가 최면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그녀 자신의 의지로 나를 사랑해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를 돌려보냈습니다.

이틀 후 저는 아보 조브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른 바로 그 장소로 가서 그를 다시 소환했습니다. 그가 나타났을 때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여인은 최면에 걸렸다고!” 그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래에서 내 역할을 완전히 수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그녀를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녀가 깨어나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면 계약 조건이 달라지고, 그랬다면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놀랍게도 그는 옳았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강하지만 뒤틀려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그들 앞에서 패하게 됩니다. 악마는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듭니다.

시리아를 떠나다

2010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후 저는 가족과 함께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5년이 되어서야 시리아를 떠나 터키로 왔고, 안디옥에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탄숭배는 제가 시리아를 떠나게 만든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시리아 내전 당시 사탄숭배자이면서 저격수로 민병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저에게는 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소대가 있었고, 통치할 수 있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에는 정치, 시민 민병대, 경제, 권위 및 권력이 모두 합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민병대 지도자가 되면 마치 큰 마피아 가문의 지도자처럼 권력과 돈을 얻고, 영토에 대한 절대 권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물이나 빵집을 두고 싸우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마치 백만 달러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 한가운데 혼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르두크를 불러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것은 우리가 계약한 약속의 땅이 아니야!”
“이것이 바로 당신이 요청한 것입니다.” 마르두크는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저는 물었습니다.“당신이 지난 15년 동안 기도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대답했습니다.
“매일 밤 당신은 이 기도문을 말했습니다. 지옥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십시오. 당신의 왕국이 올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지옥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검은 안식일마다 당신이 부르지 않았습니까?
루시퍼 주여, 빛 뒤에서 일어나 이 땅을 고통으로 침략해 가십시오. 당신의 신자들은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논리는 강하지만 왜곡되어 있습니다.
잠시 후 나는 마르두크를 다시 불러내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아. 우리는 15년 동안 지옥을 소환해 왔으며 이제 우리는 지옥을 갖게 되었어.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만두겠어.”
“뭐라고?” 그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들은 대로야.” 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만두겠어. 당신들과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었지. 우리는 파트너이고 평등한 관계야. 내가 당신이 필요한 만큼 당신도 내가 필요하지. 거래에서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하고, 나는 내 일을 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이제 이 관계를 끝낼 거야.”

지옥의 굉음이 매우 시끄럽게 들렸지만 저는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함치지 마. 너는 나를 해치지 못해!”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사탄학을 위해 나에게 많은 것을 투자했고, 당신이 원했던 것은 이제 완성되었어. 자, 여기 세 개의 사본이 있어. 종이로 된 사본은 모두 태웠고, 다른 하나는 USB 메모리에 있지만, 완전히 파괴했어. 마지막 세 번째는 내 머릿속에 있어. 만약 나를 죽인다면 당신은 모두 잃게 되는 거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를 끝까지 따라가서 너를 다시 데려올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당신의 약점을 다 알고 있어. 나는 나와 내 가족을 당신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어.”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자리를 떠났고, 그것이 악령과 의 마지막 소통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큰 거짓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저는 모든 것을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보국을 떠나 아내와 함께 시리아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투입된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몰래 터키로 도망하였습니다.

믿음의 발견

저는 아내와 함께 동생이 있는 터키의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교회에 대해 들었습니다. 저는 도움을 받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탄숭배자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내가 돌아다니는 곳 어디든 내 머리가 있는 곳이 집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는 주일 예배 시간에만 문을 열었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사탄 의식의 80%가 기독교 예배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게 뒤집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사탄학을 연구하면서 사탄에 집중된 의식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물었습니다. “왜 이것이 기독교를 대상으로 맞춰져 있지?” 저는 신약을 읽기로 결심했고 아랍어 성경을 가져가서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는 세 가지 비슷한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가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고, 저런 일을 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 또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세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그의 제자였기 때문에 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만약 제가 사탄 숭배의 길을 계속 갔다면, 저도 그와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당시 일자리를 위해 이스켄데룬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안디옥 개신교회의 목사는 종종 나를 방문해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면서 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시리아 출신의 캐나다 목사도 저를 매주 방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에게 요한복음과 꾸란을 비교한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제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요한복음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전에 본 적이 없는 복음에 존재하는 견고한 논리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세상 것이 아닌 기이한 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약 성경을 계속 연구하고 싶은 동기가 생겼습니다.

저는 신약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했고, MP3 성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나의 회개를 받아준다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산을 두 조각 내달라거나 하늘에서 빛을 내려달라거나 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증거를 원했습니다. 저는 이 MP3를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나를 받아준다면 하나님이 다시 이것을 듣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2주간 그 MP3를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이 계속 말을 시키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저는 계속 참다가 어떻게 저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버려진 가방 안에 MP3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MP3 성경을 다시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요청한 증거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저에게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책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문에 사도행전이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메시지에 도달했을 때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의 메시지에 담긴 구체적이고 확고한 논리가 저를 열렬히 그리고 깊이 있게 읽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평생 추구했던 논리였습니다. 그것에 따라 나의 사탄학을 세우려고 했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삶의 논리와 이성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저의 직업 역시 논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회계사였습니다. 이러한 흥분은 제가 히브리서의 믿음 장에 도달했을 때 정점에 달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믿음을 정의하고 비이성적인 일을 한 똑똑한 사람들에 대한 예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논리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한순간 어리석은 일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옳고 타당했습니다. 이 공식에는 빠진 요소가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논리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논리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도움으로 저절로 구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디옥 개신교회의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깨달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저는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저는 정말 이해했습니다!”
“무엇을 이해했나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맞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줍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음 주에 그가 저를 찾아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이해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맞습니다. 드디어 당신이 믿음을 이해하게 되었군요. 믿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로고스, 그리스도 예수,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안디옥 개신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삶의 변화

그 이후로 저는 큰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무슬림이었고, 또 주님의 반대편에서 주님을 적대시하는 사탄숭배자였던 저에게 주님은 진리를 알고 깨닫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모든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그의 아들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저는 다른 잃어버린 자녀들도 복음을 듣고, 그들도 나와 같은 구원을 받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믿음을 갖기 전의 저보다 나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구원을 받을 기회가 있지만,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저는 두 가지의 책임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제가 살고 있는 이 새로운 땅, 터키 땅에 대한 책임입니다. 저는 터키를 위해 중보하고, 무너진 시리아처럼 사탄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둘째는 아랍의 많은 순니파 무슬림인 시리아인들을 향한 책임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안디옥 개신교회에서 4년 넘게 섬기면서 아랍어 예배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터키어와 아랍어의 두 예배가 있는데, 저는 안디옥에 있는 아랍 무슬림 시리아 난민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구원으로 이끄는 변화는 사고방식의 변화와 함께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 청소년 및 청년을 가르치는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레학교에서 젊은 세대에게 아랍어, 영어 및 컴퓨터 등의 교육을 통해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기독교 기반의 교육을 함으로써 그들이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믿음의 횃불을 들고 주님의 임재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난민 사역을 하는 아지즈 사역자(왼쪽)

안디옥은 많은 터키 시민이 아랍족이며, 일상 생활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독특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2020년에 우리는 터키 현지인 사역자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확장하였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지만 아직 터키에 그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2년 내에 터키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강렬한 사회적 분열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터키 사람들 안에 강화되어있는 이념적, 사회적 요새가 무너지면, 그 요새와 성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린 채로 남겨질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터키인과 관계를 만들고,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다가올 상황을 취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저는 또한 SWM 선교회와 함께 아랍 교회 개척자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직업을 통해 쌓아온 행정적, 언어적 능력을 주님께서 주신 한 므나로 여기고, 저의 형제들과 다른 아랍교회 개척자들을 도울 책임을 느낍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서, 주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종들과 그의 백성들을 섬길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모두 오직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의 보호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 아래 머물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파트너 칼럼

새로운 선교를 이끌어가시는 역설의 하나님

조셉탁 사역자

저는 20여 년간 페르시아권의 민족들인 타직인과 아프간인, 그리고 이란 민족을 위해 사역해왔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동안 사역하면서 경험한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위대한 계획과 역사를 여러분과 나누길 원합니다. 또한 페르시아권 민족의 대추수를 위해 하나님께서 완성해 가시는 모자이크 일부를 살펴보려 합니다.

ⓒ operationworld.org

20년 전, 2000년도의 새 밀레니엄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선교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페르시아권 선교의 개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제가 페르시아권 선교를 시작할 때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정권으로 인해 6년 동안 선교가 막혀 있었고, 이란은 겨우 한 가정의 선교사가 들어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타지키스탄에는 소수의 가정이 들어가 열악한 환경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페르시아권 국가 중에서 그나마 가장 열려 있던 타지키스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타지키스탄에 들어가기 수개월 전에 주님께서는 저희 부부에게 “너희는 타직 민족뿐 아니라, 아프간 민족에게도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지만, 저희는 말씀을 기억하고 타지키스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타직 민족을 통해서 페르시아권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 새로운 영향력이 흘러가기를 기대했습니다.

저는 타직 민족을 향한 사역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타직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타직 선교를 열어주셨습니다. 저희 사역의 과정은 하나님의 역설적인 인도하심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선교를 통해 타직 선교가 열리다

2001년 8월 말 우리 가족이 타지키스탄에 도착한 지 2주 후에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아프간의 용병 수장이었던 오사마 빈라덴이 미국 항공기를 피랍하여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강타하면서 미국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사건이었습니다. 3개월 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면서 탈레반은 퇴각하였고, 그로 인해서 6년간 이슬람 공포정치로 끌어온 탈레반 정권은 한순간에 붕괴하였습니다. 이후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백 개의 국제 NGO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의 문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선교의 문이 급격하게 열리는 것을 보고서 주님이 저희에게 주셨던 말씀, 곧 “너희가 타직 민족뿐 아니라 아프간 민족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라는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을 한번 방문하고 리서치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타지키스탄에서는 아프간으로 가는 항공편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동료 사역자의 도움으로 함께 화물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6년간의 탈레반 공포정치로 인해서 어떤 외국인도 방문해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저에게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지키스탄에 있는 아프간 난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저희에게 카불에 있는 지인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이름과 소개서를 들고 아프간 카불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소개받은 지인이 카불 도시의 수도사령부 군사령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타지키스탄에 있는 자기 친구의 소개로 온 사람이라며 극진한 대우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또 전쟁 여파로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어서 계급이 대령인 한 분을 저희 10일간의 여행의 안내자로 섬기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안내를 받아 방문하는 모든 도시에서 저희가 머문 곳은 각 도시의 군사령관 막사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도시의 정보를 가장 잘 아는 사령관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여러 상황을 듣고 정보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각 도시의 아프간 군대 장군들과의 만남은 타지키스탄과 함께 아프간 축복의 통로로 저희를 세우신 주의 빛나는 약속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전쟁이 종식된 직후의 위험한 시기였으나 순종하며 여행한 그 시간이 얼마나 멋진 경험이었는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타지키스탄으로 돌아와서 페르시아계 민족인 타직과 아프간을 연계하는 사역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후에 미국의 국제 NGO 대표인 한국 사역자께서 타지키스탄을 방문하셨고, 아프간 북부에 고아원을 세우기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께 아프간 리서치를 통해서 만들었던 내용과 전략을 나누었습니다. 그분도 제가 프레젠테이션한 내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의 독특한 성 (last name)에 관심을 가지고 가족관계에 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도 저와 같이 희귀성인 ‘탁’ 씨였기 때문입니다. 족보를 찾아가며 나누는 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거의 30년간 만나지 못했던 저희 사촌 형님이셨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에 한국에 돌아오지 않아 저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 아프간 선교가 열리는 시기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촌 형님을 선교사의 신분으로 만나게 되다니! 소름 정도가 아닌,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분은 아프간 선교의 시작을 위해서 확실한 동역자를 만나게 하시면 아프간 선교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시작하겠다고 서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은 “내 아우가 여기서 고생하고 있으니 타지키스탄에 국제 NGO 지부를 열도록 돕고, 지원해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계획하는 아프간 고아원 사역을 시작하도록 도와달라고 하셨고, 그곳에도 국제 NGO 아프간 지부를 열었습니다.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는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양국의 국제 NGO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페르시아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공식적인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간 선교 리서치 여행으로 인해 타지키스탄에 국제 NGO를 열게 되면서 사역의 베이스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타지키스탄에 있었지만, 본격적인 타직 선교 사역이 아프간을 통해 시작되는 역설적인 결과였고, 놀라운 도전이었습니다.

아프간 민족에게도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주님께서 미국과 아프간 탈레반과의 전쟁 속에서 놀랍게도 저희가 아프간 선교로 진입할 수 있는 베이스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타지키스탄에도 국제 NGO 지부를 열면서 장기 비자를 얻게 되었고 타직 민족 선교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 타지키스탄에서 타직 민족 선교를 하면서 3개월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며 고아원 사역 및 아프간 선교를 위해 힘쓸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역자들도 이곳으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란을 제외한 페르시아계의 대표 민족인 타직과 아프간을 섬길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갖고 사역하며 페르시아 민족을 향한 꿈과 비전을 더욱 품게 되었습니다.

난민수용국 1위 터키의 국적별 난민수 2019.06.17 ⓒ Anadolu agency

무슬림 난민의 발생과 난민선교가 오히려 페르시아권 선교의 불을 지피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선교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07년에 일어난 분당샘물교회 선교팀의 피랍사건으로 인해서 100여 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안전을 위해 강제 출국 되었고, 한국 정부는 한국인들의 아프가니스탄 입국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프간 선교는 닫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을 전후로 예측하지 못한 많은 난민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이란의 난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란의 이슬람 신권정치로 인해 생긴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어려움으로 소망을 잃은 많은 이란인이 터키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이슬람권에서 기독교가 가장 부흥한 민족, 복음을 수호하고자 싸워온 전사의 민족인 이란인들의 이동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어서 수십만 명의 아프간 난민들이 터키로 이주하게 되고, 전쟁으로 인한 고통으로 2백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들과 수십만 명의 이라크 아랍 난민들이 터키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최근 10년간 한국인들이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전쟁으로 아예 선교 진입이 어려운 시리아의 난민들이 우리가 자유로이 만날 수 있는 터키로 대거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출애굽과 비견할 만한 일입니다. 이것은 무슬림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새로운 파도요, 새로운 엑소더스 (Exodus)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문을 여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바로 난민선교입니다. 이란 민족과 아프간 민족이 난민으로 터키에 오면서 수년간 멈춘 아프간 선교의 불을 지필 기회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이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난민이 되어서야 생겨난 복음의 기회들

예전에 제가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본토에서 현지인들을 만나 사역했을 때에는 한 영혼을 얻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나라의 이슬람 공동체와 이슬람 시스템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난민이 되어 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것은 그 두려움의 묶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난민이 되어 접한 복음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란 신자들의 경우, 이란에 있을 때는 정부의 기독교 박해로 신앙생활이 어렵고 자기 생존에만 급급했는데, 터키에 난민으로 와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프간인들은 두려움 속에 기독교를 멀리했으나 터키에 오자마자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주는 기독교인들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프간 난민들은 복음에 반응할 기회가 생겼고, 이란 난민들은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무슬림 난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시는 하나님

터키로 몰려드는 난민들 ⓒ AP photo/Ronald Zak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터키 내 난민선교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300년 전, 종교적 핍박을 피해서 독일로 간 개신교 모라비안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난민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275년간 멈춰 있던 개신교의 세계 선교가 강력하게 시작되도록 모라비안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1400년간 묶여 있었던 이슬람권 선교를 난민선교를 통해 풀기 원하고, 특히 제2의 모라비안으로 터키로 들어온 이란 난민들을 쓰기 원한다. 그들을 선교 자원으로 양성하여 터키의 450만 난민들을 향한 추수의 자원으로 사용하라”는 도전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 안에는 여러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난민으로 들어온 이란인 신자들이 자기 생존도 어려운데 선교의 짐을 질 수가 있을까? 자기 신앙을 지키기도 어려울 텐데 아프간인들을 섬기고 교회를 개척하는 헌신이 가능할까? 시아파 무슬림인 이란인들이 적대적인 순니파 무슬림인 아프간인들과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게 적합할까? 이란인들은 아프간인들을 무시하고, 아프간인들은 이란인들에게서 받은 상처와 적대감이 있는데 가능할까?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한계와 벽들이 있음에도, 선교 훈련을 받은 이란인 신자들이 타민족 선교를 배우고 특히 터키에 난민으로 들어온 아프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되면서 이들이 아프간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이해하고 깊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간 선교에 헌신한 이란인 신자들이 아프간 난민들을 사랑하게 되고 섬기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생각했던 한계들이 하나하나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간인들도 자기들을 섬기는 이란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란인들도 동일한 난민 신분으로 섬기게 하심으로 그들을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이란인들은 아프간인들과 같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따로 언어와 문화적으로 특별히 준비할 게 없습니다. 같은 난민으로서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선교사가 된 이란인들은 정말 헌신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마치 300년 전의 모라비안들을 이 시대에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슬람권에서는 신자들을 찾기 힘들고 교회는 더더욱 찾기 힘듭니다. 현지인 지도자도 찾기 힘든데, 현지인 선교사를 세운다니?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극히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와 같은 외국인이 아닌,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무슬림 회심자들(MBB: Muslim Background Believers)을 이미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이란인 신자들입니다.

