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합기도제목

하나님의 나라가 온 열방과 모든 민족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는 기도
  •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 모든 악한 영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과 능력이 온 열방과 모든 민족들 가운데 임하시고,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오직 주님께서 받으소서.
  •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늘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모든 성도와 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소서.
  •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며 방황하는 잃어버린 영혼들, 특별히 무슬림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결박에서 풀어지게 하시고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 터키와 중동과 이슬람권의 땅과 백성들을 계속해서 흔드시고, 꿈과 환상과 성령의 여러 역사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더욱 편만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특별히 올해 라마단기간 (4/13-5/12)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는 구원과 반전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게 하소서!
  • 코로나 팬데믹이 속히 종결되게 하소서! 여러 가지 염려와 걱정,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더욱 기도에 힘쓰게 하시고, 안전한 백신 접종을 통해 속히 집단면역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터키와 중동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성도를 위한 기도
  • 터키와 중동과 이슬람권의 모든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특별히 터키의 81개 모든 주에 교회를 세워주소서!
  • 터키에서 우리와 동역하는 TeK 회장 알리 목사, 오르한 목사, 이산 목사, 팀 사역자, 바히트 목사, 제카이 목사, 아흐멧 목사, 움베르토 목사를 축복하시고, 현지 교회들과 동역자들이 온전히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아름다운 동역이 계속되게 하소서.
  • 터키의 동역자 (Partners in Turkey), 이집트의 동역자 (Partners in Egypt), 쿠르디스탄의 동역자 (Partners in Kurdistan), 아르메니아 동역자 (Partners in Armenia), 그리스 동역자(Partners in Greece) 사역자들의 가정과 자녀들과 모든 사역을 축복하소서.
  • 난민 자녀 학교 사역 (이레학교, Big Dream School, Bridge of Love)과 인터넷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두아일레바쉴라 (Dua ile Basla), 라스트콜 (Last Call), AIM (Arabic Internet Ministry) 사역을 축복하소서.
  • 코로나에 감염된 현지 동역자들과 성도들이 속히 치유되게 하시고, 코로나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과 그 외 여러 어려움을 주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하심 가운데 속히 극복하게 하소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는 현재 50유닛의 교회 개척자 (CP)들을 위한 기도
  • 주님께서 친히 모든 CP들과 가족들을 늘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날마다 새 힘을 더하소서!
  • 특별히 코로나 감염, 부모의 소천, 배우자와 자녀들의 건강 문제, 재정적 압박 등 여러 가지 시련 중에 있는 CP들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시고 늘 승리하게 하소서!
  • 친척, 사회, 정부의 박해와 압박, 코로나 사태의 어려운 상황 등 주위 형편과 사정에 결코 굴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늘 먼저 구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실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소서. 그들의 모든 사역 위에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풍성한 열매들을 허락하소서!
  •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 이들의 귀한 희생과 섬김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이들을 위한 더 많은 중보기도 동역자들과 동역자들을 세워 주소서.
SWM 선교회 및 동역하는 교회와 개인을 위한 기도
  • 허락하신 부르심과 사명 (연합기도운동, 교회개척운동, 선교적교회운동)을 주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운데 겸손하고 충성되게 잘 감당하게 하소서!
  • 현재 기도 중에 준비하는 사역들 – 터키의 재단(바크프/VAKIF), 이스탄불 선교센터 (허강한/강안나), 터키/조지아 국경도시 바투미 (Batumi) 선교센터 (팀/사라), 아르메니아/이란 국경도시 아가랏 (Agarat) 선교센터 (백스데반/올가), 북이라크 도훅 선교센터 (패트릭/안순자), 이집트 카이로 선교센터 (허드슨/베베), 그리스 아테네 선교센터 (박데이빗/레철), 현지 아웃리치 사역 (10/8-16) 및 교회개척리서치트립 (10/22-30) – 이 주님의 특별하신 간섭과 인도하심 가운데 잘 준비되고 주님의 온전하신 뜻대로 진행되게 하소서.
  • 실행이사와 운영이사 교회들, 후원이사, 다윗의 조약돌 회원들, KBP 이사와 회원들, 중보기도 동역자들의 가정과 자녀들과 사업과 사역을 축복하소서!
  • 현지교회 자립을 위한 BAM 사역을 통해 현지에 스몰 비즈니스가 잘 정착되고, 이 사역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KBP 이사들과 임원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소서.
  • 육신의 연약함 중에 있는 동역자들을 온전히 치유해주소서!
마지막 때 영적 대추수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기도
  •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속히 전파되게 하소서! (마 24:14)
  • 난리와 난리의 소문, 나라와 민족이 서로 대적하며 마지막 때의 징조가 일어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깨어 기도하고 마지막 시대 영적 전쟁에서 온전히 승리하게 하소서!
  • 투크르창 7민족 (위구르족,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터키)과 22개의 아랍연맹 국가들에게, 특별히 미전도종족 (UUPG) 35개의 Deaf People Groups, 124 소수종족들 가운데 복음 전도자들을 보내시고 인터넷과 여러 사역들을 통해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게 하소서
  • 하나님을 대적하는 북한의 악한 정권이 속히 무너지게 하시고, 지하교회 성도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사 그 땅에 복음이 전파되며 참 자유와 공의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미얀마의 쿠데타로 인한 유혈사태가 속히 안정되게 하시고, 정의와 평화가 회복되게 하소서!
  • 이스라엘의 참 평화와 회복 (시 122:6)이 이루어지며, 이방인의 충만한 수 (롬 11:25)가 속히 채워지게 하소서.