저는 페르시아권 사역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님께서 가장 적합한 민족들을 준비시키시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페르시아권에서 무슬림 선교를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적합한 민족은 이란 신자들이었고, 적합한 방법은 바로 현지인들 즉 무슬림 회심자 및 헌신자들 (MBB)이 주체가 되는 선교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이미 생명을 걸었기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헌신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무슬림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무슬림 배경의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그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생활의 어려움에도 난민 사역을 할 수 있는 힘

난민 사역, 빔카드 전달

저희 가정은 타지키스탄에서 사역할 때에도 쉽지는 않았지만, 터키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재정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겪었습니다. 자녀들도 성장하면서 교육비도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 가운데 저는 “내 가족의 생존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난민들을 섬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주님께서 터키의 난민선교와 현지인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는 선교를 위해서 저희를 부르신 것을 확신했지만, 1년 반 정도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앞서 나누었던 타지키스탄에서의 기적 같은 역사를 다시 이곳 터키에서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9/11 사태와 그로 인해 급격하게 열린 아프간 선교, 그리고 아프간 리서치 여행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30년 만에 만난 사촌 형님과 그로 인해 타직과 아프간에 국제 NGO를 세우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던 그 기적의 역사를 이곳 터키에서 시작하는 사역에도 다시 한번 재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생존조차 쉽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는 “내가 모라비안들을 도운 진젠도르프 백작과 같은 교회와 협력자들을 이끌어 주겠다! 그리고 너에게는 진젠도르프와 같은 영적 권위와 기름부음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격려와 약속이 저희를 인내하며 버티게한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1년 반 동안 기도해오던 중,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어느 기업의 회장님이 저희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터키의 난민선교와 현지인 선교사 양성 전략에 감동받으시고 이 사역을 펼치도록 적지 않은 헌금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만남과 협력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됩니다. 주님께는 가능합니다. 이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고 현지인 사역자 양성을 위해서 과감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타지키스탄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경험한 전율이 다시 이 터키에서도 제 온 맘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을 공급 받은 것도 감사하고 중요하지만, 주께서 저희를 터키에 부르신 부르심에 큰 확신과 자신감을 주셨다는 것이 정말 컸습니다. 그 감동과 전율의 시간이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고 이것이 저희의 힘입니다. 이때의 경험이 저에게는 모세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고 기적이었습니다. 300년 전에 난민인 모라비안들을 도왔던 진젠도르프 백작처럼, 지금은 저희에게 제2의 진젠도르프들이 연결되어 난민 사역을 진행하고 많은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RZM 선교회와 연결된 한국 교회들, 그리고 SWM 선교회와 연결된 미주 난민 사역, 빔카드 전달 교회들 모두가 저희의 진젠도르프들입니다.

코비드 사태를 통한 역설적 비전

2020년 3월부터 시작되어 확장되고 있는 COVID-19 사태는 전 세계의 정치, 종교, 경제 모두를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까지 문을 닫게 했습니다. 현재 교회의 선교 활동도 많은 부분에서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모든 위기의 시대에 주님의 역사는 반전에 반전으로 나타나며, 또한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COVID-19 시대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임하게 하는 King’s Highway #19, 즉 왕의 대로를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방향성은 다시 한번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역설적 비전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바뀐 지금의 비대면 시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모든 혜택을 저희에게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터키에서 난민 사역을 위해 각 도시를 방문하려면 5~7시간씩 차를 운전해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8개 도시 사역자들을 온라인을 통해서 한순간에 만날 수 있고, 깊은 나눔과 전략을 세우고 중보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이나 미국의 교회에서는 후원하는 터키의 현지인 선교사들을 영상으로 초대하여 각 교회에서 간증을 듣고 기도제목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터키 현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선교 현장의 역동성을 끌어올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교육과 훈련을 온라인으로 하게 되어 재정과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이후, 대면적인 활동이 줄어든 대신에 비대면적 사역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저희 안에 더 많은 교회개척과 열매가 생겼고 속도도 더욱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각 교회에서 난민들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공감하고 보내온 헌금으로 현지 사역자들 뿐 아니라 각 교회의 성도들과 전도 대상자들까지 도움을 주게 되었고, 복음이 더욱 전파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부대

저희는 역설적 도전과 결과를 꿈꿉니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가 진행되는 기간에 오히려 최대한의 열매를 맺고 대추수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승부수를 던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2021년도는 가장 바쁜 해가 될 것입니다. 이 COVID-19 시대에 왕의 19번 대로를 놓아주시는 하나님의 길을 창의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대추수를 향한 길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19)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부대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역설의 하나님! 반전에 반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희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파트너 칼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영광이 있는 곳으로

김밀알 사역자

첫 사역지, 이란

저는 IT 기업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 개척과 함께 비즈니스 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키르키즈스탄에 비즈니스 선교사로 가려고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 때문에 키르키즈스탄으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다시 사역지를 놓고 아내와 작정 기도하던 중 이란에서 사역하고 있던 허드슨 선생이 저희에게 이란 여행 책자를 보내왔습니다. 그 첫 페이지에 이란으로 오라는 짧은 인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여기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교본부장으로부터 이란에 대한 권유를 받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의 선교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2004년에 아내와 2살 된 큰 아들과 함께 이란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첫 사역지였던 이란에서의 8년은 많은 경험을 하고 훈련받는 시간이었습니다. 1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첫 사역지로 이란에 가게 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저는 사역지를 옮겨 8년 동안 터키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SWM 선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아프간 난민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란에 있는 8년 반 동안 MVP 팀 안에서 팀 사역을 하였고, 약 4년 동안은 지역 디렉터로 섬겼습니다. 작은 가정 교회를 잠시 시작해 보기도 하고 몇몇 제자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비자 문제, 공해 문제, 보안 문제 그리고 문화충격 등의 수많은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아내는 특히 더 어려운 시간을 겪었습니다. 이란이라는 나라는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나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자동차부품 회사와 수산물 무역 회사의 이란 담당을 했고, 개인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사역적인 부분의 시간은 부족했지만, 현지 직원 그리고 현지 바이어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이란 문화를 배우고 사회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터키에서 이란 사역자들과 단체를 만들고 협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때 그들의 문화를 깊이 배우고 그들의 장점과 이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서로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이 동역의 기초인 것 같습니다.

급작스러운 이란 부흥의 배경

저는 먼저 이란에서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기독교인들이 많아졌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란 선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흐름을 아는 것이 터키에서의 아프간 사역의 방향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도 이전까지 이란 무슬림 출신의 신자는 수백 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약 10만 명의 앗시리아인 또는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이란에 있었는데, 현재 이들의 숫자는 국외 망명으로 수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도 이후 이란에서 무슬림 배경의 회심한 신자들은 수십 만 명에서 백만 명 이상이라고 전문기관에서 보고되고 있습니다. 죠슈아프로 젝트에서는 이란의 연간 기독교 성장률을 19.6%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는 놀랍습니다.

약 20년 만에 이란에서 선교적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작용했습니다.

첫째, 이슬람 정부에 대한 실망입니다.

호메이니를 시작으로 한 이란 이슬람 정권의 실정과 부패로 인해 사람들이 이슬람에 환멸을 느끼고, 이슬람이라는 사회적·종교적 이념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가 억지로 그들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둘째, 광범위한 복음 전파가 있었습니다.

이란도 다른 이슬람 국가처럼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고,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해도 신고를 당하면 이슬람법에 걸려서 감옥을 가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란 사람들의 안방까지 복음을 실어 날랐던 것이 바로 위성방송입니다. 이란의 공영방송은 이슬람 종교를 찬양하고 홍보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런 공중파 방송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성 수신 장비를 구매하여 페르시아어로 된 다양한 오락 채널을 즐겨 봅니다. 이것이 이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 중의 하나였습니다. 위성방송 중 모합바트 (번역하면 사랑) TV가 24시간 복음 방송을 이란에 송출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설교 후 진행자가 이란에서 직접 걸려온 전화를 연결해서 실시간으로 상담을 하거나 기도를 해주기도 합니다. 이때 치유가 일어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이 그대로 전파를 타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수많은 이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셋째, 전 세계적인 기도 운동이 있었습니다.

“Prayer Iran 30”이라는 책자가 만들어져서 기도 단체와 중보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기도책은 매일 한 장씩 이란 관련 기도제목을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기도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중보기도의 힘으로 이란인들은 꿈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를 경험하고, 마약에서 자유케 되고, 사람들이 변화되는 회복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넷째, 이란 디아스포라 신자들의 활발한 사역입니다.

어쩌면 이란 선교의 주체는 외국인이 아닌 이란 디아스포라 신자들입니다. 특별히 미국에 있는 이란 교회나 신자들이 위성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송출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출판 및 신학교 사역을 하던 엘람 (Elam)이라는 단체가 성경 보급과 제자 훈련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단체의 설립자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이란인 목사입니다. 현재 터키에만 엘람 소속의 지교회가 40~50개가 있습니다. 터키의 이란 사역의 절반을 이 단체에서 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사역으로 들어오기까지…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터키의 아프간/파키스탄 난민들 ⓒ OrlokShutterstock

저는 8년 전 터키로 사역지를 옮겨서 앙카라 이란 교회를 섬기는 외국인 사역 팀에서 2년 동안 협력했습니다. 이후에 한국인 동역자와 함께 RZM을 공동으로 세우고 약 3년 정도 협력하여 사역했습니다. 주로 이란 사역자들을 훈련하여 아프간인들을 섬기도록 세우는 사역이었습니다. 터키에 들어온 아프간 난민은 약 30만 명으로, 3만 명 정도의 이란 난민 숫자보다 10배나 많지만, 이들을 섬기는 사역자나 관심자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아프간 교회 수는 이란 교회 수의 5%도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점점 그들을 섬기는 방향으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를 아프간 사역자로 다시 부르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터키에서 이란 사역에 집중하고 있을 때 저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데니즐리에 있는 이란 교회를 지원하고 협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년 만에 교인 수가 100명 이상이나 늘었습니다. 53명에게 집단 침례를 주는 큰 행사가 있었고, 저는 침례식의 집례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역하러 다니던 한 도시에 아프간 성도가 몇 명 있었고, 그 중에 모세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복동생을 전도하였고 그 역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알리라는 이복 동생이 자신이 사는 터키 동부의 도시에서 많은 괴롭힘과 고초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내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조롱하였습니다. 알리는 여러 번 저에게 전화해서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집단 침례식이 있던 전날 밤에 또 한 번 그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는 침례 준비에 너무 바빠서 이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세로부터 한 통의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복동생 알리가 새벽에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고 목숨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걸었던 전화가 마지막 전화였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저는 자책감과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빅드림스쿨 수업 모습

그리고 주님의 여러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특히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서 기뻐하는 목자의 이야기와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삯꾼 목자였습니다. 이미 구원받아 침례 예식을 하는 영적으로 안전한 성도들을 위해서는 시간과 관심을 가졌지만, 지푸라기도 잡으려고 했던 죽어가는 잃어버린 양에게는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회개하고 선교사직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양을 책임지지 않고 그들의 목숨이 빼앗기는 것을 방치할 것인가? 그래서 마음의 사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책과 슬픔에 갇힌 저를 다시 불러 주셨습니다. 저를 다시 양을 치는 선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처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을 다시 일깨워 주시고 저를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들을 섬기는 목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프간 양 떼를 저와 같이 섬기던 선한 목자 한 분이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가신 일도 있었습니다. 2018년에 앙카라에서 저와 같이 아프간 사람들을 위한 영어교실을 섬기셨던 고 박정숙 권사님입니다. 이분은 앙카라 한글학교 교장으로 터키에 오셨습니다. 당시는 빅드림스쿨을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크륵칼레 도시에서 가정 방문을 하면서 영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방학이 되어 잠시 쉬던 중에 박 권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한국이었다면 응급처치와 수술을 통해서 회생의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3일 만에 한마디 말씀도 없이 주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몇 년 후 이분의 희생 위에 빅드림스쿨이 시작되었고, 지금 500명 이상의 난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사건을 통해 저희 부부는 아프간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함께 하는 조력자로 더 깊이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부부에게 아프간 사람들을 직접 제자 훈련하고 이들을 통해 아프간 민족 복음화를 이루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몇 년 동안 직접적인 교회 개척을 하면서 난민의 삶의 질을 끌어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려운 과정이긴 했지만 세웠던 이란 제자들을 남겨두고 RZM을 떠났게 되었습니다. 이후 2019년에 하나님께서는 AANC라는 열방교회 연합과 빅드림스쿨을 조직하고 새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SWM 선교회 리더십의 격려와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프간 사역의 통로들

저희는 아프가니스탄에 가보지 않았고, 이란어와 다른 그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고, 문화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많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의 비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가니스탄이 재건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간 사람들의 교회가 재생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난민을 중심으로 교육을 지원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일에 저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건전한 아프간 교회의 교단을 세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초중고와 대학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향해서 현재 작은 발걸음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첫째, 아프간 교회 공동체(Assembly of All Nations Churches, AANC)입니다.

현재 7개의 크고 작은 아프간 교회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매주 5명의 리더와 함께 페르시아어로 기도모임을 하고 있으며, 연합모임과 세미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란에서부터 14년 이상 함께 해오고 있는 바흐럼 목사님이 공동대표로 섬기고 계십니다. 감사하게도 멤버 중 20년 동안 신앙을 가지고 성장해 온 아프간 출신인 메흐디와 나지바 부부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프간 바이블 칼리지(Afghan Bible College, ABC)입니다.

이 학교는 AANC 산하 성경학교입니다. 아프간 바이블 칼리지는 2020년 7월 온라인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세미나 형식으로 집체 교육을 몇 번 시도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면서 진행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 상황 속에서 저희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온라인 수업에 대해서 익숙해지면서 줌 (Zoom)으로 하는 성경학교의 운영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아프간 바이블 칼리지는 1년 3학기, 총 2년 6학기제입니다. 오로지 아프간 신자만이 입학할 수 있으며, 주로 성경을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됩니다. 1학기에는 9명이 참여하여 5명이 수료했고, 2020년 11월에 시작한 2학기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아프간 사람들이 참여하여 20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참여하는 학생도 5명이나 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생길 아프간 교회의 리더들이 될 것입니다.

셋째, 빅드림스쿨(Big Dream School, BDS)입니다.

빅드림스쿨은 2018년에 시작하여 2019년 가을에 한국에 임의 단체 등록을 하고 난민전문 교육 기관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1개의 교실로 시작했던 수업이 지금은 12개 지역에서 수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2020년 여름부터 시작한 빅드림 스쿨 스카이 클래스 (온라인)가 13개입니다. 총 40여 개의 수업에서 약 400~500명의 아프간 난민 아이들과 어른들이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빅드림스쿨에서는 1년에 2~3번 영어 말하기 대회와 미술 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1회때 저도 한 그룹에 참여하여 아이들의 말하기를 들었습니다. ‘나의 꿈’이 주제였는데, 크륵칼레의 한 난민 아이가 자신의 꿈은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돌아가서 학교를 세워 배움의 기회가 부족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나와 같은 비전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들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저 꿈을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의 담대함을 보면서 저도 다시 제 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학을 세워 다음 세대에게 나라를 재건하도록 돕길 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꿈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진 것과 역량보다 너무 큰 꿈이기 때문에 대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발표를 듣고 저도 다시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에 합당하다면 하나님께서 그 꿈을 실행하도록 전적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스카이 클래스 (Sky Class)는 가장 최근에 시작한 새로운 학교 모델입니다. 기존의 현지 교사를 통한 영어 수업에서 미국 등의 원어민에 가까운 성도들을 자원봉사로 모집하고 그들이 줌이나 구글미트 앱을 통해 온라인 실시간 수업을 합니다. 학생 모집도 더 이상 터키 안의 도시에 한정하지 않고 그리스와 이란 등 모든 아프간 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레벨과 시작 시기에 따라서 교실이 오픈되고 진행되는 매우 유연한 수업 형태입니다. 그래서 Sky Class (하늘 교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넷째, 라스트콜 (Last Call Ministry) 온라인 아웃리치 사역입니다.

라스트콜은 2019년 3월, 협력하는 이란 교회의 지하 예배당 한쪽 구석의 1평방미터 남짓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만 권의 아랍어 및 아프간 성경을 배포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수개월 전부터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 오던 아나이타 자매가 첫 스탭으로 함께 했습니다. 저희는 매주 모여 중보기도를 쌓아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온라인 사역은 주님의 놀라운 도우심과 은혜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기 불가능했던 터키 구석구석의 아프간 난민들이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 본 적 없는 아마시아라는 곳의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 우리의 영상을 시청하고 성경을 받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탈레반 남편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아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반응을 했습니다. 한 번은 퀴타히아 지역의 야히어라는 아프간 형제가 성경을 받고 싶다고 했고 저희 부부가 직접 그 도시를 방문하여 카페에서 만나서 성경을 전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고 한국에서 이 성경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냐고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이런 여러 만남을 통해 소외되고 아픔 속에 있는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지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역을 통해 아프간 영혼들을 준비시키시고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라스트콜에는 8명의 사역자가 함께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온라인 사역에 참여시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었고, 함께 열매들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2019년에 80만 명에게 150여 개 이상의 영상을 발송하고 약 4천 명에게서 메시지 회신을 받았습니다. 이 중에 절반이 긍정적인 회신이었고, 신앙 상담과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2020년 130만 명에게 200여 개 이상의 복음 영상을 발송했으며, 약 9천 명에게서 메시지 회신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 약 5천 명에게 성경을 보내고, 신앙 상담과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중에 10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90여 명의 초신자가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계속 연락이 되고 있는 약 500명이 있는데 이들 중에 앞으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이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프간 난민으로 시작한 라스트콜 사역은 이제 아프가니스탄 본토 사람들을 목표로 사역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3천만 명의 인구가 있고, 그들 중 약 400만 명이 페이스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중 학생이거나 성경에 관심있는 150만 명을 정밀 타겟팅하여 복음 영상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주의 영광이 있는 곳

8년간 터키에서 사역해 오면서 매년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첫 4~5년 한 명 한 명의 난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과 아픔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처럼 그 기간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믿음때문에 받는 핍박을 못 견뎌 자살한 친구도 있었고, 동역자를 잃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가끔 소망 없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왜 그렇게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 아내는 마음이 너무 아파 쓰러져 현장을 떠나고 싶어 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통해 늘 곁에 계시고 한 영혼 한 영혼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이 아픈 영혼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현장에 주의 영광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참예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저희 가정이 주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거저 주시는 은혜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깊이 깨닫습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하나님께서 저희를 또 어느 곳으로 옮기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동안 아프간 공동체가 든든히 서고,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위해 섬기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동역자들이 온전히 세워지도록 섬기기를 소망합니다.

파트너 칼럼

하나님의 임재, 부흥을 갈망하며

임사라 사역자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기쁜 소식이 있어요! 지난 3개월 동안 3명이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지난달 예배 시간에 광고하는 T 사역자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

2020년 초 온 세상을 점령한 코로나로 인해 이곳의 교회들도 변화하는 정부 방침을 따라 예배 및 각종 모임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온라인에서 또 오프라인으로의 전환을 반복해야만 했다. 처음 온라인 예배를 시작하던 4월, 공동체의 기초가 아직 튼튼하지 않은 이곳의 신생 교회가 모임을 온라인으로 전환하면 교회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역자들의 우려는 일부는 맞았지만, 일부는 틀렸다. 분명 누군가는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화면에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봉쇄령으로 관계가 단절된 만큼 오히려 증가한 개인 시간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빈 마음을 채울 진리에 더 목말라 했다. 줌을 통해 진행된 성경 공부는 어느 때보다 활발했고, 온라인을 통해 복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구도자들은 6월 봉쇄가 풀린 후 대면 예배와 모임이 가능해지자 여름을 지나 가을의 길목까지 하나둘씩 교회를 찾아왔다. 함께 예배하며 복음에 깊이 귀를 기울였고, 그중 몇 명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린다는 고백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어두운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수적인 면에서 조금 더 성장해 있었다.

지난 2020년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교회를 통해 온라인으로 성경을 받고, 복음에 대해 소개받은 사람은 192명이며, 그중 26명이 사역자나 교인들을 직접 만나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중 3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아직 통계를 내보지 않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12월 현재도 몇 명의 새신자로 인해 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이 양적인 증가는 과연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양으로든 복음을 전하려고 수고한 우리들의 노력 덕분일까? 물론, 우리의 수고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이곳 터키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영적인 모멘텀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려는 이곳 사역자들의 수고에 나는 매번 감탄한다. 온라인으로 관심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교회로 인도하는 모든 과정, 그리고 그들을 제자로 성장시키기 위해 들이는 동역자들의 수고와 열정은 언제나 내 마음을 겸손하게 한다. 이 신실한 헌신이 없었더라면 지난 몇 개월간 우리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수고한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한들, 만약 그것을 들으려는 준비된 마음과 열린 귀가 없었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단시간에 열매 맺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밤새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다’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한 해를 마감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곳을 변화시키고 계신다.’ 작년 여름 약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곳에서 느꼈던 영적인 계절감의 변화였다. 무슬림 인구가 97%가 넘는 이곳에서 교회 공동체들의 성장은 여전히 느리고 더뎠지만, 적어도 성장이 멈추거나 퇴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복음을 들으려는 사람들의 수는 예상보다 많았고, 말씀에 반응하는 그들의 마음은 진지하고 열려 있었다. 땅이, 사람들의 마음 밭이 기경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에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고 계신다!

종교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이 분리되기 힘든 이곳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삶을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안다면, 지난 한 해 동안 섬기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의 숫자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단언한다. 이 성장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해 갖고 계신 계획에 비하면 아직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그렇다. 이 땅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과 오랜 일하심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놀라운 방법과 속도로 이곳 가운데서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부흥의 갈망

이 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키워드를 주시는지 한참을 씨름했다. 오랜 고민과 기도 끝에 내 마음에 남은 한 단어는 ‘부흥’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키워드였다. 부흥을 위해서 오랜 시간 기도하고 계시는 신실한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내게 이 단어는 어느 한 시절 너무 빈번히 사용되었다가 어느샌가 슬그머니 잊힌 듯한 꿈이었다. 한동안 무던히도 갈망했지만 그 갈망은 사그라지고, 열정적으로 꿈꿨던 부흥에 대한 비전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맞게 잘 축소되어 있었다. 나 자신에게조차 잊혀 있던 이 단어를 주제로 글을 쓰려고 보니,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 내가 보고 그리고 꿈꿨던 부흥의 현장들, 기도들, 비전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찬양 제목으로만 접했던 부흥의 실체를 처음 마주했던 것은 2007년이었다. 터키와 국경을 마주한 나라 이란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느꼈던 놀라움이란... 이슬람 공화국, 즉 이슬람 법에 따라 국가가 통치되는 닫힌 그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이 꿈과 환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성경 한 권에 목말라하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2007~2010년 사이에 이란 내 지하교회 성도 수는 약 3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부흥의 물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이란뿐 아니라 터키 내에도 수많은 이란 가정교회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나는 이란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옆 나라 터키로 넘어와 훈련을 받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신 가장 값진 선물 중 하나일 것이다. 이란에서 신앙을 지키며 사는 일은 온갖 경제적 사회적 차별은 물론 때로는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들의 소박한 미소는 묵직하게 가슴을 채우는 감동이나 차오르는 눈물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란 친구들 앞에서 내가 믿는 복음의 의미를 항상 재점검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나는 그들로부터 제자로 사는 삶을 배웠다.

이란 가운데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씨는 인근 국가인 터키로 조금씩 넘어오고 있었다. 종교적인 핍박을 피해 터키로 넘어왔던 이란 난민들은 이곳에서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복음안에서 성장해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란 리더 중 몇몇은 터키로 넘어온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 공동체들을 돌보았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언어는 약 70~80%가 유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사역이었다. 나는 막 시작된 이 어린 공동체를 도와달라는 이란 리더의 부탁으로 터키 동부의 V 도시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해 갖고 계시는 부흥의 비전, 그 단면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터키 동부의 V 도시는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터키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부정당하며 끊임없는 차별과 억압 속에 살아온 이들에게는 가슴 깊은 한 맺힘이 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조금이라도 대화가 길어지면, 이들의 응어리진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 V 도시에 머물렀던 몇 달,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억압, 차별, 슬픔 그리고 분노. 이곳 사람들의 심장을 채우고 있는 절망의 기류가 호흡할 때마다 내 폐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어느 도시보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은 곳, 국경 인근 도시답게 밀매나 불법 유통을 통해 형성되는 지하 자본이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곳,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가 뿌리 깊어서 혼자 길거리를 돌아다니기가 망설여지는 곳. 이렇듯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다지 밝지 않은 곳에서 난민 공동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자주 접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마음도 조금씩 지치고 상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도 난민이라는 이유로, 더욱이 예수님을 영접한 난민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한 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난민 친구의 하소연에 뭐라고 답해 줄 말을 찾지 못해서, 그냥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기도를 시작했지만 주님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신음만 맴돌았다. 도무지 소망이 없어 보였다. 난민 친구의 상황도, 이 도시도, 이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변할 것같지 않은 짙은 어두움이었다. 소리를 내어 뭐라도 한마디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친구의 마음을 위로할 만한 성경 구절이라도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나는 짧지 않은 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을 감고 주님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너는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배운 영어 단어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학생처럼 나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그동안 내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했던 여러 활동이 떠올랐다.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난민 친구들과 예배하고, 난민 공동체가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한 가지 마음의 감동이 있었다. “나는 너의 삶을 예배로 받는다. 제자 삼기 위한 너의 섬김은 귀한 예배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이 도시를 향한 나의 꿈을 꿀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이 땅의 변혁 (transformation)을 이룰 것이다. 부흥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강력이다.”

사실 그때 주님께서 내 안에 주셨던 감동을 지금 글로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지 조금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그곳에서의 나의 모든 섬김과 헌신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주님께서 그 기도 가운데 내게 원하셨던 한가지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 땅 가운데 임하기’를 갈망하는, 즉 부흥을 갈망하는 목마름이었다. 그 땅의 어두움과는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 가운데 부어질 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며, 상한 마음이 회복되며,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죄로 뒤틀려있던 모든 영역이 회복될 것이다. 그것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주님이 그 일을 꿈꾸고 계심을 그리고 함께 그 꿈에 ‘아멘’으로 화답할 자로 나를 초청하고 계심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 주님, 나를 굴복시키소서

그날 마음 상했던 난민 친구의 마음을 위로하는 기도로 마무리가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꺼져가는 촛불같던 내 심령이 회복되었던 것은 정확히 기억한다. ‘부흥’이라는 단어로 마음이 채워져 숙소로 돌아온 후, 며칠간 주님이 주신 이 단어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며 기도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부흥을 갈망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에반 로버츠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20세기 초반 이슬람권을 제외한 세계적인 부흥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웨일스 부흥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부흥이 일어나기 약 12~13년 전부터 웨일스의 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그의 기도 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이 있다. “오 주님, 나를 굴복시키소서!” 성령께서 임하셔서 웨일스에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시기까지 그의 기도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광산에서 일하는 중에도 찬양을 멈추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흥을 위한 전략이나 활동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 자신을 온전히 굴복하는 것이었다.

어두운 이 땅을 위해 더욱 더 많은 사역자를 보내 달라는 간구를 주로 했던 나는 부흥이라는 키워드와 에반 로버츠의 삶을 다시금 배워가면서 스스로를 점검했다. 일꾼을 구하는 기도는 당연한 것이다. 주님께서도 더 많은 일꾼을 구하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과연 많은 사람의 많은 활동이 부흥을 가져오는가? 우리의 수많은 전략과 활동들은 정말 모두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된 것인가? 우리는 성령께서 마음껏 일하시기에 적합한 정결하고 굴복된 사람들인가? 아니, 우리라는 단어 뒤에 숨지 않고, 더욱 더 정직하게 나는 주님께 순전히 드려졌는가? 나는 그분의 나라와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 ‘나를 굴복시키소서’라는 겸손하고 불타는 기도로 채워져 있는가?

부흥을 향한 이 배움과 기도들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V 도시를 떠나야 했다. 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터키에서의 사역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약 8년 만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곳에 다시 돌아온 지금, 나는 부흥이라는 단어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땅 곳곳에 이미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지난 100여 년 개신교 사역의 열매가 미미해서 일명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곳은 어느새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복음을 듣고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는 전략적 요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슬람 공화국의 부패로 인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깊은 회의감을 가진 이란 사람들이 터키로 와서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성장해 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전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이란을 거쳐 이 땅으로 넘어온 아프가니스탄 형제들이 이곳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2011년 아랍의 봄, 2014년 이라크 및 시리아에서 IS의 발발로 가슴 아프게 자신의 조국을 떠나야 했던 아랍 사람들이 이곳에서 복음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제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꿈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땅은 혼란스러운 정치, 사회, 경제, 외교적인 상황 속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영적인 광야의 땅이 되어있었다. 다른 민족들의 영적인 성장의 발판이 되고 있는 터키, 그러나 더 큰 꿈이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이곳 터키인들의 영적인 부흥이다.

글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의 조짐들은 이미 시작되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은 이제 겨울에서 봄이 되어가는 듯하다.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현지 교회들이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 미개척 지역에 예배 공동체가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들도 들려온다. 그러나 생명력 있는 초록 잎으로 울창한 나무를 볼 수 있는 부흥의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지혜나 계획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하나님의 부흥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다. 부흥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분의 부흥을 간절히 구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부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지금, 힘써 기도할 때!

지금은 그 무엇보다 힘써 기도할 때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강력으로 이 땅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영적인 추수의 때를 이루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믿으며, 그 일을 속히 이루시도록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주님께 사로잡혀 굴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역적인 경험과 아젠다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편히 일하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부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방법과 모양으로 이 땅을 덮을 것이다. 성령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며, 성령의 바람에 따라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부드럽고 겸손한 심령으로 준비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파트너 칼럼

터키에서의 교회 개척 원리들: 터키 이스탄불 새소망교회 개척 사례 중심으로

안바울 사역자

1. 들어가는 말 - 터키의 난민 현황

유엔난민기구 (UNHCR)에 따르면 2018년 현재 6천 8백만 명의 난민이 있다고 한다. 4천만 명은 국내실향민이고, 2천 5백만 명은 자국을 떠난 난민들이고, 3백만 명은 망명을 원하는 난민들이다(1). 특별히 2011년도 3월에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2018년 3월 현재까지 약 35만 명의 사망자, 300만 명의 부상자, 1,100만 명의 난민 (해외 540만 명, 국내 610만 명)을 양산하면서 세계적인 문제로 떠올랐다(2).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터키 남부의 하타이 (Hatay), 신약성경의 수리아 안디옥 (현재 지명, Antakya) 지역은 2011년 3월에 시리아 사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리아 난민 2만 명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2018년 12월 현재 터키에는 361만 1,834명의 등록된 시리아 난민이 살고 있다. 기타 난민은 아프간 17만 2천 명, 이라크 14만 2천 명, 이란 3만 9천 명, 소말리아 5천 7백 명, 기타 1만 1,700명 등으로 여러 지역에서 온 난민들이 터키 땅에 거주하고 있다(3).

터키에서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의 현황을 좀 더 자세하게 보고자 한다. 2018년 12월 6일 터키 이민청 발표에 따르면, 터키 내 시리아 난민들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5개 도시(4)는 다음과 같고 괄호 안 비율은 지역 인구 대비 시리아 난민 비율이다.

  1. 1) 이스탄불 (İstanbul): 558,115(3.71%)
  2. 2) 샨르우르파 (Şanlıurfa): 455,543(22.94%)
  3. 3) 하타이 (안디옥 Hatay): 441,913(28.05%)
  4. 4) 가지안텝 (Gaziantep): 418,802(20.88%)
  5. 5) 아다나 (Adana): 229,886(10.37%)

2. 터키의 난민 사역 및 공동체 현황

1차 시리아 난민 교회개척 컨퍼런스

이런 난민의 통계와 대비해서 터키 내에서 난민들의 공동체의 현황을 볼 필요가 있다. 터키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현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터키의 시리아 난민 사역을 살펴보기 전에 터키의 이란 난민 사역을 잠깐 살펴보면, 터키 내에서 이란 난민 사역은 굉장히 활발하다. 터키에 관광을 포함해서 유동하는 이란인은 약 백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난민은 3만 9천 명 정도이고, 정치·종교·경제적 이유 등으로 난민이 되었다. 터키 내 이란 난민 사역은 구제보다는 전도 및 교회 개척과 지도자 양성 등 기본적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터키 내 이란인 공동체는 터키 각 지역에 약 15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엘람 (Elam)이라는 영국에 본부를 둔 이란 선교단체가 이란 선교의 30~5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이란인 사역자들이 사역하는 공동체들이 많이 있고, 이란인 및 아프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외국인 사역자는 20~30유닛 정도가 있다고 한다(5).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권의 난민 사역의 현황은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2017년 11월에 처음으로 터키 하타이 안디옥 개신교회에서 터키 내의 시리아 난민 공동체 리더들을 초청해서 ‘터키 아랍 크리스천 난민 컨퍼런스’를 가졌을 때, 그 당시 터키 내의 약 20개의 공동체 300여 명의 회심자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6). 외국인 사역자들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방권 외국인 사역자들은 대체로 난민센터 사역 및 개인 전도나 가정 모임을 하고, 이집트 중심의 아랍권 선교사들은 지역교회와 연결하여 교회 개척 및 교회 협력 사역을 주로 하고 있다. 한국인 사역자들의 난민 사역 현황은 미미한 실정이다. 이런 통계로 볼 때, 터키에서 난민 교회의 숫자는 이란은 전체 난민 인구에 비해서 굉장히 많고, 아랍권의 난민 교회들은 난민 인구에 비해 굉장히 적다. 터키의 난민 교회에 대해서는 이란 교회와 아랍 난민 교회들은 따로 놓고 사역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 이란 난민의 역사는 길고. 사역의 수준은 이미 터키 교회를 뛰어 넘었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무슬림들의 회심을 보는 역사의 현장이다. 반면에 아랍 난민, 특히 시리아 난민은 난민 이슈로는 가장 주목받지만 터키 사역의 측면에서, 특별히 교회 개척 부분에서는 굉장히 미미하다.

터키 내의 난민 공동체는 세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터키 교회 내에 존재하는 공동체, 둘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 셋째, 가정 모임이다. 대체로 아랍 교회는 터키 교회 내에 존재하거나 가정 모임으로 존재하지만, 이란 공동체는 자신들의 모임 장소와 공동체를 가진 독립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여러가지 형식 중에서 터키 내 최근 성공적인 교회 개척 사례로 꼽히는 이스탄불 새소망교회의 사례를 통해서 터키 내 교회 개척의 원리를 정리해보려 한다.

3. 터키에서의 교회 개척의 원리들: 터키 이스탄불 새소망교회 개척 사례

터키 이스탄불의 새소망교회는 난민 공동체의 세 가지 분류 중 터키 공동체 내에 형성된 난민 교회 사례에 해당한다. 이 교회는 터키 교회를 바탕으로 시작한 교회이지만, 결과적으로 터키, 이란, 아랍 공동체가 함께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의 개척 과정과 난민 공동체 형성 과정을 통하여 몇 가지 원리와 그 예시를 살펴볼 것이다.

1) 건강한 모델을 가진 공동체 (건물 교회 혹은 가정모임)에 출석하라

잭 발론 사역자 가정은 2007년 4월, 20대 후반에 1살된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파송 받았다. 이 가정은 미국의 파송 단체와 관련이 있는 터키 교회인 앙카라의 구원교회로 처음 오게 되었다. 앙카라 구원교회는 터키 내의 많은 지역에 지교회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특별히 구원교회는 “터키 내의 구원교회가 있는 곳에 난민 교회가 있게 하라”는 모토를 가지고 난민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이다. 잭 발론 사역자 가정은 앙카라 구원교회에 출석해서 사역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5년 동안 언어와 문화 습득, 소그룹 리더, 전도팀, 알파코스 등 앙카라 구원교회의 많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험을 쌓았다. 이처럼 본인에게 맞고 배울 공동체를 선택해서 함께 사역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2) 충분한 경험 후에 새로운 교회 모델을 개척하라

잭 발론 사역자 가정은 5년 동안의 활발한 사역 후 안정된 지역인 앙카라 구원교회를 떠났다. 물론 앙카라 구원교회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개척을 나간 것이다. 대체로 터키 현지 교회에서 리더십을 얻은 후에는 그 교회에 머물거나 리더십과 문제가 생겨서 갈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가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역자 자신이 교회 개척에 대한 강력한 비전이 있었고, 사역자 가정이 젊어 자녀교육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잭 발론 사역자 가정은 2012년 이스탄불로 이사 후 이스탄불에서 모임을 시작하기 전 6개월 이상을 외국인과 현지인 개척팀과 함께 가정 모임을 가지면서 리서치와 준비를 하였다. 인구 45만 명이 있고 교회가 없는 아타쉐히르 지역에 있는 상가 3층을 얻어 2013년 봄에 교회 창립 예배를 드리고 지역에 알리면서 개척을 시작하였다.

3) 개척 후 안정되기 전이라도 필요가 있다면 확장을 두려워 말라

이것은 팀 사역인 경우에 가능하다. 잭 발론 사역자 가정은 처음부터 현지인과 외국인이 함께 할 수 있는 팀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앙카라 구원 교회의 도움이 있었다. 이 가정은 2013년 창립 후 1년이 되기 전에 2014년에 터키 남부의 알라니아에서 핀란드 사역자 및 터키 형제들로부터 교회 개척에 대한 동역 요청이 있어서 함께 개척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회를 개척한 지 1년도 되기 전에 사역자가 타지역에 다른 교회 개척을 돕는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팀 사역이라 가능했다. 결과적으로는 알라니아 모임도 개척 후 몇 년 안에 현지인 리더가 세워져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고, 이스탄불 새소망교회도 역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또 다른 확장은 창립 후 2년이 된 2015년에 이루어졌다. 함께 하던 미국인 가정이 동부로 가서 개척하기로 하고 떠나게 된 것이다. 이 가정도 처음 가정 모임을 개척해서 빠른 시간에 중립적인 지역에 공식적인 교회 공간을 얻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사역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CPM(교회개척운동) 방식의 급격한 교회 개척 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건물 교회도 성장과 안정을 이룬 후 배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를 향해 유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4) 교회를 개방하라

여기에서 난민 교회 형성 사례가 나오게 된다. 새소망교회는 2015년 이란 공동체가 예배당을 사용하기를 요청해서 허락을 한다. 행정적으로는 독립된 이란 교회를 유지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후 교회 개척에 대한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한 교회 두 공동체로 존재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런 형식이 터키에서 제일 많은 난민 교회의 형성 과정이다. 난민들에게 교회를 개방할 때 터키 교회의 리더들과 구성원들의 반대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선교적 마인드를 가진 외국인 사역자나 현지인 사역자들이 이런 반대를 넘어서는 경우 난민 교회들이 형성되게 된다. 물론, 이후에 문제가 생겨 갈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터키 교회와 난민 교회가 공존하는 교회의 형태들이 터키에는 많이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를 선교적 마인드로 깨우는 일이 필요하다.