2021. Summer Magazine

닫기

편집인의 글

선교하시는 하나님

이세웅 금향로 편집인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고민하며 터키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권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SWM 선교공동체는 2020년 겨울부터 기획 주제를 가지고 깊이 있는 글들을 나누고 있다.

2020년 겨울호는 “성경의 잃어버린 땅: 터키” 그리고 2021년 봄호는 “하나님의 임재와 선교”에 이어 2021년 여름호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를 주제로 귀한 글들을 준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이 이루어지도록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신다. 그리고 이 대위임령은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시간 안에 성취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많은 사건과 선교 보고를 접하고 있다.

이번 여름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살리면 될 것이고 살리실 것인데 왜 우셨을까? 그리고 온전하게 살리시면 되는데 ‘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지시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이번 여름호의 주제이다. 요한복음 11장은 이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절)

그리고 “돌을 옮겨 놓으라 (39절)”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43절)” 부르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44절)”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첫째,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 죽음 – 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전 세계 78억 명 (2020년 현재) 중 24%를 넘어가는 19억 명의 무슬림들을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실까?” 질문하게 된다.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돌을 치우라”고 하시고 “무덤에서 나오라”라고 부르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눈물 젖은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생명이신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에 삼킨 바 된 것을 보시며 흘리셨던 그 눈물이 그리고 그 분노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여름호에 특별한 나눔을 해주신 분들이 많다.

터키개신교교회 협의회 (TEK)가 발간한 “터키교회 인권침해 보고서 2020”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동역자들과 나눈다. 가장 공식적인 터키교회의 박해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는 터키의 개신교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역사적, 사회학적 정보 요약과 터키 개신교 공동체에서 대면 인터뷰를 통해 얻은 일반적인 우려 사항을 공유한다. 아래의 9가지 주제에 대해 보고하고 있고 14가지 권고사항을 정부에 제안하고 있다.

  1. 증오 범죄와 혐오 발언, 언어 및 물리적 공격
  2. 예배 장소와 관련된 문제
  3. 종교를 전파할 권리
  4. 교육 및 의무 종교 지식 수업에서 직면하는 문제점
  5. 종교지도자를 양성할 수 없는 문제, 외국인 개신교도가 직면한 문제
  6. 법적 실체/조직권
  7. 의무적 신앙 선언
  8. 코로나 19 대유행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 및 차별
  9. 소통
  10. 결론: 권고 사항 14가지

터키 이스탄불 아나돌루개신교회 레벤트 큰란 목사는 터키에서 가장 많은 콘텐츠 사역을 해 온 사역자이며 터키어 영어 통역이 가장 뛰어난 터키 목사이다. 명 설교가이며 불같은 찬양 인도자이기에 영어권의 명 설교들을 터키어로 번역하여 터키인들에게 소개하는 방송 사역을 주도해 왔다. 그가 열방의 교회들에 터키에 풀어져야 네 가지를 나눈다.