5) 시대와 지역의 선교적 부르심에 응답하라

2011년 시작된 시리아 사태는 2013년에 시리아 국경 지역의 하타이에 주로 머물던 난민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터키 전역과 주변국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2014년 8월 IS의 미국인 참수가 세계적 이슈로 부상하고 비슷한 시기인 2014년 8월 IS의 예지디 민족의 학살로 난민 이슈가 대대적으로 부각되었다. 한국 사회에는 2015년 1월 김 군의 시리아 입국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난민 사역이 2014년부터 터키 교회 협의회를 창구로 난민 후원들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터키 내 난민 사역들이 시작하였다.

이스탄불 새소망교회에서도 자매 사역자가 난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2015년부터 300가정을 대상으로 한 구호 사역으로 시리아 난민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호 사역을 교회 개척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아랍어 사역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역에 이집트 사역자 부부가 동참하게 되었고, 이후에 난민 사역 책임을 맡게 되었다. 어느 정도 구호를 한 후 구호 사역을 멈추고, 구호로 연결된 난민 가정들을 이집트 사역자 가정이 1년 동안 방문하고, SNS를 통한 사역도 적극적으로 하였으나 하나의 열매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1년 뒤 시리아 난민 중 한 명의 열매가 생긴 후, 6개월 이내에 14명의 아랍어권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아랍 교회가 개척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4. 나가는 말 : 건전한 모델을 배워서 반복하고, 자기화하여 적용하라

이스탄불 새소망교회를 개척한 잭 발론 사역자의 11년 사역을 정리하면서 터키 교회 개척의 원리에 대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잭 발론 사역자는 처음 터키에 올 때부터 실질적인 회심의 열매를 보는 것에 가장 관심이 있었다. 그는 앙카라 구원교회에서 모든 교회론과 교회 개척 방법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배웠다. 그리고 많은 방법들이 터키에서 실질적이지 않거나 실행 불가능하다는 개인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빠른 열매와 빠른 재생산은 터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지향한 터키에서의 교회 개척 방법은 교회 모임 장소를 얻어서 개척하는 건물이나 센터 중심의 교회 개척 모델이다. 그는 이러한 모델이 터키에서 적용 가능하고 실질적이라고 말한다.

2018년 가을에 진행된 터키 내 교회 개척자 훈련프로그램에서 터키인과 시리아인들을 대상으로 가정교회 중심의 CPM 방식과, 건물 교회 중심의 두 가지 강의를 하였다. 강의 후 설문에서 나타난 특이한 점은 대체로 외국인 사역자들은 가정 모임을 선호하고, 터키인이나 시리아인들은 건물 모임을 선호했다. 확실한 것은 터키 내에서 형성된 터키 교회나 난민 교회들은 대체로 건물에서의 모임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가정 모임으로 시작하더라도 가정 모임 형태로 오래 머물면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교회 모임을 하기 전 준비 기간으로 짧게 가지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터키에는 이런 건물 교회의 개척이 잭 발론 사역자 외에도 한국인 사역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례가 있다.

이스탄불 새소망교회는 건물 중심의 터키 교회 개척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또한 어떻게 난민 교회 개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이 사례를 통해 터키에서의 교회개척 원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사역팀 준비 및 현지 사역 경험, 2단계, 사역팀 구성, 3단계, 개척 지역 리서치 및 적절한 장소 섭외, 4단계, 지역교회 창립 후 지역교회로 자리 잡기, 5단계, 각종 방법을 통한 예비 신자 발굴 및 전도 프로세스 반복, 6단계, 교회의 성장과 확장 및 동일 모델의 재생산이다.

이 과정은 너무나 당연해서 이론적으로 식상할 정도이지만, 이것을 실행해서 이루어낸 사례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새소망교회 사례 외에도 한국인에 의한 이런 비슷한 터키 내 교회 개척 단계들이 열매를 맺고 결과를 보이고 있다. 터키 교회 개척의 원리를 난민 교회에도 적절히 적용하면 터키에서의 난민 교회 개척도 열매를 맺어 나가리라 믿는다.

잭 발론 사역자는 2020년 11월 터키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현재 미국에서 터키와 중동의 복음화와 교회개척 동역 사역을 하고 있다.

* 이 글은 2019년 APEN (Arab Persian Europe Network) 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1. www.unhcr.org/figures-at-a-glance.html, 2020년 6월 현재, 7천 9백만 5천 명의 난민이 있으며, 국내실향민은 4천 5백만 7천 명, 국외 난민 2천 6백만 명, 망명 신청자는 4백만 2천 명이다.
  2. [세계일보], 2018년 3월 14일 "시리아 내전 7년… 일상화한 공습 교전 '생지옥'"
  3. 2018 RHP(Refugees' Highway Partnership) '2018 State of the Nation RHP' 자료에서 인용
  4. 이외 터키 시리아 난민 수용 도시들의 순위로는 6) 메르신 (Mersin): 206,430명, 7) 부르사 (Bursa): 163,175명, 8) 이즈미르 (İzmir): 141,363명, 9) 킬리스 (Kilis): 129,157명, 10) 코냐 (Konya): 103,915명이 있다.
  5. 이란 사역 내용은 터키 내의 한국인 이란 난민 사역자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도출했다.
  6. 이 숫자는 확인된 아랍 모임 숫자가 각 지역에 10여 개였고, 확인하지 못한 가정모임과 아예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가정모임을 예상한 숫자이다. 이 통계 중 특이한 것은 시리아 난민 회심자 중 80%는 쿠르드족이었다.

파트너 칼럼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강안나 사역자

선교의 부르심: 예배자, 중보자로

22년 전, 주님께서는 저희 부부를 터키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터키 땅에서 너희 부부를 통해 예배받고 싶다. 나를 예배하지 않는 그 땅에서 나를 예배하며 나의 사람들을 섬기지 않겠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온전히 기쁘게 “Yes”로 응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예배자로, 영혼을 섬기며 중보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그 땅에서 어떤 프로젝트나 사역으로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저희는 1998년 한국의 IMF 시절,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예배자로 살기 위해 그 땅을 향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통해 당신의 영광과 임재를 터키 땅에 나타내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땅에서 노래하고 찬양하며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반적인 선교 사역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렇게 터키 선교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터키 땅에서 우리를 통해 예배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갈망과 열심이 우리를 예배자, 중보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터키 땅에서 행하시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정착하고 언어를 배우며,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골방에 머물도록 이끄셨습니다. 먼저 우리 안에 당신의 집을 세우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골방에서의 머무는 시간을 통해 잘못 쌓아진 우리의 사고방식을 파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관점을 가지도록 바꿔가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열정을 부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 단체 안에 주신 기름부음, 은사나 부르심, 성공에 대한 열망, 사람과 재정의 관계, 유명한 사람에 대한 부러움, 이름이 알려지고 싶은 마음, 선교사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들… 주님을 사랑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소멸하시는 불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태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내가 너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빛이다”라고 하시며 생명의 빛, 구원의 빛,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끄는 빛을 우리 삶에 강력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빛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여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토미 테니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회복하시기 원하시며, 그것은 어떤 장소 이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다윗의 열정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터키 땅 가운데 당신의 임재를 너무나 가져오고 싶으셔서, 터키 땅에서 예배받으시길 원하셔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하늘에 동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부르심이며,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도록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당신이 핏값으로 사신 교회들에 그리고 터키와 온 열방 가운데 자신을 보이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의 예배에 참예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터키의 특별한 부르심: 찬양의 전사

터키에서는 매일 하루에 다섯 번씩 모스크에서 “알라는 지극히 크시도다. 우리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맹세하노라. 예배하러 오너라. 구제하러 오너라. 알라는 지극히 크도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느니라”라는 기도문이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땅에 서서, “터키야,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으니 예배하러 나아오라. 예수님은 너희의 구원자이시다. 길과 진리 생명이다”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그 땅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하셨습니다.

사역 초기 현지인 교회들은 주로 20~30여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들이었습니다. 2000년도에만 해도 찬양을 인도할 수 사람, 음악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배자로 살면서 현지인 교회를 돕고, 예배자를 양육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운 후에 현지 교회 안에 들어가 현지인 목회자와 동역하며 예배를 섬기고, 중고등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찬양 인도자를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20년 넘게 섬기면서 20여 명 이상에 기타를 가르치고, 예배의 삶을 가르쳐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게 양육하였습니다.

터키 찬양에는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터키 땅에서 터키 찬양을 부르거나 인도할 때 가장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온 땅에 충만하시며, 온 열방의 하나님이시지만 터키에서 터키 민족에게 주신 언어로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신다고 믿습니다. 현지 집회나 기도모임 등에서 터키 찬양을 인도할 때, 현지 지도자들이나 교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맛보게 되는 역사가 있었고,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을 증가시켜 주셨습니다.

터키는 찬양의 전사들입니다. 터키는 노래의 흥과 춤의 즐거움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전에는 칼과 말의 힘을 의지하여 나라의 권세를 확장해 갔다면, 하나님께 구속받은 터키는 찬양과 춤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터키와 중동, 이스라엘까지 운반하게 될 놀라운 부르심이 있습니다. 터키의 특별한 부르심을 볼 수 있었던 것은 “BURN 일주일 연속 예배”를 통해서였습니다. “BURN 일주일 연속 예배”는 2007년부터 라마단 금식 기간이 끝날 즈음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초창기에는 주로 사역자들 중심으로 영어로 예배를 드렸는데, 2015년 이후에는 놀랍게도 현지인 예배 인도자들과 뮤지션들 중심으로 현지어 찬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는 현지 찬양팀들과 인도자들이 현지어 찬양을 유튜브에 올리고, 기름부으심이 있는 찬양곡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교회 안에 찬양의 음악적인 부분도 많이 업그레드 되고 기름부으심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찬양과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의 영적인 부흥과 성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의 집, 연합 중보기도모임 그리고 교회개척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오시던 주님께서 우리 안의 주를 향한 갈망, 주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그렇게 세우길 원하셨던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세우시는 데 저희 부부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몇 년 동안 개인의 골방에서 우리 심령 가운데 당신의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현지 교회 가운데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풀어내시며 교회를 깨우셨습니다. 마침내 터키 땅에 당신의 영광과 임재를 보이고자 당신의 집을 세우는 때에 우리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부르셔서 동역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9장 46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우리 중에 거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46)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우리를 추구하시며 갈망하시는 그 불같은 사랑이 2007년 기도의 집을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백성들과 분리되고 싶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세우시는 일에 우리를 통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 그리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하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곳은 완전히 용납되고 사랑받는 자녀 된 자들이 나아와서 아버지를 자랑하고 높이는 곳입니다. 또한 영원한 신랑 되신 주님을 수치와 부끄러움 없이 친밀함 가운데 만나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경외함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오실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아가고,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시도록 신부된 자들이 성령과 하나 되어 부르짖게 되는 곳입니다. 기도의 집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구하는 부르심은, 사역의 초점을 오직 대제사장이시며 영원한 왕이시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모스 9장에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겠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친밀함으로부터 나오는 찬양과 중보를 통해 당신의 영광과 임재를 이 땅 가운데 풀어놓길 원하십니다. 기도의 집은 당신의 임재를 통해 이 땅 가운데 부흥과 회복과 추수를 가져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구약 다윗의 통치 시대에 4천 명의 연주자와 288명의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24시간 끊이지 않고 예배하였을 때,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셔서 왕국이 흥왕하고 번성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10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였을 때 수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놀라운 선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철야 기도, 새벽기도, 기도원의 금식기도가 한국의 영적 부흥과 영적 성장을 가져오고,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기도의 집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친히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07년에는 또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터키의 부흥을 위해서 연합하여 중보기도 할 것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셨고, 터키 사역자 중심으로 연합 중보기도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 땅에 부름받아 이 땅을 섬기는 사역자들을 만지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새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며 기도의 불을 회복시키셔서 연합함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연합 중보기도 모임에 현지인 지도자들과 교회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 땅의 부흥의 주역으로 현지 교회와 리더들을 세우시고 격려하시며, 그들이 결코 작은 자들이 아니라 큰 용사인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연합 중보기도 모임을 통해 우리 모두는 터키 땅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셔서 영적인 부흥을 주시도록 구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010년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아랍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의 반 정부 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며 내전으로 번졌고, 2014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 IS가 등장하면서 중동은 혼란의 시간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고, 수십만의 난민이 터키로 유입되면서 영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터키 땅으로 이끌어 오셨으며, 우리가 기도한 것처럼 말씀이 앞서 달려가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임과 교회가 없던 지역에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선교하고 계셨습니다. 터키 현지인들은 아니었지만, 터키 땅에 들어온 난민들 가운데 영적인 부흥과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교회가 놀랍게 세워지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이 땅의 부흥을 위해 복음이 흥왕하도록 기도하고 예배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동원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할렐루야!

예배하는 가정: 자녀가 이어가는 유업

저희 두 딸은 아주 어릴 때 터키에 왔습니다. 큰딸은 생후 10개월 때, 둘째 딸은 태아 5개월 때 저희와 함께 터키에 와서 고등학교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선교사로 부름 받아 살지만 저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며, 한 남편의 아내이고, 자녀들의 부모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터키 유치원에서 터키어를 익히고, 초등학교부터는 선교사 자녀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가정에서는 전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했습니다. 선교지여서, 교회가 작아서, 그들을 양육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저희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알아가도록 어렸을 때는 즐거운 찬양을 함께 부르고 성경 말씀을 쉽게 이야기로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암송하고, 채플을 통해 주님을 알아갔습니다. 청소년이 되어서는 짧더라도 스스로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통해 주님을 알아갔습니다. 만 12세 때 사춘기 들어가기 전, 부모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때에 영성 캠프에 보냈는데 거기서 두 딸이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만지심과 하늘의 예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을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대학도 부르심을 준비하기 위한 학교에 진학하여 성경을 배우면서 사역을 겸했습니다. 이제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코비드 19로 인해 사방이 막힌 듯한 때, 두 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여전히 주님께 자신들의 삶을 드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을 따라가며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모습이 귀하고 귀합니다.

다윗의 열정을 가진 다음 세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스탄불에 기도의 집을 시작하게 하신 후, 2008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중보자로, 연주자로, 싱어로 와서 짧게는 6개월, 1년, 2년 그리고 그 이상을 이스탄불 기도의 집을 섬겼습니다. 매일 함께 드리는 예배와 개인 예배, 그리고 night watch를 통해 터키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터키의 81개 주를 축복하며 나라와 교회를 위해 중보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예배와 기도를 통해 앞서 달려가서 역사하시는 많은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탄불이 관문 도시인만큼 많은 젊은이가 이스탄불 기도의 집에 왔습니다. 그들은 찬양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비전이 자신의 비전이 되고 하나님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되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레바논과 요르단, 이스라엘의 사역자로 가고,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 한국의 기도의 집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결혼하여 사역자의 아내로, 어떤 이는 일터 사역자로 주님이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또 장기 선교사로 준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

선교는 하나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열방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역하는 부르심입니다. 선교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삶이며, 예배를 모르고 없는, 그래서 예배하지 않는 땅에서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운반하는 통로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예배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자랑하고 높이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는 고귀한 부르심입니다.

터키에서 지금까지의 시간과 앞으로의 모든 여정 가운데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터키 땅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라고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셨고, 골방에서 때론 함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개인의 삶을 영적으로 성숙시키시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 자녀들을 부르시고, 청년 세대들을 부르셔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선교적 삶으로 초대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터키 교회들을 깨우시고, 찬양의 전사들을 준비시키시며, 다가올 부흥을 준비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연합된 중보를 통해 영적인 지형의 변화를 가져오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초대하고, 당신의 교회를 세워가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더이상 우리의 힘과 능, 재정과 그 어떤 것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을 부어주시길 구할 때,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셔서 선교를 완성해 가실 분이 하나님이시며, 마지막 때에 주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다윗의 영, 즉 친밀함 가운데서 여호와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세대를 일으켜서 열방의 모든 민족이 주를 찾는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실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주의 얼굴을 구합니다. 선교를 완성해 가실 영원한 왕의 영광과 임재를 구합니다. 아멘!

미션 프론티어스

항상 존재하는 전 세계적인 혼란과 제자 삼는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글: C. 앤더슨 (Mission Frontiers/2020.09.01)

어느 날 나는 프론티어 미션 트레이너 그룹과 줌으로 화상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유럽인, 미국인 등 전 세계에서 왔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이 시기에 프론티어 미션의 트레이너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 것인지 듣고 싶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높은 가치를 두는 운동을 섬기게 되어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나누었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연습했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트레이너 중 한 명이 말했다. “저는 호주에서의 화재와 코로나로 인한 혼란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더 많은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나는 더 많은 혼란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불편했다. 글쎄... 별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이 선교 리더인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해 왔던가? 더 많은 혼란을 대비하면서도 또한 영혼들의 추수를 준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가?

그 회의가 있은 지 며칠 후, 나의 고향인 미니애폴리스의 거리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혼란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사이클론이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살았던 남아시아를 강타하며 흔치 않은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동반되었다. 혼란 중의 혼란이었다.

지금은 생활하기에도 사역하기에도 쉽지 않은 시기이다. 혼란이 닥쳐올 때, 우리의 머리를 물 위로 내밀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어렵다.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요청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전화기를 울린다. 때때로, 우리는 압도당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한다.

혼란들은 나를 놀라게 하지만, 이 일들이 하나님께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낸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도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코로나바 이러스에 무력해지지 않으셨다. 내가 하나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고 그분의 곁에 머무를 때, 내가 이전에 정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계속 흔들리는 속에서도 제자 삼는 이로서 내가 어떻게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이다.

혼란이 개인화 될 때

세계적인 혼란을 넘어서, 우리가 섬기는 일과 같이 개인적인 차원의 도전도 있다. 교회와 개인의 후원을 받는 선교사들에게 이것은 후원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고 세계적으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다. 당신의 재정적인 지원이 줄어들면, 매우 확실한 방법으로 가계는 영향을 받는다.

나의 동료는 더 많은 혼란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 지 열흘 후, 암 진단을 받았다. 개인적 차원의 혼란이었다. 지난 10개월간 나역시도 개인적인 도전을 마주하였다. 등을 다친 후, 미끄러져서 다리와 발목을 접질렸다. 치아에도 문제가 있었다. 또한, “제자 삼기 운동을 시작하라: 당신이 바쁘고,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재정이 없을지라도”라는 이름의 온라인 수업의 등록이 시작되어 가장 업무량이 많았던 시기에 나의 조교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었다.

바깥세상의 혼란들은 고난이다. 개인적 차원의 혼란과 도전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적인 공격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해 가시는 과정인 것인가?

나는 마지막 때를 연구하는 학자나 종말론자가 아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자삼기운동 (Disciple Making Movement, DMM)을 실천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일들을 단순하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심오한 성경 공부를 즐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때가 마지막 때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나는 성경이 마지막 때에는 우리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경은 또한 종말에 있을 대추수를 이야기한다. 이 둘은 함께 간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많은 환란에 맞대응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딤후 3:1)

제자 삼는 사람들이 삶의 혼란들을 다루는 세 가지 방법

1. 우리는 두려움으로 반응할 수 있다

두려움은 침투성이 있고 전염성이 있다. 음모론, 가짜 뉴스 그리고 소문은 우리의 두려운 마음과 생각을 증폭시킨다. 불안은 매우 인간적인 반응이다. 고통처럼 두려움도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때 우리를 보호해준다. 그러나 지속적이거나 만성적인 두려움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일 반응이 아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이기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신 음식과 화장지를 사재기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하시는 일을 보기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에 초점을 맞춘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견고한 반석이신 그분에게 의지해야 한다. 두려움에 저항하면 두려움은 당신에게서 물러날 것이다. 당신이 두려움에 굴복하고 마음을 줄수록 그것은 더 자랄 것이다.

제자 삼는 사람들로서 두려움의 반응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이것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봉쇄조치가 풀리면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새로운 집단이나 교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이 좀 더 좋아지면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나눌 것입니다. 여행 규제가 완화된 후에 다시 제자들을 훈련하는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런 반응의 문제점은 이 혼란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새로운 혼란이 뒤따를 수도 있다. 담대한 행동은 두려움의 반대이다. 이것은 이 어려운 시기에 제자 삼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2. 우리는 혼란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할 수 있다

때로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더 쉽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혼란을 무시하고 그것이 적절한 때에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몇 달 후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잠잠히 안전하게 지내면, 곧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이런 반응도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때를 분별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때와 기한” (행 1:7)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세계의 사건들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하여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혼란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혼란들로 인해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위대한 기회를 놓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는 매우 영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다.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영적 대화에 열려 있다. 코로나와 싸우느라 바쁜 정부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덜 집중하고 있다. 수백만 명이 온라인 자원에 접근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잃어버린 영혼에 다가갈 수 있고, 제자를 배가시키는 이 위대한 기회가 우리가 해오던 방식을 바꾸기를 요구한다면 이러한 개방성을 무시해야 하는가? 제자 운동에 대한 우리의 모델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포용하기 위해 변해야만 한다. 운동은 다른 방법으로 경계를 넘을 것이다. 우리가 평화의 사람을 찾던 방법은 바뀔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이들에게 가는 주된 방법은 현관문을 두드리거나 쇼핑몰에서 대화하기 보다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가 될 것이다. 교회들은 주로 줌과 왓츠앱을 통해 화상 그룹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움츠러든다.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 중 아무도 이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이때에 가서 제자를 삼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우리가 선호했던 것들을 바꾸고 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배가 전략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일들이 건물 교회들이 박해로 인해 제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는가?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가? 실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이 혼란이 종결되고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바라고만 있는가?

3.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다

두려움이 전염되는 만큼 믿음과 희망은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새로운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지금은 제자 삼는 자들이 활기차게 사역할 수 있는 놀라운 시기이다. 영적 굶주림이 널리 퍼지며 커지고 있다. 모든 것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와 희망과 생명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진정한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비출 수 있다. 우리는 밝은 빛으로 빛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날보다 더 사실인 적이 없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과 추수 밭의 무르익음에 응답하여 가야만 한다. 그것이 온라인에 접속하는 것을 의미하든, 6피트 떨어져 있거나 전화를 통해 이웃에게 가는 것을 의미하든… 우리는 가야만 한다! 평화의 사람들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대의 도전에 일어나 정면으로 맞서라. 주님의 손이 당신을 붙드신다.

이 혼란의 시기를 계기로 제자 삼는 것과 교회의 오래된 관습을 벗어버리자. 우리가 이전에 했던 많은 것들이 어쨌든 신약성경의 관행과는 달랐다!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삶에 가지치기를 위해 어려움을 허락하라. 새로운 성장과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쫓아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전심으로 그것들을 포용하며 발걸음을 내디딘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제자를 삼는 방식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나님께서 시련을 사용하시는 것을 받아들인다.

세상은 변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이라는 책을 읽었다. 당시 나는 11학년이었고, 그 다음 해인 1985년에 학교를 졸업했다. 40년이 앞선 1949년에 쓰인 책 임에도 우리 세계가 지금 어떤 곳일지 얼마나 잘 예측하였는지 보면서 매우 놀랐다. 많은 면에서 그 예측은 맞았다. 오웰이 맞힌 한 가지는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삶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언적인 말을 하였다. 40년 후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감히 이에 대하여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래는 오늘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우리는 세상과 함께 변화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

내가 바라는 미래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제자 운동이 우리의 꿈을 넘어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당연하게 되기를 원한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교회의 성도로 살아가던 삶에서 더 나아가서 제자 삼기, 희생, 사랑, 순종의 생활방식을 포용하는 삶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

미래의 교회는 오늘날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본 교회와 훨씬 더 비슷할 것이다. 표적과 기적은 흔할 것이며, 매일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구원받는 자들을 셀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성장과 함께 박해와 큰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하게 연합될 것이다. 모든 민족과 방언과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신 그분을 경배하고 사랑할 것이다. 주로 대규모의 모임이 아닌 나무 아래, 집, 커피숍, 인터넷 채팅방, 줌과 왓츠앱, 병원 대기실, 공항과 기차역 등에서 모임들이 일어난다. 이들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일에 서로를 격려하고 그 일을 더욱 권할 것이다.

더 큰 수확과 쇄신과 그리고 제자 삼는 시기로 나아가는 데 이런 혼란들이 필요하다면, 그 혼란들이 오게 하자. 오늘과 내일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오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우리에게, 우리 도시에, 우리 지역에 그리고 미전도종족들에게 임하옵소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시며 미지의 미래를 향해 주님을 따라가는 순종적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영광을 구합니다. 아멘.”

간증

하나님이 개입하신 복된 만남들

김경희 권사

간증을 쓰려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요즘 아침 묵상 시간에 묵상했던 신명기 말씀 중 “옛날 일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중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귀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돌아오면 생명이요, 나를 떠나면 사망이요 멸망이라고 하시며 끝없이 용서를 반복하시는 하나님을 묵상 가운데 만났습니다. 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께로부터 멀리 있었고 또한 그를 찾지도 않았던 죽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고, 모두가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믿음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친구를 예비하셔서 친구를 통해 주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처음 나간 곳은 교회가 아닌 대학생들이 모인 선교단체, CCC로 알려진 대학생 선교회였습니다. 복음의 열기로 가득 찬 젊은이들이 말씀과 복음전파를 위해 훈련받고 세상으로 보내어지는 훈련소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학원 복음화가 주된 사역이었고 대학마다 소그룹을 만들어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일꾼으로 훈련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제 신앙의 기초가 세워졌고 말씀과 복음전파의 두 기둥이 제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 신앙의 출발과 과정, 그리고 끝은 말씀과 복음 전파라 생각하며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능케 한 귀한 만남들을 지금부터 소개하려 합니다. 성공한 인생에는 꼭 귀한 만남들이 있듯이 무지하고 연약한 저에게도 귀한 만남들이 있었고 그 만남들을 기억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께로 인도해 준 만남

저를 주님께로 인도했던 그 친구는 평생 고마운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이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고맙다. 넌 나의 생명의 은인이야”라는 말을 전했을 때, 친구 또한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천국에 갔을 때 저에게도 “고마웠다”라고 인사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기쁨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음을 우리 모두의 삶속에서 누렸으면 합니다.

다음의 만남은 귀한 스승이신, CCC를 처음 시작하신 김준곤 목사님이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목사님께서는 찌르면 예수 복음만 튀어나올 것 같은, 특히 대학생 복음화, 군 선교, 민족 복음화를 목숨처럼 여기며 헌신하시고 전부를 드리셨습니다. 그분의 전도의 열정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끊임없는 비전 메이커의 모습을 가까이서 뵐 수 있음이 큰 복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산 증인이셨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준 만남

또 다른 귀한 만남은 바로 제 남편입니다. 저는 CCC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여러 가지로 참 좋았습니다.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제가 부러워하는 믿음의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자란 것이 좋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족 중 홀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가족을 전도해야 할 사명이 있어 동생들을 선교회에 데리고 다녔지만, 변화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한 동생은 군대로, 한 동생은 제가 이민을 오면서 계속 돌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간절함을 잊지 않으시고 군대 갔던 동생은 믿음 좋은 아내를 만나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른 형제를 위해서는 지금도 기도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 믿는 사람들을 붙여주셨으니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남편 역시 복음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어디서든 전도하기를 힘썼고, 저 역시 함께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남편은 슈바이처처럼 살고 싶다며 의대를 지원했지만 길이 아니었는지 실패했고, 신학을 하려 했지만 “너는 마음이 여려서 상처받기 쉽다”라고 아버님이 말리셨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라도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렇게 건축설계사로 일하면서 교회 건축에 맘을 두며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받기 원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개인적으로, 또 팀으로 많은 교회 설계에 참여하여 지금도 서울이나 지방을 가면 건물들이 유작으로 남아있음을 봅니다.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가 보인 신앙인으로서의 모습들이 이제는 곁에 없어도 순간순간 생각나 좋은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때도 있습니다. 미숙아 같았던 저에게 하나님이 그를 붙여주셔서 철이 들게 도우셨음이 분명합니다.

남편은 아이들이 선교라도 다녀오면 그렇게도 기뻐했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애썼습니다. 가정 예배 드리기에 힘썼고 잠들기 전 아이들에게 성경책, 신앙 서적들을 꼭 읽어 주면서 하나님의 일꾼들로 자라기를 기도하며 소원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넓은 경험으로 세상을 보며 넓은 마음을 품기 원했습니다. 헌금 생활도 낼 수 있는 것에서 더 많게, 모든 공예배는 최선을 다해 드리기에 힘썼고, 말씀 공부는 죽을 때까지 중단할 수 없다며 진리 알기를 힘썼습니다. 문서 선교가 중요하다면서 생명의 말씀을 캐나다 전역으로 발송하는 일에 봉사자로 섬기면서 직장과 교회와 선교회 등을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또 믿음이 연약했던 시누이 부부를 여기저기 성경 공부 모임으로 인도하여 말씀의 단맛을 느끼도록 해주어 지금은 그들이 고마워합니다. 믿지 않으신 작은아버지, 어머니, 형님을 위해 만나기만 하면 복음 전하다가 조롱도 받고, 형에게 비아냥거림도 당해 속상해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습니다. 후에 그분들이 예수 믿고 형님은 장로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늘에서 큰 잔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우리 또한 그 기쁨에 동참시켜주신 주님이 한없이 좋기만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시급합니다.

캐나다에 살고 있을 때, 한 번은 교회 설계를 부탁받아 남편이 한국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마침 실직상태라 실업수당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실업수당이 끊기게 되면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져서 고심했습니다. 대비하지 못한 채 남편은 한국으로 떠났고, 옳지 않지만 실업수당을 계속 받으며 생활을 했습니다. 한 달여가 지난 후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운 직장을 나가게 되었고, 더는 실업수당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우리가 부당하게 받은 그 액수는 정부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건축 설계 후 받은 수고비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돌아와, 이제 부당하게 받은 돈은 정부에 돌려줘야 마땅하다 하니 틀린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따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이루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라며 정부에 이실직고한 후 반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자유롭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 또한 주님도 기쁘시다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0년대 초 이민교회들은 한창 건축에 힘썼던 시절이었습니다. 강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건축 헌금을 독려하곤 했습니다. 우리 교회 또한 부흥회 마지막 날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남편은 또 일을 냈습니다. 의논도 없이 당시로써는 꽤 큰 돈을 작정했습니다. 약정헌금은 약속한 시간 내에 내야 하는데 마련할 길은 없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인지 응답인지 은행에 가서 대출을 얻자고 했습니다. 허락해 주는 은행원도 의아해했지만 정한 시간에 약속을 지켰음이 기뻤고 우리 가족은 3년 동안 허리띠 졸라매며 대출도 갚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이 더 기뻤습니다.

이민 생활이란 녹록하지 않음을 모두가 경험으로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은 가진 것이 없거나 건강하지 못함이 아니라, 교회가 분열하고 성도들이 서로 싸우며 미워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평안하지 못해 성도들의 가정도 평안이 없어지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으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도지를 들고 교회 밖으로 나가 전도하며 그 시간들을 보냈던 것도 큰 은혜였습니다. 소용돌이에서 한발 물러서니 답이 보이고 미움 대신 측은한 마음을 주셔서 사랑과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음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캐나다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우리 가족은 LA로 다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LA에는 시부모님과 시동생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님께서 노년을 자식들과 함께 모여 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의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빈손일 때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경기에 집도 가게도 몽땅 버리고 처음 이민 올 때처럼 빈손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LA는 폭동 직후라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홍콩에서 일할 설계사를 찾는 곳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일 년간 홍콩에서 일한다는 계약조건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렇게 홍콩으로 떠났습니다. 남편에게서 온 첫 번째 편지에는 이곳은 우상숭배로 가득 찼고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은 쾌락과 물질을 좇아가기에 혈안이 되어있으며, 아침 출근길에는 그들이 우상 앞에 피운 향내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어 너무나 안타깝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선교를 하기 위해 기회를 기다리는 많은 한국 선교사님들이 머물고 있다는 것과 본인도 교회에서 만난 선교사를 따라 전도를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수 없는 영혼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그는 그곳에서 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LA가 아닌 주님 계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남편은 찬송가의 마지막 절에 밑줄을 긋고 좋아했는데, 아마도 주님이 부르실 날이 가까우니 천국 소망 품으라고 미리 계시해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편은 그리도 소망하는 하늘나라로, 주님 곁으로 그렇게 홀연히 떠났습니다.

이제 남겨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가까이서 남편이 보여줬던 많은 본을 생각하고 기억하면 대충 살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기도의 삶으로 인도해 준 만남

김성간 목사, 서군자 권사, 필자, 김진영 선교사

저에게는 또한 SWM 선교회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이슬람권, 특히 터키를 선교하며 기도하는 그곳에서 저는 중보기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곳은 저에게 기도를 배울 수 있게 한 현장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대학원을 졸업할 때 즈음 함께 가족여행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여러 지역을 놓고 생각을 해봐도 선뜻 마음이 내키는 곳이 없어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김진영 선교사님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터키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선교하고 계셨는데, 선교사의 신분으로 그 땅에 체류하기가 어렵고 까다로워서 소속된 선교회의 방침으로 여행사를 운영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신다는 선교 보고를 우리 교회에서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오셔서 그 땅을 밟고 기도해 주시라”라는 초청의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우리 터키에 가자” 했더니, 인도하심인지 아이들도 군소리 없이 찬성해 주었습니다.

저는 베델교회 팀과 함께 한 번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멀고도 낯선 땅 터키를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께서 직접 인도하시며 일곱교회들을 둘러보고 기도하는 비전 트립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선교사님이 들려주시는 간절한 메시지는 감동으로 마음에 박혔고 우리의 기도 또한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물어진 교회 터 위에 나뒹굴고 있는 부서진 기둥들에 마음이 아팠고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모습들을 주님도 보시며 아파하실 것 같아 그 백성들을 품고 기도하겠다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으로 SWM 선교회에서 15년을 중보기도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2010년의 에베소 연합중보기도모임은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어둡고 캄캄하기만 한 그 땅에서 세계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기도자들이 전심으로 그 땅의 회복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던 그 현장은 지금도 감격스럽습니다. 많은 박해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그 한 사람의 비전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큰일을 이루심을 보았습니다. 누구도 뚫지 못할 것 같던 그 땅에 문을 여시고,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던 그 땅과 백성들, 두려워만 했고 구원에서 오히려 제외시켰던 이스마엘 자손들을 주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2014 흑해 지역 전도팀

2014년에는 뷰육아다섬 사역에 참여했습니다. 뷰육아다섬 정상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이뤄진다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인 그날섬으로 몰려와 기도하며 소원을 비는 날입니다. 이날은 일 년에 한 번 합법적으로 전도하며 기도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누구의 기도도 상관하지 않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자에게로 몰려오는 수많은 영혼들, 자신들의 행복과 안전과 번영을 위해 구하지만, 해결자이신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저희는 기도했습니다. 그날 기도 받았던 영혼들이 실제로 복음의 관심자나 회심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통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섬 전도 후에는 6명이 한 조를 이루어 흑해 지역으로 전도 여행도 참여했습니다. 현지 사역자 두 분이 동행해주어서 무척이나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은 성령님의 전적인 사역임을 가는 곳곳에서 체험한 귀한 사역이었습니다.

흑해 지역은 터키에서도 민족정신이 강하고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이라는 말도 있어 내심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삼순에 도착하여 현지 선교사님의 안내로 오르한 목사님과 섬기시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많은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시는 그의 열정에 그저 주님께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척박한 그 땅 가운데 우뚝 선 십자가를 보니 주님을 만난 듯 감격스러웠습니다.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한 후 시내로 나가 흩어져 2인 1조가 되어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말을 못하는데 어찌해야 하나 두렵고 망설여졌지만, 옆에 붙여주신 동역자가 힘이 되어 만나는 사람에게 손짓 발짓 표정 모두 동원해 하다보니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도 손짓 발짓, 우리도 손짓 발짓 서로 쳐다보고 웃고 하다보니 벽도 허물어졌습니다. 간간히 알 수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도 울고 웃으며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발 이 영혼을 구원해 주세요”라고 성령님께 맡겨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오신 선교사님의 차가 구원의 방주처럼 반갑고 좋아 뛰어가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혼에 대한안타까운 마음만이 앞서 이제는 쫓아가서 복음 팔찌를 주며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라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전하다가 경찰에게 억류당해 몇 시간 동안 심문을 당하기도 했고, 복음을 전한 이의 집에 초대되어 차를 마시고 전통춤을 배우며 마당을 돌기도 했습니다. 산 정상에 가는 길에 태워준다고 하여 조그마한 차에 6~7명이 터질 듯이 끼어 가기도 했습니다.