흑해 지역 삼순개신교회 오르한 피차클랄 목사가 “흑해 지역을 향한 주님의 은혜와 비전”의 제목으로 흑해 지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나누며 흑해에서 열방으로 향하는 터키 교회를 위해 무엇을 풀어 놓아야 하는가를 도전한다.

지난 봄호에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간증을 한 안디옥개신교회의 아지즈 사역자는 현재 터키 공동체, 아랍 공동체 그리고 시리아 난민 청년 사역을 하고 있다. 아지즈 사역자는 이번 글을 통해 개척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도적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성장한 후 새로운 교회를 지원하고 다른 곳에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그리고 열방교회에 부탁하는 세 가지 중요한 기도제목을 나눈다.

현재 터키 복음전파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성경통신강좌 사역 책임자로 섬겨온 김선희 사역자는 두아일레바쉴레 인터넷 사역을 통해 매일 많은 구도자 무슬림들을 만나고 있다. 특히 무슬림 여성들에 관심을 가지고 “당신은 신의 은총을 입은 자: 무슬림 여성의 믿음과 꾸란”이라는 중요한 소논문을 준비해 주셨다. 이슬람권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무슬림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실제적인 경험과 함께 나눠주고 있다. 그리고 꾸란에 근거해 당하고 있는 구조적인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 긴 글이지만 무슬림 여성들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꼭 투자하기를 부탁드린다.

터키 여성 술탄 자매는 김선희 사역자와 함께 두아일레바쉴레 사역을 하는 영화감독 출신의 성도이다. 무슬림 배경의 여성 성도가 보는 시각을 여러분과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풀어져야 할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 양육이다. 무슬림 배경의 터키인들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생각을 초월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부르사개신교회 이스마일 목사가 “터키에서의 제자 양육”이라는 민감한 제목으로 글을 써 주었다. 수많은 외부 기독교공동체의 패키지를 경험해야 하는 터키 목회자로서 터키에서의 제자 양육에 필요한 이해와 외부 공동체가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 점들을 설명하고 건강한 제안을 하고 있다.

디야르바크르개신교회 아흐멧 목사의 동역자로 오랫동안 사역한 제리 매틱스 사역자가 터키와 북키프로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동의 제자 양육에 대해 나눈다. 제리 사역자는 기독교 방송 사역과 인터넷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젊은이들과의 네트워크가 매우 많고 다양하다. 특히 예지디인들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빅드림스쿨을 통해 교육과 복음전파를 위해 달려가고 있는 김밀알, 김글로리아 부부는 이제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고 기도하며 달려가고 있다. 빅드림스쿨 영어교사 동원 코디로 동역하는 서성훈 형제는 교육과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꿈을 가지고 있다. 빅드림스쿨을 통한 동역을 통해 이 꿈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는 간증과 부르심을 나눈다.

터키와 100년 이상 원수의 나라로 지내고 있는 아르메니아에서 청년들을 도전해서 원수의 나라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있는 아르메니아 백승환 선교사는 아라랏미션을 통해 이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거의 일년에 가까운 미션스쿨을 통해 미래 선교사를 배출하고 2021년부터는 장기선교사를 터키와 이란에 파송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아라랏미션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터키와의 긴장으로 터키 입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조지아 바투미에 임시 선교센터를 마련해서 언어 훈련과 터키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케빈의 성경이야기 “사울이었던 바울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가 소개된다.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와 1차 선교에 대해 바울이 직접 기록한 일인칭 선교여행기이다. 2020년 겨울호부터 연재가 시작되었다.