목요 중보기도팀들과

지역명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통학 버스를 운전하던 할아버지는 건강하신지, 빵집 아저씨와 그 가족들, 긴 시간 일대 일로, 혹은 그룹으로 복음을 전한 그 청년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히잡 쓴 대학생 아가씨들, 산꼭대기에서 차 밭을 가꾸며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변화되셨는지... 멀리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처럼 그리움으로 떠올리게 되는 영혼들입니다. 지금은 난민들을 통해 그 땅을 변화시키는 많은 일들, 그들이 세운 가정교회들, 이 모든 역사는 우리의 작은 기도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룬 귀한 열매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예전에는 기도에 힘쓰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SWM 선교회를 통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씀과 전도라는 두 기둥에 기도를 붙여 주셔서 삼겹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삼각 다리가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설 수 있듯이 약한 믿음의 다리를 든든하게 세워준 고마운 만남이었습니다.

이제 육신은 날마다 후패해 가지만 기도의 열정은 독수리가 되어 하늘 보좌까지 날고 싶습니다. 개인의 작은 이야기이지만, 제게 허락하신 만남들에 감사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복된 만남이 되리라 믿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간증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SWM 선교회 이야기

글: 이은옥 선교사

터키를 마음에 품고

2005년 10월 성지순례팀

저는 오랜 시간 LA 미주복음방송국에서 “새롭게 하소서”라는 간증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사역했었습니다. 그때 만난 게스트 중에 이백호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사도 바울의 1, 2, 3차 전도 여행지를 몇 년에 걸쳐 방문하는 장기 계획을 세우셨고, 1997년에 방문한 사도 바울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았던 터키의 루스드라, 더베 지역을 돌아보던 중, 더베 읍장 집에서 머물면서 읍장의 안내로 동네 뒷산에 올라가게 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경배했던 사건 (행 14:8-15)이 나옵니다. 이 목사님이 더베 읍장의 안내로 높은 뒷산에 올랐을 때 그곳에서 제우스 신전 터를 발견했다는 놀라운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성령께서 작은 소원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코냐)을 꼭 직접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소원을 품은 지 8년 만인 2005년에 터키 땅을 직접 밟게 되었습니다.

2005년 4월, 미국 C&MA 교단의 터키 선교사 팀이 장기적인 선교전략을 가지고 킹덤비즈니스 Generations of Adventure 여행사 (이하 GOA 여행사)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이 여행사의 책임자였던 김진영 선교사는 미국에서 동역자들을 모아 터키를 방문하는 비전트립 팀을 동원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동원 사역을 돕기 위해 그해 10월, 40명을 목표로 비전트립 팀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교회들을 방문하고 신문사와 크리스천 방송을 통해 홍보하였습니다. 목표인 40명을 동원하려고 애를 썼지만, 12명이 참가 신청을 했고 최종으로는 7명만이 비전트립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팀은 GOA 여행사 운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매우 작은 팀이었습니다.

이백호 목사님께서는 터키를 방문하기 전에 사도행전, 골로새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초대교회의 요람인 터키가 왜 무너졌는지 알기 위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꼭 읽고 갈 것을 권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미리 공부하고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시록의 일곱 교회와 사도 바울의 여정을 돌아보았습니다.

은혜와 소망의 터키 비전트립

빌라델비아 교회 세 기둥

비전트립 팀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인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 그리고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특별히 은혜를 받은 곳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세 개의 교회 기둥이 남아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는 말씀이 떠올라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난했지만 주위의 약 360개 가정 교회의 성찬용 포도주를 공급하며 섬겼다는 김진영 선교사님의 설명을 들었는데, 현장에서 건포도를 팔고 있는 터키 여인들과 지금도 포도밭이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더 은혜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십자가

라오디게아에서는 넓은 도시 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로 공급되는 로마식 공중 상수도 시설을 볼 수 있었고, 각 집으로 연결되는 상수도 단면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단면도에서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공급되는 큰 관과 골로새의 시원한 식수가 공급되는 작은 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 말씀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하셨는데 라오디게아에 가서 보니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온천수처럼 뜨거우면 목욕을 할 수 있고, 골로새의 찬 물은 식수로 쓸 수 있지만, 온천수와 식수가 섞여 미지근하면 안 된다고 하신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배경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나니, 말씀의 영적인 교훈이 분명하게 깨달아졌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커다란 유대인 회당 터가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되었습니다.

터키의 기독교 성지들을 방문하면서 부서지고 나뒹구는 십자가 돌 조각들을 보게 되었는데, 무너진 교회들을 생각하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대 위임령에 순종하지 않은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요람인 터키에 와 보니 예루살렘 교회처럼 초대교회들도 흩으시고 그 촛대를 옮기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일어나고 부흥했던 이 땅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순례하는 내내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모임과 SWM 선교회의 시작

2005년 10월에 터키를 방문하고 돌아온 우리 팀은 11월 중순경에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함께 모여 기도회를 시작하자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처음에 7명이 함께 시작했지만, 그중 4명이 매주 모여 터키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장소가 없어서 고민하던 중, 한 권사님의 자녀가 집을 오픈해 주어서 매주 화요일 오후 3시에 기도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SWM 선교회 중보기도모임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터키 GOA 여행사를 돕기 위해 2005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GOA 여행사를 설립해서 돕고 있었습니다. 영리 목적의 여행사가 아니라 오로지 터키 선교를 돕기 위해서 만든 여행사였습니다. 저는 현장 선교사는 아니지만 중보기도자들을 모으는 사역에 헌신하면서 GOA여행사는 터키와 미국에서 함께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터키의 김진영 선교사와 김은경 선교사를 돕는 개인들과 교회들이 미국 GOA 여행사로 헌금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GOA 여행사는 비영리 단체로 등록된 사역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교헌금의 재정 투명성을 위해 선교회를 별도로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SWM 선교회 (Silk Wave Mission)가 시작된 동기였습니다. SWM 선교회는 어떤 사역적인 목적을 세우지 않았고, 다만 터키 GOA 여행사를 통해 터키와 이슬람권의 영적회복과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자를 세우는 일이 목적이었습니다. 2006년 1월 SWM 선교회가 캘리포니아주에 등록이 되었고 세금혜택을 줄 수 있는 비영리단체 501(C)(3)로 IRS에 등록되었습니다. 이 사역을 돕기 원하는 평신도 동역자들이 이사회를 구성해서 SWM 선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초대 이사장은 서동민 장로님께서 맡아 2006년 부터 2009년까지 헌신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사역을 시작한 2005년에는 사역의 초창기라 재정적인 지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문에 저의 남은 삶을 이 사역에 헌신할 수 있을지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러 다른 단체에서 사역을 제안해 왔고 또 다른 좋은 직업의 기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 위로 $표시가 있는 돈다발들이 가득 채워진 트럭이 하늘에서 쏜살같이 내려오면서 사무실 위로 쏟아붓는 환상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는 사역을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말고 이 사역을 열심히 도우라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지금까지 저의 개인적인 환경이나 재정적인 상황을 보지 않고 이 사역에 올인하여 달려오게 만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사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후 SWM 선교회 사역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해 주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첫 번째 연합중보기도회

아스펜도스 단체사진

2005년 미국을 방문하신 박은조 목사님 (당시 분당샘물교회, 한국복음주의목회자 협의회 회장)께 제가 하고 있는 사역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5월에 한국복음주의 목회자 협의회팀이 GOA 여행사를 통해 터키 비전트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전트립을 인도한 김진영 선교사는 초대교회의 요람이었던 터키가 황폐해진 것에 안타까워하면서 이 땅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박은조 목사님과 함께 오신 목회자들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앞서 터키 사역자들이 먼저 연합하고 기도하면, 사역자들의 파송교회와 후원교회들이 함께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겠습니까? 연합해서 기도하시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격려했습니다.

김진영 선교사는 2006년 6월부터 이것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한인 사역자들의 모임에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각각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많은 토론이 있었고, 연합하여 기도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역자들이 자원봉사자로 섬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이 터키 연합중보기도회 (이하 연중회)의 시작이었습니다. 2007년 2월 터키 안탈리아 (성경의 앗달리아)에서 한인 사역자 가족들과 외부 기도자들 총 286명이 모여 제1회 터키 연합중보기도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의 강사로 박은조 목사님과 한국 복음주의 연합회 목사님들이 참가하셨고 미국에서는 고 손인식 목사님이 참가하셨습니다.

안탈리아 연중회는 첫 예배부터 부흥한국팀 (고형원 대표)이 인도하는 찬양을 통해 성령의 은혜가 부어졌고, 터키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각자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회개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4박 5일로 모인이 기도회 일정 중에는 아스펜도스에서의 예배가 있었습니다. 아스펜도스 방문을 제안해 주신 분은 바로 이백호 목사님이셨습니다. 안탈리아에서 차로 45분 거리의 버가에 있는 야외 대극장 아스펜도스에서 554년 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집회를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허가를 약속한 당일에도 정부의 승인이 나지 않았고, 심지어 밤새 심한 천둥과 번개가 치고 폭우가 계속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빗속에서라도 아스펜도스에 가서 예배드리자’고 모든 분이 동의하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터키 정부에서 승인 허가 팩스가 도착했습니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임시로 준비한 노란색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어 임시 비옷으로 입고, 여섯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아스펜도스로 향했습니다. 때마침 비는 서서히 멈추고 있었습니다. “Glory Glory Halleluja”, “문들아 머리 들어라” 찬양을 부르면서 부흥한국팀의 인도를 따라 기쁘게 아스펜도스 대극장 안으로 행진하였습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사역자들을 향해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 현장에 서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황금마차를 한쪽에 세워놓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회유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면서 순교를 택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에 저항하기 위해 총과 칼로 무장하고 군대를 조직하지 않은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이 땅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우리를 순교의 제물로 드릴 것을 이 자리에서 순교한 초대교회 성도들 앞에서 결심합시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사역자들은 눈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간구했습니다.

2007년 연중회가 끝난 3월 2일에서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18일, 터키 동남부 말라티아에서 틸만 선교사와 터키인 네자티 목사, 우르 형제가 터키 민족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청년 다섯 명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터키 기독교 공동체에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고, 터키인들도 이런 사건이 터키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순교 사건이 일어난 4월 18일에 터키 비전트립 팀이 이스탄불에 도착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비전트립을 계속 진행해야 할지 멈춰야 할지를 기도했는데 팀 모두가 믿음으로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공포 속에 있던 터키의 기독교 공동체 성도들은 시편 116편 15절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말씀을 성령께서 터키 교회에 주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받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들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들은 TV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감수하며 믿음의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말라티아 사건 이후, 대부분의 사역 단체는 말라티아의 외국인 사역자들을 소환하였고 말라티아 터키인 성도들은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틸만 선교사의 미망인 수산나 선교사와 세 자녀는 그곳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2007년 5월 팀과 사라 사역자 가정이 이스탄불에서 말라티아로 이사하면서 말라티아 교회와 수산나 선교사 가정을 돕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13년 동안 동역하고 있습니다. 말라티아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고 주변의 도시에 교회를 세우는 관문교회 (Gate Church)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2007년은 터키 선교에서 특별한 해였습니다. 2007년 터키 연중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주신 박은조 목사님이 섬기는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이 2007년 7월 19일 아프간에서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어 두 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순교를 다짐한 터키 선교사들의 기도가 아프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셨던 박은조 목사님이 섬기는 분당샘물교회는 이후 거의 10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 기독교 공동체는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엄청난 반대를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연중회는 계속됩니다

2010 에베소 연중회
2012년 연중회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터키 연중회는 매해 계속되었고 2009년부터는 터키교회 지도자들이 연중회에 참여했습니다. 2010년 5월 에베소 연중회는 국제적인 기도모임으로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에서 1,200명이 그리고 터키 기독교 공동체에서 700명이 참여하여 터키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권의 영적돌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연합해 기도했습니다. 이 에베소 기도회에서 김승욱 목사 (할렐루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터키의 왕이신 것을 선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터키 전역에서 에베소에 모인 터키 성도들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을 처음 본 것에 놀라며 감격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2010년 에베소 연중회 이후에, 터키 교회 지도자들은 터키 교회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고 간증했습니다. 첫째, 터키 성도들 가운데 두려움이 없어진 것과 둘째, 터키 교회가 공개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숨겨왔던 성도들이 성탄절에 가족들을 교회로 초청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터키 교회가 전단을 만들어 길거리로 나가 집회에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영적 변화가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생긴 것은 터키의 영적 영역에서 돌파가 일어 난 것이라고 터키 교회 지도자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2010년 에베소 사역을 돌아보면서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2009년에 미국에서 에베소 연중회를 준비하는 한 작은 모임에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한 목사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셨는데, 저를 위해 기도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이 사역의 숨겨놓은 자로 너를 사용하고 있다. 네가 사역을 하는 동안에 다섯 나라의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터키 동남부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는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기도를 듣고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2012년 앙카라 연중회도 참 특별한 기도회였습니다. 주강사로 오신 존 D. 롭 선교사 (국제기도네트워크 대표)는 기도회 마지막 시간에 각 인종을 대표하는 사역자들을 초청했는데, 터키인들과 쿠르드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 등 터키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교회 지도자 수십 명이 앞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존 롭 선교사는 터키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저질러졌던 수 많은 피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 터키의 영적 돌파와 부흥이 올 것이라고 메시지를 전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정에 없었던 터키의 젊은 목사가 먼저 회개하면서 터키의 소수민족 지도자들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경험하고도 터키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아르메니아 사역자에게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남자 지도자들은 여성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회개하며 사과했습니다. 그 시간 놀라운 성령의 운행하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모두가 회개하며 터키의 피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씻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터키 교회가 중심이 된 갑바도기아 연중회

2016년 5월에 열린 갑바도기아 연중회는 터키 교회가 중심이 되어 준비하고 진행하였습니다. SWM 선교회는 외부의 동역자로서 재정과 외부동원을 담당하면서 이 기도회를 섬겼습니다. 2016년은 터키와 PKK (쿠르드 노동자당)와의 갈등이 심했는데, 터키 중동부 지역에서는 터키 군대와 PKK 게릴라와의 전쟁이 내란 수준이어서 이동이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바도기아 연중회 전에 약 12개의 아웃리치 팀으로 나누어 이집트, 쿠르디스탄과 터키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 및 사역자들과 동역하였습니다. 갑바도기아 연중회는 낮에는 언어권별로 나눠서 진행하고 저녁에는 연합기도회로 모였습니다. 터키 성도들이 가장 많이 참가했기 때문에 제일 큰 모임 장소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터키 교회에 큰 자부심과 기도운동에 대한 오너십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각 언어권으로 진행된 사역들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성령께서 교회를 강하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갑바도기아 지역에 수많은 이라크 난민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그 지역 사역자들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SWM 선교회는 터키교회의 요청에 따라 2014년 가을부터 난민사역을 돕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난민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사역의 문을 열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갑바도기아 연중회를 마치고 약 2개월 후인 2016년 7월 15일에 터키 군인들이 중심이 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터키 정치권은 얼어붙었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계엄상태를 선포하면서 많은 일들 (언론 탄압, 앤드류 브론슨 목사 구속, 미국과의 관계 악화, 미국 사역자들 추방 등)이 일어났습니다.

아웃리치 사역의 은혜

2016 카르스팀, ANI (아니) 성채 단체사진
최초로 세워진 이슬람 대학 흔적

2016년 저는 아웃리치 팀으로 터키 동부의 교회가 없는 지역을 방문하였는데 카르스, 아르다한과 국경도시 포소프, ANI 성채 (이전 아르메니아 땅), 에르주름, 에르진잔 그리고 시바스를 방문하였습니다. 내전의 위험이 있는 터키의 위험 지역이었지만, 오히려 터키를 방문해 준 외국인들을 환영하고 군인들은 우리 팀을 보호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카르스는 당시 많은 사역자들과 단체에서 교회를 세우려고 애를 썼지만, 너무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우리 팀은 카르스 칼레 (높은 성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5월이었지만 산악지대여서 날씨는 무척 추웠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간절히 그 땅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곳에 교회가 세워질 것을 저희 기도팀에게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고 그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2년 후 2018년에 터키인에 의해 카르스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터키인 사역자는 현재 SWM 선교회의 교회개척자로 동역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2011년 4월 동부 순례 아크다말 섬 예배+기도 (www.silkwavemission.com/faithtrip/index.php

저는 흑해 지역 아웃리치 사역에 7년간 (2013-2019) 참여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리제에서 50년 이상 차 밭농사를 해온 부부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 부부는 매년 흑해 지역을 갈 때마다 방문하는 우리를 위해 직접 재배한 차를 손수 끓여 향긋한 터키 차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우리 팀은 다리가 아프신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드리곤 했습니다. 방문한 지 6년째인 2018년에는 기도하며 준비한 터키 성경책을 받아주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한번은 흑해 삼순의 아타투르크 광장에서 팀을 나누어 전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저희 옆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며 자신이 폐암 환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주기 원하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좋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분 몸에 손을 대고 간절히 기도해주고 삼순 교회에서 준 터키어 전도 책자와 오르한 목사님의 책과 명함을 전해주었습니다. 계속 기도를 받기 원하면 삼순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이 자매가 치유받기를 기도합니다.