미션프론티어스에서 소개하는 기사는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기독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 (레베카 루이스, 기독교역사 전공, 인디아 거주 선교사)”이다. 유대교의 구조를 넘어 열방으로 확장된 복음은 이제 교통수단의 발달과 인터넷을 통해 기독교의 굴레를 넘어가며 그 생명력을 열방에 공급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도자들과 SWM 동역교회 지도자들이 터키와 중동에 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터키와 중동 기사 중에 2가지를 선택하여 소개하고 있다. 터키와 중동에 하나님의 강력한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발행인 칼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김진영 선교사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주어진 기회들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오직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습니다. 2014년 IS가 시리아로 거점을 옮긴 후 폭력과 전쟁으로 시리아 국민들의 삶은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생존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주위 나라에서 아직도 유리하며 방황하는 전쟁 난민들만 1,350만 명 (유럽연합의 자료)입니다. 국민 대학살의 중심에 있는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아직 건재하며 시리아 내전은 러시아, 이란, 터키, 유럽과 미국의 힘의 각축장으로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대리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무관심으로 흩어진 수많은 난민은 오늘도 슬픔과 고통 가운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예수님이 사랑한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아버지의 참사랑과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향한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눈물은 사탄과 악한 영들의 권세 아래 신음하며 고통받는 연약한 자들을 향한 긍휼 (Compassion)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세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요 11:39a)

죽은 나사로가 누워있는 무덤을 돌문이 막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과 백성들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막고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는 여러 종류의 돌들이 있습니다. 정치, 문화, 사회, 종교의 거침돌들이 있지만 가장 강력한 걸림돌은 영적인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있는 악한 영들이 (엡 6:12)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거짓과 미혹의 영들, 복음 사역자들과 교회를 향한 어둠과 폭력의 영들, 무슬림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아닌 분노와 적대를 일으키고 있는 두려움의 영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막는 분열의 영들, 그리고 정치, 문화, 사회, 종교의 틀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을 막고 있는 사람과 제도 뒤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영들과 사탄의 존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향한 영적 싸움의 실체와 본질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막힌 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문을 움직이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돌문을 밀 때 죽은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막고 있으며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돌들을 움직이기 위한 연합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막고 있는 돌들을 움직이기 위한 연합은 한 곳으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 돌들을 움직이기 위해 양쪽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밀거나 각기 다른 방향으로 민다면 돌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합된 힘은 한 곳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집중된 힘의 방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하며 왕의 대로를 수축하고 돌들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의 힘을 모으고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만약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는 돌들이 영적인 것이라면, 이 영적인 돌들은 오직 기도를 통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 지혜,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 방해의 돌들은 우리의 연합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십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연합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이며 선교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그러나 부흥은 아무 데나 임하지 않는다. 오직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하는 곳에 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회복과 부흥, 생명의 역사는 반드시 연합기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과 물질의 우상을 숭배하는 우리 모두가 마음을 찢는 회개와 무릎을 꿇는 겸허함으로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회복하고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평안한 삶과 안일함 가운데 세상적 가치관을 소유한 개인 혹은 집단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가진 악한 영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영적인 대결은 연합기도로 가능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덤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둘째,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의 무덤 © Marion Doss from Scranton, Kansas, USA,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3)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복음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복음의 야성이 살아나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가는 진리를 아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우리를 거룩한 소명과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자,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은 변화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더 이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가치관을 소유하는 삶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가짜 복음을 믿고 있거나 가짜 제자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세대와 교회는 완전히 맛을 잃은 소금이요,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저주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2014년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인 IS가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해 이슬람국가를 세우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일부를 점령하면서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고, 전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무슬림들도 이슬람 율법주의와 꾸란에 따라 자행되고 있는 IS 반인륜적인 행동 (여성 인권침해, 성노예, 폭력, 잔인한 살해, 지하드, 테러 등)에 대해 많은 반감을 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무슬림과 젊은이들이 ‘과연 진리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믿는 알라는 어떤 신인가?’, ‘평화를 말하면서 폭력과 전쟁을 일으키는 이슬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예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갈급하고 목마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흩어진 수많은 무슬림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좋은 황금의 기회입니다. 추수할 곡식은 너무 많은데 일꾼이 부족합니다.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복음전파 사명을 갖고 땅끝가지 달려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보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죽은 나사로들을 살리기 위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시리아 난민캠프

셋째,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4)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나사로야 나오라” 선포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면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수건과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수건, 베들이 자동으로 풀려야 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살아났는데 수건과 베에 꽁꽁 묶인 채로 있습니다. 부활하여 생명을 소유하였으나 꼼짝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을 들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죽은 지 4일이 지나 썩은 냄새가 발행인 칼럼 진동하는 역겨움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시체를 만지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다가가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묶인 베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는 살았으나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 연합기도를 통한 영적 돌파를 통해 터키와 이슬람권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개척되며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묶여 있는 줄들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역겨움, 더러운 것을 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위를 향해, 이웃을 향해,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열방과 모든 민족을 향해 위로부터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선교지의 연약한 성도와 교회들이 온전히 바로 설 수 있도록 고난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도록 건강하여 재생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묶인 줄들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생명을 소유했지만, 아직도 많은 영적·사회적·종교적·개인적인 결박 가운데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돕는 사역이 필요합니다. 터키에는 120여 개의 교회가 있으며 성도들의 숫자는 약 7,00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터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무슬림 난민들에게 복음 전도자들, 교회개척자들, 인터넷을 통한 복음 상담자 등 일꾼들을 보내야 합니다. 또한 성도와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소규모의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도록 미국과 한국의 비즈니스맨 그룹에서 전문적인 사역을 도와야 합니다. 현재 교회들에는 가정·부부 세미나, 아버지·어머니 학교, 제자훈련,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캠프, 상담 등 많은 사역들이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지역 교회들이 수많은 사역으로 영적 비만에 빠지지 않도록 그 사역들을 선교 현장에서 나누는 사역이 일어나야 합니다. 아웃리치를 통한 섬김과 드림의 사역, 온라인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이 다양하고 창조적인 사역들을 계발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마음이 가난해지고 영적 목마름 가운데 있는 그 땅의 백성들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다양한 사역에 참여할 교회와 성도들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의 NIV성경은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입니다. 이는 ‘기회를 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시간, 물질을 드려 잃어버린 영혼들을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와 교회들을 돕는 섬김, 드림, 베풂의 손길을 이제는 펼쳐야 하지 않을까요? 이 악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세월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주어진 기회들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오직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 (빌 3:13-14)는 모습입니다.

방황하는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을까요?

리더십 칼럼

거룩한 길을 예비하는 청년들

이재진 선교사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이 아니다. 유력한 몇몇 후원자들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오직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살아내는 청년들

역사상 청년 세대에 대해서는 늘 우려 섞인 평가가 많았다. 기존 세대는 젊은이들을 ‘버릇이 없고 사리 분별을 못 하며, 용기와 자신감이 없고, 나약하고 도전하려 들지 않고, 나라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아이들이며, 쓸데없는 일에 바쁘고, 시간과 자원, 젊음을 낭비하고 아낄 줄 모르는 지혜롭지 못한 어린아이들에 불과한 모습’이라고 평가하기 쉽다.

과연 그러한가? 믿음의 눈을 통하지 않고 내린 결론에 다 동의할 수는 없다. 역사상 청년 세대는 늘 약자였고, 부모님에게서 많은 것을 물려받지 않는 이상 기성세대와 비교하면 출발부터 불공평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고학력의 세대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최악의 청년 실업률 앞에 서 있는 청년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편이 뭉클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젊은이답게 도전’해 보라는 기성세대의 조언과 시선이 아무런 영향력 없이 헛된 울림처럼 청년들 주위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볼 때 우리와 우리 부모님 세대의 청년 시기도저랬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본다.