동부기도순례 하란
리제 차밭 부부
폐암환자 기도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들

2011년부터 시리아 난민들이 터키로 물밀 듯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에서 무슬림 난민들이 터키로 왔고, 그 중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난 성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터키 정부는 이 난민들을 터키 전역에 흩어 놓았습니다. 흩어진 난민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알려지면서 터키 교회와 사역자들이 이들을 돕는 교회개척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SWM 선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난민들을 통해 교회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을 보면서 2018년 1월부터 터키와 중동에서 교회개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터키인 성도들과 난민 성도들 가운데 교회개척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세워가는 새로운 교회개척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외국인 사역자를 세우고 훈련해 언어와 문화 적응훈련을 하고 현지 사역자를 세우려면 많은 시간과 재정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성십자가교회

2009년에 성령님께서 한 사역자를 통해 터키 동남부,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고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터키와 중동에서 무슬림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를 목격하며 놀라게 됩니다. 당시 저는 아르메니아를 말씀하셨을 때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통해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원수의 나라가 된 것을 안 후, 터키의 영적 회복의 열쇠가 아르메니아와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4년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터키는 아르메니아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원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의 여러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건물이었던 터키 동부 반 (Van) 호수의 아크다말 섬에 세워진 수룹하치 교회 (성 십자가 교회)를 복원하고 십자가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2010년 9월에 수룹하치 교회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전 세계 아르메니아 성도들 약 3,000명이 모여 예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SWM 선교회는 2011년 4월에 동부 순례팀을 구성하여 구약의 성지들을 돌아보고, 부활절에 수룹하치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을 하고 터키에서 열방을 축복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스펜도스 야외 극장

2019년에 아르메니아 사역자 한 분이 SWM 선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사역자는 아르메니아 청년들을 인도하여 터키 북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원수 나라인 터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던 아르메니아 청년 성도들을 인도해서 터키 북부 도시를 방문하여 거리에서 음악 공연도 하고 아르메니아 전통 춤을 추면 터키인들이 모여들고 교제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중에 어떤 터키인들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는데, 가보면 자신들의 뿌리가 아르메니아인 (헴신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환대하며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을 경험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터키 동부를 방문하며 복음을 전한 아르메니아 단기선교팀은 이미 터키 동부에 와서 사역하고 있는 다른 아르메니안 사역자 두 가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개신교회에서 파송한 사역자들로 현재 SWM 선교회가 지원하는 교회개척자입니다. 이 아르메니아 사역자들은 터키에서 가장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터키 동부와 터키 북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특별 병기입니다. 2012 앙카라 연중회에서 민족 간의 화해와 용서를 위한 기도 시간이 있었는데, 6년이 지난 2018년에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복음의 행진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물 떠온 하인이 되어

저는 2005년부터 터키와 이슬람권의 영적 돌파와 부흥을 위해 드린 여러 동역 교회와 동역자들의 기도의 향기가 계속해서 타올라 금향로에 가득 찰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더 고통받고 힘들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비록 동역 교회들이 그 땅을 방문하지 못하고 교회 개척자 수양회도 갖지 못했지만, 오히려 온라인 수양회를 통해 좋은 강사님들을 모실 수 있었고 더 많은 교회개척자들이 참여하여 질적으로 더 좋은 훈련을 받게 되어 기뻤습니다. 세상은 바이러스로 묶여 있지만 복음은 매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강력하게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터키어, 아랍어 그리고 이란어, 아프간어로 인터넷을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있고 많은 복음관심자들이 무슬림들 가운데 생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터키의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고 외국인 사역자들을 추방하는 터키 정부는 이슬람화를 가속화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2018년 1월, 27유닛으로 시작한 SWM 교회개척운동은 2020년 연말 현재 50유닛으로 늘어났고, 터키와 이집트, 시리아에 교회가 계속 개척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터키와 이란, 아르메니아 그리고 시리아, 이집트와 쿠르디스탄에 최소 10유닛의 교회개척자들이 세워지리라 기대합니다.

2023년은 터키공화국이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SWM 선교회는 2007년 첫 안탈리아 연중회 동안 아스펜도스 야외극장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2007년 이후 16년 만인 2023년에 다시 아스펜도스에 모여 하나님께 영광드리기를 원합니다. 터키 교회와 터키의 여러 민족 교회들이 주관하는 이 모임에 터키와 이슬람권의 영적 회복과 대추수를 위해 동역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참여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임을 통해 터키와 중동에 진정한 대추수가 일어나고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열방 가운데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2005년부터 미국 본부 사역자로 일하면서 매해 터키와 이집트 등의 현장을 방문하여 연합중보기도회를 섬기고 아웃리치 사역에 참여하는 축복의 기회를 누렸습니다. 터키와 이슬람권을 위해 기도하는 동역자들과 재정 후원자들과 소통하면서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리고 연결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물 떠온 하인들만이 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SWM 선교회 매거진 “금향로가 차기까지”를 통해 이 시간 여러분과 나누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제가 이 사역에 쓰임 받으며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들을 경험하고 동역하는 것이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 사역의 숨겨진 자로 부족한 저를 사용하시는 주님께 영광 돌리며 남은 시간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물 떠온 하인의 삶을 성실히 살고 싶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케빈의 성경이야기

- 첫 번째 여정 -사울이었던 바울입니다

권강혁 사역자

'케빈의 이야기로 여는 성경'은 성경의 내용을 저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을 가까이 대하듯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상상하며 읽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바울 시대의 역사적 배경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 등장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는 로마 제정시대의 기초를 구축했다. 비록 그의 독재적 권력에 반기를 든 자들에 의해 암살되었지만, 그의 부하 장군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반란은 제압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부를,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부를 양분해서 통치하였으나 한 제국에 두 명의 황제는 존재(1) 할 수 없었기에 양대 세력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악티움 전투 에서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였고, 원로원의 추대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의 황제가되었다.

악티움 전투 (사진: wiki)

이때 정치력과 처세술이 남달랐던 헤롯 안티파스 2세의 둘째 아들 헤롯은, 처음에 월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즉각 달려가 자신이 안토니우스의 친구였음을 인정하고,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 이상으로 앞으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어차피 유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헤롯이 필요했던 터라 헤롯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신임해 주었다.

집정관이자 삼두정치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로마 시대 흉상, 바티칸 박물관
복원된 젊은 옥타비아누스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기원전 30년경 작)

사실 헤롯 가문은 에돔 족속의 후손이었고, 헤롯의 어머니 또한 아람인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유대인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유대의 왕이 된 것이다. 이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을 시작했으나, 공사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오히려 원성을 듣기도 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충성과 감사의 표시로 갈멜산 남쪽의 대해 (지중해) 연안에 항구도시를 새로 건설하였고,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 (시저)라 지어 헌정하였다. 나는 이 가이사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다소로 온 것이다.

로마제국의 각 자치구를 연결하는 도로 및 항만 공사는 지금의 황제인 클라우디우스가 더욱 박차를 가했고, 로마의 총독부가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모두 다 연결되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제국의 가장 큰 도시였던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의 동방 거점 도시였다. 처음 도시가 건설될 때 마게도니아, 헬라, 로마, 수리아, 유대 등등의 지역에서 인부들을 동원하여 동방과 서방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문화, 다민족의 사회가 이루어졌다. 수리아 안디옥은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는 아니었으나 대해의 실루기아 항구까지 육로로 하루면 이동이 가능했고, 대해까지 연결되는 오론테스 강에 배를 띄워 물품 교역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믿는 자들이 대도시였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많이 몰려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안디옥에서 내가 살고 있는 다소까지는 배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데, 로마가 연결해 놓은 도로와 항구를 이용해서 이틀이면 올 수 있다.

다소에서 보낸 10여 년 동안 나는 성경과 조상들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관해서 생각했다. 기다림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를 다스림으로 어떻게 경륜하시는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 전쟁 및 여러 징조들로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보여주시고 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어리석어 목자 없는 양같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생들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사 반드시 회복시키려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셨다. 또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모든 민족과 만물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렇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 세상이 핑계할 수 없도록 가장 확실한 길을 주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안디옥에서의 바울

바나바와의 해후는 그동안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부르심의 시작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찾아 다소의 여기저기를 헤맸던 바나바는 10년 전에 만났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인자한 얼굴이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내 모습을 본 바나바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가움을 표시해 주었다. 아마도 그의 기억 속에 있던 혈기왕성한 젊은 사울에서 달라진 모습에 웃음을 보인 것 같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안디옥 곳곳에는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한 유대인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귀를 열어 생명의 도를 듣기 원하는 수많은 이방인이 있다고 했다. 안디옥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도 있고,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제자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한마음과 한 뜻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들을 고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 바나바는 그들의 삶이 안디옥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며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5:1)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마지막 때의 일이 시작되었다면서 기쁨으로 증거해 주었다. 또한 안디옥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몇 가지 어려움을 나누어 주었다. 그중 하나는 유대인 믿음의 형제들 대부분이 아람어만 사용해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르게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경을 풀어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이미 오신그리스도의 삶과 행적, 그리고 고난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의미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들의 말과 언어로 증거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 중에서 이 일을 감당할 이를 찾기 어려워서 아람어를 할 수 있는 이방인을 통역으로 세워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부흥의 소식과 어려움을 듣고는 너그러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신실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부탁한 것이었다.

바나나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려 했지만, 도시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커서 유대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먼저 가르치는 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열 명씩 스무 명씩 사는 구역별로 모임을 만들고, 같은 구역 안에서도 언어권에 따라 모임들을 따로 세워나가면서 제자들을 양육하는 체계는 잡혀갔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성경에 비추어 증거할 수 있는 교사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었다.(2) 그러던 중에 길리기아 지역에서 온 한 사람이 안디옥 외곽의 아고라 광장에서 바나바가 여러 사람에게 예수님에 관해서 증거하는 것을 듣고는 ‘당신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바나바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그 사람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고 ‘다소에 사는 사울’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 날 바나바는 안디옥 여러 지역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사울의 회심에 관해서 설명하고 본인이 그 일의 증인임을 말했다. 그리고 학식이 풍부한 사울을 데려와서 함께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을 위해서 몇 날을 함께 기도한 후에, 유대문화뿐만 아니라 로마와 헬라의 문화까지 익숙한 사울을 안디옥의 교사로 세우기로 결의하고 바나바가 직접 나를 찾아 이곳 다소까지 온 것이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하다

나는 10여 년 전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에게 내가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일 등을 대변해준 바나바의 손을 잡고, 그동안 정들었던 이웃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다소의 제자들이 말씀에 더욱 굳게 서기를 격려한 후에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왔다. 동쪽에는 실피우스 산이 우뚝 서 있고 서쪽에는 오론테스 강이 흐르는 안디옥에 들어서 헬라 양식과 로마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서 이 도시가 왜 ‘동방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벨론 종교

이곳에 처음 들어온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우고 안식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삶(3)의 모습은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다. 니므롯 이후에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시작된 바벨론 종교는 세상 신들을 만들어냈고, 형상을 지어서 경배하고, 때로는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철저하게 두려움으로 인한 행위론적 형식이 일반화된 종교였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대인들은 회당에 아무런 형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 또한 이방인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종교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의 종교에 호감을 느낀 많은 이방인이 자연스럽게 회당의 안식일 모임에 참석을 원했지만, 할례와 음식의 장벽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믿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에 핍박을 피해 몰려든 믿는 유대인들은 마치 난민처럼 도시 외곽의 여기저기에 부락을 형성하고 회당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보다 복음에 훨씬 더 뜨겁게 반응하는 이방인 회심의 역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 바로 안디옥이었던 것이다.

내가 다소에 머무르는 동안 계속해서 고민했던 주제 중의 하나는 회심에 관한 것이었다. 모세의 글과 선지서의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대하 30:6)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욥 6:29)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사 55: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렘 3:14)

범죄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기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권역사였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이 모든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유대인들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단순하게 절기와 제사와 삶의 자세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요엘 선지자는 ‘돌아오라’는 말씀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요 올바른 회심에 관한 말씀이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3)

해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등을 지켜 제사를 지내며 회개를 부르짖었지만 진정한 회심의 역사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기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께서는 통렬하게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종교 생활을 꾸짖으셨으며,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을 찾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6-18)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아브라함만을 위함도 아니요, 그의 후손들을 위함만도 아니요, 모든 족속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이는 모세를 택하신 것과 일맥상통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으며, 단순하게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그들의 회개는 늘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 먼저 회심의 기회를 주셨고, 또한 알지 못하고 살던 시대에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로 회개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주신 것이다.

바나바는 도시의 장로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고, 잠시 숨돌릴 틈도 없이 도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여러 모양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형제들을 소개해 주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날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던 구레네 사람 시므온은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에서 하람(4)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인자하고 마음이 따뜻한 그의 부인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직 사랑만을 보여주는 귀한 섬김의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 또한 시므온의 부인에게서 마치 어머니가 아들에게 베푸는 것과 같은 한없는 사랑을 받았다. 시므온의 아들인 루포와 알렉산더도 순박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시므온과 함께 구레네로부터 온 루기오는 헬라어에 능통한 자로 여러 이방 형제들에게 위로를 주는 귀한 선생이라고 바나바가 소개해 주었다. 또 헤롯의 젖동생으로 복음을 듣고 공동체에 입교한 마나엔 같이 특별한 이력을 가진 자도 만나게 되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여러 이방인 형제들과도 만났는데, 그중에 특별히 열정적이고 수려한 용모의 이그나티우스(5)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은 헬라인으로서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어렸을 때는 잠시 예루살렘에서 거주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미 안디옥 도시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섬기고 있던 여러 장로와 교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내게는 이방인 공동체가 거주하는 지역을 돌보도록 부탁하였다. 주님께서 남기신 말씀들을 상고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는 안디옥의 교회들을 지켜보면서, 내게 주어진 책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순종하도록 교회들을 섬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은 이방인 형제들에게 그들의 말과 언어로 성경을 풀어 설명하면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증거되기를 간절히 구하고 구하였다.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나는 히브리인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기록된 말씀으로 증거했다. 점점 더 많은 무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수에 더해지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믿지 않는 많은 자는 우리 공동체를 칭송하며 ‘그리스도인’의 무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6)

바나바와 함께 칠십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보내심을 받았던 아가보라는 형제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다. 얼마 전에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는 소식에 안디옥 공동체가 모두 슬퍼하였지만, 또한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가 천사가 친히 옥에서 이끌어내어 자유롭게 했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았다.

후에 아가보가 레반트(6) 지역의 흉년을 근심하면서 장차 아주 큰 기근(7)이 찾아올 것을 예언했다. 실제로 비가 내릴 때 내리지 않고, 더위와 추위 등 기후의 변화가 불규칙해 농작물의 작황이 좋지 않아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 넓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소아시아, 밤빌리아, 갈라디아, 길리기아 등의 지역은 천혜의 환경으로 사시사철 야채와 과일, 밀 등의 농작물이 풍부하였고, 목축 또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어 육류의 수급에도 문제가 없었다. 안디옥은 대도시의 이점으로 이런 지역에서 들어오는 풍부한 식료품들로 인해 먹고 사는 것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없는 곳이었다. 기근에 대한 근심이 깊어지면서 도시의 장로들은 여러 교사와 더불어 논의를 한 끝에 유대지역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 및 형제들을 위해서 부조를 하기로 결의하고 안디옥 각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각각 힘껏 모금하여 상당한 금액을 모았다. 다양한 형태로 모금된 물품들을 널리 통용되는 달란트 화폐로 교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바나바와 내가 그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배편이 적당하지 않아 약 보름 정도를 걸어서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니,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이 시작되어 벌레들이 헤롯을 먹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헤롯이 어떻게 죽었던지 예루살렘 교회는 그가 사도였던 야고보를 죽이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한 행위에 관한 징벌로 주님의 사자가 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헤롯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친유대적인 정치 활동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은 같은 뿌리를 내려야 할 동족들이 서로 반목하고 참된 진리를 거부하도록 하는 실상 사단의 일인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안디옥 교회의 부조를 전달하고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 및 교회들과 교제를 한 후에 우리는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라 하는 요한과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공동체로 들어오면서 우리 모든 교사는 밤낮으로 쉴 새 없이 가르치고 돌보는 일로 더욱 바빠지고 있었다. 로마의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 복음을 믿는 무리에게 성령이 역사하면서 이 복음을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할 것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것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지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방인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안디옥 교회가 이 부담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금식하며 주님께 묻기로 결의하였다.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바나바와 나를 세우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복음이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것임을 알기에 바나바와 나는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이 여정에 동참할 신실한 몇 명의 형제들을 불러모았다.

일행 중에 가장 연장자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파송하셨던 70인의 제자 중의 한 명인 바나바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와 복음전파를 위해서 준비할 것들을 일행들과 논의를 하면서 그의 조카인 마가도 합류하게 되었다. 여정은 전적으로 기도하면서 성령님께 의지하기로 하고 가장 먼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8)를 첫 번째 목적지로 결정하였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나에게 안수하고 오론테스 강에서 배를 타고 실루기아로 출발하는 우리 모든 일행을 축복해 주었다.

선교 여정: 실루기아와 구브로

실루기아에서 구브로까지는 뱃길로 꼬박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구브로 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살라미는 본토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무역이 활발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살라미에 도착하니 평소에는 말도 아끼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바나바도 고향에 왔다는 기쁨으로 흥분하여 도시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안내해 주었다. 안식일이 되어 바나바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박해를 피해 모여든 적지 않은 믿는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이미 들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찬양하며 계속해서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구브로 섬을 횡단하여 총독부가 있는 바보에 이르게 되었다. 그동안 마가는 삼촌인 바나바를 수행하며 구브로가 초행인 우리 일행을 위해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바보에서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여러 형제와 교제를 하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마침 총독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나바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듣고, 총독부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러자 총독인 서기오 바울도 그 이야기를 듣고자 하여 우리 일행을 총독부로 초청하였다.

우리는 안디옥이나 다소보다 많이 왜소한 총독부에 들어가서 서기오 바울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역사에 조예가 깊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고, 바나바의 진솔한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경청하며 더 알고자 하였다. 총독의 옆에는 바예수라 불리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이 우리 일행에게 호의적인 것을 보고는 우리를 음해하며 마술을 부려 총독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엘루마 (마술사)로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며 거짓 선지자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 좋은 바나바는 엘루마의 방해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사울이었던 나 바울(9)은 그 순간 성령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그를 꾸짖고 정죄하였고 그가 장님이 되었다. 이를 보고 총독은 더욱더 예수님에 관해 알고자 하였고, 우리는 몇 날을 총독부에 머무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총독은 복음을 믿고 우리에게 그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가서 이 가르침을 베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우리는 이 또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총독이 마련해 준 배편을 이용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기 위해 바보에서 밤빌리아 지역의 큰 항구도시인 버가(10)로 갔다.

선교여정: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

마침 남풍이 부는 때라 배는 순풍을 따라 하루가 채 안 되어 버가에 도착했다. 버가에서 지체하지 않고 서기오 바울이 부탁한 대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곧바로 가려고 길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중에 우리 가운데 문제가 발생했다.