어느 늦은 밤, 24시간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들어갔다가 가게 한 모퉁이에서 유통 기한이 바로 지난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불편한 자세로 급하게 먹다가 손님을 맞이하는 편의점 알바 청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시간에 방문한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함을 느껴서 “알바하느라 힘들죠?”라는 말과 함께 드링크 영양제 하나 사서 권해 주고 나온 적이 있었다. 동네 단골 카페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던 청년과 자주 인사했었다. 한동안 카페에서 볼 수 없다가 오랜만에 길에서 만나 왜 요즘은 카페에 안 나오냐고 물으니 “코로나로 어려워져서 잘렸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멋쩍게 말하는 청년의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며 “힘내세요”라고 말해주는 것 외에는 전해줄 위로가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교회 청년부 형제가 리더로 섬기다가 갑자기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아 괘씸하고 미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 형제가 자기 집에 음식 배달을 하러 온 것을 알아보고 짧은 시간 손 붙잡고 기도해 주며 같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청년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과 암 투병으로 어려워진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투잡, 쓰리잡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복음’을 위해 삶을 드리겠다고 헌신했던 자신의 기도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배신자처럼 느껴져, 교회 공동체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청년의 치열한 생존의 삶의 모습 또한 ‘현재의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청년 선교사의 비전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모습, 비전과 꿈을 따라 젊음을 드리는 열정과 순종은 분명 역사상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부분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의 불이 가슴에 있고, 그 꿈과 비전으로 앞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눈은 찬란하며 영롱하다. 열정은 가득하지만 미숙하고, 순수하기에 응원과 격려가 필요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의 순종과 헌신은 하나님 나라를 더욱더 임하게 하고 천국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주님의 좋은 동역자들로 만드는 자원들이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회와 선교 단체들은 이제 선교의 플랫폼으로, 디딤돌의 역할로 보내고 동역하는 영적 아비, 어미의 모습으로 헌신해야 할 때가 되었다.

Holy Wave Makers (HWM) 청년 단기 선교사 파송 운동은 2019년 터키와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현지 선교사들과 현지 교회 지도자들, 현지 교회 개척자들 (CP)의 요청에 SWM 선교회의 반응과 순종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2020년에 HWM 1기 청년들을 동원하고 파송하는 것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전개되면서 1년이 연기되어 2021년부터 하나님 나라의 프로젝트가 실행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교의 역사는 전쟁의 때에도 이루어졌으며, 열방의 흔들림과 전염병의 상황도 주님의 손과 주권 아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된다. 무덤에 있던 나사로가 주의 음성을 듣고 사망에서 부활로 나왔지만, 무덤 밖으로 나온 나사로의 수족에 싸여 있는 베와 얼굴을 싸고 있던 수건을 누군가가 벗겨 주어야 했다. 먼저 우리가 우리 민족의 청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무덤에서 나올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의 음성을 간구하며 합심해 기도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청년 단기 선교사 파송을 해야 하냐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교회도 모이지 못하고 있는데 청년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할 여력이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영향력이 큰 유력한 교회들과 단체들, 사람들을 의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로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그분의 손이 움직이시기를, 우리 한민족의 청년들을 향하여 주의 얼굴 빛을 비추시기를 기도하며 엎드리며 힘을 다하여 나팔을 불어 알릴 뿐이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이 아니다. 유력한 몇몇 후원자들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오직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 누워 있는 죽은 지 나흘 이상 된 나사로와 같은 청년에게 말씀하시도록 우리들이 눈물과 간절함과 기도로 주님의 명령을 요청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한민족의 명운뿐만 아니라 중동과 이슬람권 더 나아가 온 열방의 영적 돌파를 이뤄내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을 들어 쓰시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들어 쓰셔서 부유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우리 한민족 믿음의 어른 세대가 먼저 헌신해야 한다. 주님께서 한국, 디아스포라 한국계 청년들에게 천둥과 같은 소리로 말씀하시도록, 죽음의 암흑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살리신 생명의 음성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큰소리로 외치시도록 우리는 엎드려 금식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모든 세대가 참여하는 선교 운동

HWM 운동은 단순히 청년 선교사 파송 운동이 아니다. HWM 운동은 궁극적으로 모든 세대가 참여하는 거룩한 선교 운동이다. 올해 1기를 시작으로 매년 한국과 미국, 온 열방의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이 매년 선교지의 땅을 믿음으로 밟는 일이 일어나기를 밤을 새워 기도하며 구하고 있다. 청년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헌신하여 그 땅을 밟기를 우리 어른 세대들이 기도하며 후원하고 동역하여 그 길을 먼저 예비해야 한다. 선교 단체의 비전에 청년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과 부르심에 청년들이 헌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 주는 것이다. 믿음의 3대, 온 가족 전체가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청년 나사로의 몸에 있던 베와 수건을 벗겨 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다. 청년들만을 동원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들딸들, 손자 손녀들을 믿음의 명문 가문들이 합심해서 보내는 ‘한 가문 선교 운동’이다. 우리 각 가문에서 선교사들이 일어나게 하자. 우리 후손들이 믿음으로 순종해서 1년을 드릴 때 기쁨으로 온 믿음의 가족들이 격려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께 기꺼이 자녀들을 내어 드리자. 가문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몸에 붓는 ‘주님께 아름다운 일’인 ‘선교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이 HWM 운동의 본질이다.