성령님의 역사로 바보에서 엘루마가 장님이 된 사건 이후부터 우리 일행들이 바나바가 계속 인도해 오던 매일의 경건회에서 은연중에 나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나바보다 내게 더 많이 묻고 기도를 요청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활발하게 우리를 잘 도와주던 마가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꽤나 신경이 쓰였지만 사려 깊은 바나바를 보니 우리 일행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에 개의치 않는 듯했고, 심지어는 바나바조차도 암묵적으로 나를 앞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마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기가 불편해 보였고 동료들에게 불평하는 것도 심해졌는데, 버가에 도착해서 잠시 쉬지 않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곧바로 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실상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이 험준한 토로스 산맥(11)을 넘어 꼬박 열흘 이상을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기에 마가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갈 길을 정해 놓지 않고 오직 성령님의 이끄심에 맡기기로 기도하였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서기오 바울의 입을 통해 성령께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 것에 의지하여, 지체 않고 가는 것에 마가를 제외한 일행들 모두가 동의한 것이었다. 바나바가 마가를 따로 불러 타이르고 격려도 하였지만, 마가는 듣지 않았다. 나도 마가에게 조용한 말로 권면하였지만 더욱 화를 내면서 일정의 부당함을 항변하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우리 일행을 떠나버렸다. 마가가 떠난 후에 동료들의 어수선한 모습에 나도 마음이 상했지만,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겪을 고난과 박해의 징조 같은 것이었다.

비시디아 가는 길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일행들 모두가 한적한 곳에 모여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시편으로 찬양하고 떡을 떼며 기도로 힘을 얻었고, 깎아지른 절벽들로 가득한 토로스 산을 넘기 시작했다. 이 산 곳곳에 강도들이 종종 출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버가를 출발한 지 수일이 안 되어 실제로 강도를 만나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고,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오직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만을 바라게 되는 감사를 찾았다. 바닷가는 이미 훈훈한 봄기운이 완연한데 산으로 점점 더 깊숙이 그리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갈수록 추위가 심해졌다. 가지고 있는 옷가지로는 추위를 막을 수가 없었지만, 일행들이 서로를 안아주며 형제를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으로 추위를 이겨냈다. 워낙 깊숙한 산길이라 민가를 찾을 수 없었고, 동굴이라도 보이면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화톳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돌아가며 산짐승들을 경계하면서 웅크린 잠을 잤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 바다처럼 보이는 넓은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하룻길을 걸어서 드디어 비시디아 안디옥(12)에 입성을 하였다. 이곳은 아직 겨울 삭풍의 매서운 맛이 코끝을 얼얼하게 했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활기찬 도시에 들어오니 왠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무래도 나는 도시 체질인 것 같다.

비시디아

하루 휴식을 취한 후에 서기오 바울로부터 부탁받은 대로 그의 형제들을 수소문하여 그들이 있다는 곳에 찾아갔으나 그들은 일이 있어 로마로 갔으며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로 구해왔기에 이곳에서 어떤 일을 예비해 놓으셨는지 우리 일행은 도시의 여기저기를 둘러 보기로 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의 안디옥 만큼 규모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밤빌리아 지경의 가장 북쪽이자 브루기아의 중앙에 있어 로마의 아나톨리아(13) 지역의 교두보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또한 항상 전쟁이 잦았던 동방지역을 지원하는 군사·행정 도시로 발전되어 왔다. 도시 건설을 위해 동원된 유대인들과 여러 민족도 소규모지만 많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비시디아

안식일이 되어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회당을 찾아 들어가니 외지에서 온 우리를 보고 회당장이 누구인지 물었다. 우리가 유대인 선생인 것을 알고는 규례대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우리에게 형제들에게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나 바울이 일어나 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셨으 며,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 증거(14)하였다. 말을 마치고 모임을 파할 때가 되자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우리를 청하여 말씀을 더 듣기 원하였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입교한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따르며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풀어 설명하였고, 그들 중에 일부는 세례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함께 기도하였다.

다음 안식일이 되니 우리의 소문을 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회당에 모였다. 이는 분명히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일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은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정결 의식도 없이 회당에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였고, 심지어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을 시기하고 반박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비방하는 것이 아닌가! 이방인들은 말씀에 뜨겁게 반응하여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받아들이고 세례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렇듯 몽매한 것을 보고는 바나바와 나는 작정하여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6)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지경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두루 전파되었다.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수많은 자들이 믿어 세례를 받고 우리 일행이 보여준 대로 교회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유대인들은 더욱 시기하였고, 그들과 연관이 있는 시내의 유력자들과 학식이 높은 귀부인들에게 우리를 모함하고 박해하게 하여 우리 일행을 쫓아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해졌고 이고니온(15)으로 향했다.

선교 여정: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이고니온 가는 길
이고니온 가는 길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까지의 길은 잘 닦여져 있어 그리 험하지 않았다.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한가로운 길을 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 산을 넘어 점점 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건조한 기후가 만들어낸 황톳빛 토양의 끝없는 광야를 지나 그렇게 한 일주일을 걸어 이고니온에 도착했다. 오래된 작은 소도시로 넓은 평야에 세워진 이고니온은 갈라디아 지역의 남서쪽에 있으며 먼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쉼터 같은 곳이었다. 동방과 서방의 다양한 신들이 토착화되어 있었고 유대인 공동체도 형성되어 있었다. 바나바와 나는 일행을 둘로 나누어 도시의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더 듣고자 하는 이들의 요청이 있으면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상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하루는 헬라인 귀족의 초청을 받아 우리 일행들 모두가 그의 집이 있는 한 마을로 가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들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모든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거하였다. 모인 무리 가운데 이고니온 귀족 가문의 딸로 테클라 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몇 날 동안 진행된 헬라인 귀족 집에서의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모임의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증거한 복음을 믿는다면서 세례를 청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 일행과 함께 여행에 동행하면서 자신도 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미혼인 젊은 여인의 당돌한 제안에 우리 모두는 적잖게 당황을 했지만 잘 다독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테클라(16) 자매가 우리와 헤어진 이후에 약혼자와 파혼을 선언하여 집안에 큰 문제가 되었고, 결국 우리에게까지 화가 미쳐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후에 이고니온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서 바나바와 번갈아 가며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였고,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하는 또 다른 유대인 무리가 있어 이방인들을 선동해 우리 일행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고, 또한 이고니온의 관리들도 우리를 모욕하며 박해하였다. 관리들까지 우리를 박해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테클라 자매와 약혼을 했던 사람이 지역 관리였고 우리 때문에 파혼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군중들과 합세하였던 것이다.

루스드라

우리 일행은 박해를 피해 이고니온의 남쪽으로 걸어서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17)로 갔다. 이미 한여름으로 들어선 계절은 돌산으로 둘러싸인 루스드라를 더 뜨겁게 달구고 있었지만, 평지에 만들어진 작은 마을로 들어서니 뽕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청량감과 시원함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바나바가 뽕나무를 보더니,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여리고로 올라가던 길에 만났던 삭개오라는 한 유대인 세리에 관한 이야기(18)를 들려주었다. 키가 유난히도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꼭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군중들 틈에 있었다. 그러나 세리인 삭개오에게 아무도 길을 양보하지 않자 잎이 크고 가지가 낮아 오르기에 적당한 뽕나무 하나를 찾아 넓고 무성한 잎속에 자신을 숨기고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를 예수님께서는 보셨고 주위에 있던 여리고 사람들은 그가 삭개오라고 하면서, 세리로서 로마인들의 힘을 빌어 동족인 유대인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나쁜 일들을 많이 했는지 주님께 고발했다. 삭개오의 등장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사람들은 동족을 핍박하는 세리를 예수님께서 따끔하게 충고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하룻밤 유하시겠다며 제자들과 함께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다. 모든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고 죄인이라고 부르는 세리의 집으로 들어간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까지 메시아라 칭송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주의 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날 삭개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을 만져주셨다. 삭개오가 그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여 그가 폭리를 취하고 착취를 한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갚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말로 축복하셨다.(19) 그러면서 바나바는 덧붙여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고 위로해주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은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께 약속한 대로 더는 이웃을 착취하지 않았고, 스데반 집사의 일로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형제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질 때 그들을 도왔고, 지금은 가이샤라 지경에서 교회들을 위로하는 소임을 감당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결단을 했지만, 실제로 많은 일을 겪는 아주 긴 여정이 될 것이며, 지금까지 곳곳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앞으로 더 큰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주님의 값진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으며, 믿는 자들에게 남기신 명령에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을 수 없었지만, 이고니온에서 했던 것과 같이 마을의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와 은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있어 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눈에 간절한 소망이 있는 것을 보고 성령님께서 내게 주시는 확신으로 그에게 다가가 안수하며 기도한 후에 “일어서라”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 이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바나바를 제우스로, 나를 헤르메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다면서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제사에 사용하는 제물과 화환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가져와서는 우리 일행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옷을 찢으면서 그들을 말렸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행 14:15)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흩어지게 하였지만, 신당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제사가 헛된 것이라는 나의 말에 화를 내며 우리를 대적하게 되었다. 앉은뱅이로 일어나 걷게 된 자가 감사하면서 바나바와 내가 유대인 것을 알고는 그 마을에 헬라인과 결혼한 유대인 여자에게서 난 사람을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름은 디모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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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의 집으로 초청을 받아 아버지 부데(21),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유니게의 어머니인 로이스를 만났는데, 로이스는 유대교의 전통을 잘 지키며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인자한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는 것을 보고는 많이 놀라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자세하게 예수님에 관해서 듣기를 원하기에 우리는 그 집에 유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부데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에는 놀라워했지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경건한 로이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믿고 딸 유니게와 함께 믿음의 고백을 하였다. 디모데는 그런 외조모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참으로 진실하며 신실한 청년으로 보였다.

우리 일행은 몇 날을 루스드라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우리를 박해하던 자들이 이고니온에 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이고니온에서 우리를 핍박하던 무리와 함께 루스드라로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이 루스드라 제우스 신당에서 일하는 사제들을 만나 모의하고 무리를 충동하여 나를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지목하여 내가 있는 곳으로 오더니,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다짜고짜 돌을 들어 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돌에 맞아 나는 정신을 잃었는데, 내 안에 있는 영혼이 깨어나면서 성령에 이끌려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간 곳은 셋째 하늘(21) 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곳으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친히 계심으로 해가 필요 없는 곳이며 굶주림도 없고 슬픔과 눈물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내가 겪어야 할 환난과 감당해야 할 수고에 관해 한 번 더 보여주셨고, 강하고 담대하며, 나의 달려갈 길에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 임할 것을 계시해 주셨다.

내가 눈을 떠보니 바나바와 형제들이 나를 둘러싸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게 돌을 던진 무리는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를 성 밖으로 내던졌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가야 할 길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지를 다시 보여주셨다. 나는 담대하게 일어나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치료를 받고 디모데의 집으로 가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 루스드라를 떠났다.

선교 여정: 더베에서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우리는 갈라디아 남쪽 지경과 길리기아 북쪽 지경의 경계에 위치한 더베로 이동하였다. 더베는 루스드라보다 더 작은 마을이라 유대인들이 없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크게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로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는지를 도우면서 짧지 않은 시간을 머물렀다. 사실 더베로 온 것은 겨울이 되기 전에 남쪽 길리기아 지방을 지나 다소를 경유하여 안디옥으로 내려갈 요량이었는데, 더베에 머무는 동안 이미 겨울이 시작되면서 어떻게 안디옥으로 돌아갈 것인지 우리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더베

안디옥을 떠난 지 일 년이 되다 보니 일부 형제들은 한 십여 일이면 안디옥에 도달할 수 있는 토로스 산맥을 넘어 길리기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여 서둘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우리가 지나온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좋겠다고 동료들을 설득하였다. 바나바도 나와 같은 의견으로 우리가 만나고 세웠던 믿음의 형제들을 한 번 더 만나서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일행들이 동의하여 그동안 방문했던 도시들을 돌아서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루스드라 성에 가까워지니 불과 얼마 전에 돌에 맞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왜 이곳을 다시 오자고 했을까?’ 내게 돌을 던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잠시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루스드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한겨울이 되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앉은뱅이로 고침을 받은 자를 만나서 교제하니, 우리가 떠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으며, 외조모 로이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젊은 디모데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디모데와 따로 만나 모세의 글과 선지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었고, 바나바와 다른 형제들도 교회들을 위로하면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렇게 이고니온의 형제들과 비시디아 안디옥의 형제들도 만나 우리가 증거한 복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을 가르쳤다. 또한 각 공동체가 계속해서 소망을 붙들고 믿음에 거할 수 있도록 각 도시를 떠나기 전에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며 주님께 그들을 위탁했다. 비시디아를 떠나면서 대략 일 년 전에 구원받을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곳에 들어섰는데, 짧은 시간 안에 믿음에 거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 모두는 고백하게 되었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은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토로스 산맥은 아직도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렇지만 올 때와는 달리 비시디아에서 밤빌리아로 가는 상인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수월하게 산을 넘을 수가 있었다. 몇 날이 지나자 산으로 가려져 있던 길들이 탁 트이면서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섬 출신인 바나바도, 바닷가 출신인 나도, 모든 일행이 바다를 보니 그동안 산으로 광야로 다니면서 지쳤던 심신에 새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일 년 전 비시디아로 가기 위해 잠시 들렸던 버가에 돌아오니 이곳에서 우리와 헤어졌던 마가의 일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마가의 행동이었다. 따뜻한 바람을 즐기면서 꽤 큰 도시인 버가에서도 아고라 등을 찾아 복음을 선포했다. 일행 모두가 빨리 안디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하여 배편을 알아보니 버가에서 바로 안디옥의 관문 항구인 실루기아로 가는 배는 없었다. 하지만 버가에서 가까운 앗달리아(22) 라는 항구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가 있는데 그 배가 안디옥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앗달리아로 가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실루기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론테스 강을 따라 계속 기항하여 드디어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안디옥 교회의 장로들을 기쁨으로 재회하고 지난 일 년 여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다. 안디옥의 모든 교회는 한마음으로 그 된 일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었다. 며칠 동안 푹 휴식한 후에 안디옥 형제들을 만나 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여러 일들로 그들을 권면하고 우리가 받은 환난과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믿음을 전하였다. 나는 우리가 비록 환난을 당했으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가는 것임을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오래 참고 온유하여 이웃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유대에서 어떤 믿는 자들이 안디옥으로 왔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 교회들과 교제를 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행 15: 1-2a)

  1. 악티움 해전으로도 불리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현재 그리스의 이오니아해에서 패권을 두고 벌인 해상전쟁.
  2. 고대 그리스 도시의 회의 장소, 로마 시대로 들어서면서 물물교환 등의 시장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3. 창세기 10장 8-10절 참고
  4. 하나님이 내리신 소중한 사람
  5. 속사도 중의 한 사람. 폴리캅과 더불어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후 69년경부터 수리아 안디옥의 감독으로 섬겼다. 티라얀 황제 (재위 98~117) 때인 기원후 107년경 시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박해로 인해 체포되고, 108년 로마에 압송된다. 그는 안디옥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일곱 통의 편지를 쓰는데, 그중 네 통은 서머나로 가고 세 통은 드로아로 보내진다. 그가 쓴 모든 서신에서 자신의 별명을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라고 했으며, 로마로 압송된 이그나티우스는 108년 로마에서 순교한다.
  6. 레반트 (Levant)는 역사적으로 근동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이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7.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재임 (기원후 41~54) 중에 로마 제국 내에 심한 기근이 여러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 시에도 글라우디오가 아직 황제로 있었으며 클라우디우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기원후 50~5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행 18:1-2). 그리고 사도행전 12장에 언급된 헤롯이 죽은 시기는 기원후 44년경이다. 만약 사도행전 11:28이 연대적인 순서를 철저히 따른 기록이라면 사도행전 11:27의 '그때'는 기원후 44년을 넘지 않는다. 특히 12:25에서 언급된 대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시점과 헤롯의 사망 시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기근은 기원후 44 년경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흉년을 가리키고 있다고 추측된다.
  8.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쪽에 있는 섬으로 구약에 나오는 깃딤 (민 24:24)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키프로스 (Cyprus) 섬이다. 이곳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다는 전승이 있다.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9).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사울이 회개한 이후에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사울을 헬라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일부 유대인들은 유대식 이름 외에 헬라 또는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었는데,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으로 당연히 헬라식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비로소 사울이 이방 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고 복음전파에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10. 터키 지중해의 휴양도시인 안탈리아와 인접해 있는 곳으로 로마 시대에 크게 번성한 도시
  11. 터키 남부의 산맥으로 이 산맥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의 기후대가 달라질 정도로 해발 2000~3000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산지이다.
  12. 현재 터키 지명은 얄바치, 히타이트 제국 때부터 형성된 중부 아나돌루 지역의 도시로 헬라 시대에 번성하기 시작해서, 바울 일행이 이곳에 도착할 당시는 로마제국이 전략적으로 귀족들과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갈라디아 가장 서쪽 지역의 군사 및 교역 도시로 인구십만 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 장소로 추정되는 유대인 회당터 및 바울기념교회 등이 발굴되어 있다.
  13. 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이다. 과거에는 아나톨리아 전체를 아시아라고 불렀으나, 로마 제국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지역에 아시아 속주가 설치되면서 아나톨리아와 아시아가 구분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아나톨리아' 어원은 그리스어로 '동쪽'을 의미하는 '아나톨리'에서 비롯되었다. 북쪽으로는 흑해, 서쪽으로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남쪽으로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14. 사도행전 13장 16-41절 참고
  15. 이고니온 (현재 지명 콘야)은 터키 내륙 중남부 지역의 대도시로 셀주크 투르크 시대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신비주의 이슬람의 한 분파인 루미 메블라나의 거점도시로 유명하다.
  16. 이고니온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현재 터키의 남쪽지역 지중해 가까운 곳에 있는 실리프케라는 곳에 거처를 만들고 낮에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고 밤에는 기도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 여자들이 모여들어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혹자는 이를 최초의 여자수도원으로 보기도 한다. "바울과 테클라 행전"이라는 외경이 전해지고 있다.
  17. 루스드라는 콘야에서 남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루가오니아에 속했던 곳으로 신약성경 전체에 6번 등장한다.
  18. 누가복음 19장 1-10절 참고
  19. 누가복음 19장 9-10 참조
  20. 디모데의 아버지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대 전승에 부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21. 고린도후서 12장 1-4절 참고
  22. 앗달리아는 버가의 외항 역할을 했던 곳으로 버가모의 왕이었던 앗달로가 만든 도시이다. 전승에 의하면 앗달로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국과 같은 곳을 찾으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터키의 여러 곳을 다니다가 토로스 산을 넘어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지경을 보고 이 곳이 바로 이 땅의 천국이라 생각하고 앗달로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왕의 이름을 따서 앗달리아라는 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지명은 안탈리아로 지중해의 가장 큰 휴양도시이며, 주위의 로마의 고대도시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터키 제1의 관광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