파송되는 청년 선교사들은 현지 선교사님들과 한 팀을 이루어 사역하게 되며, 자원한 청년들의 은사와 경력, 사역의 경험에 따라 현장의 사역을 도울 수 있는 길들을 열어 놓았다. 선교사로서의 기본적 삶을 공동체 훈련을 통해 함께 삶으로 배우고,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터키와 중동권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난민 아이들에게 온라인을 통해 영어, 미술, 음악 등을 가르칠 수 있는 사역의 기회를 갖게 된다. BAM (Business as Mission)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현지 교회, 난민 사역자들을 비즈니스를 통해 도우면서 그들의 자립을 돕는 사역에도 참여하게 되며, B&b (Bible & bread) 난민 구제 사역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스탄불 기도의 집 선교 센터에서 예배와 중보기도를 통해 사역에 동참할 수 있으며, 현지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며 음악, 예배, 찬양팀과 동역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슬람권에서 사역하고 있는 교회 개척자들 (CP)을 섬기는 사역에 동참하며, 현지 선교사님들의 지도 아래 신약 성서의 보물의 땅인 터키와 그리스, 이집트 땅을 밟고 동역하게 된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각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해서 불러 보내신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인 복음의 군대를 가정과 교회가 밀알이 되어 기꺼이 파송하고 후원하고 동역해 주시기를 주님의 심장으로 부탁드린다.

헌신과 순종으로 복음의 열린 문에 들어가자

세계의 많은 석학과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올해를 시작으로 앞으로의 10년은 모든 면에서 가장 큰 격변기가 될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국가적으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양과 속도와 모습들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하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 담아 녹아내야 하는 시대적 사명과 도전이 교회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떤 인간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길을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순종하여 나아가야 한다. 터키, 중동, 이슬람권은 여리고 성과 같다. 철옹성 같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강력한 공성 무기와 군사 전략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침묵하며 그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무조건적인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마지막 날까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과 전략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산지라도 개척해야 하며, 철병거가 있는 땅이라도 우리는 올라가야 한다. 한국 교회 선교 운동의 1, 2세대 선교사들의 헌신과 눈물, 땀과 기도가 갑절의 영감과 축복으로 새로운 젊은 선교사들에게 전승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21세기가 테러와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난리, 재난과 전쟁의 소문으로 점철되며 시작되었지만 이제 우리 한민족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위대한 헌신과 순종으로 복음의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 주님께 드릴 아름답고 복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농부의 수고를 다해야 한다.

HWM 청년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님 손에 붙들려 Nation Changer가 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21세기의 윌리엄 캐리가 나오기를, 중국 내지 선교를 감당한 허드슨 테일러가 나오고, 아프리카 대륙을 복음의 열정으로 뒤덮었던 리빙스턴이 나오며, 한민족의 통일 한국을 복음으로 이끌 지도자들까지 나오게 되기를 소망한다. 마치 베드로가 그물과 배, 가족을 뒤로하고 주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제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처럼, 물질문명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신’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미국 문명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도 뒤로하고, 한국 사회의 끝없는 성공을 향한 경쟁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매년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전 세계, 특히 중동 땅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청년들은 세계를 품는 리더의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내려놓는 경험은 차세대 리더의 자질을 갖추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광야의 학교가 될 것이다. 또한 난민들의 삶,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되돌려 갚지 못하는 사람들과 민족을 섬기며 내려놓음을 경험할 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삶을 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는 1년의 시간은 100년을 사는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이 기간의 경험은 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안목을 영원과 영생과 참된 것을 추구하는 안목으로 바꿔줄 것이다.

청년 선교사로 헌신한 1년의 기간이 끝나기 전 다시 한번 인터뷰를 통해 이후의 진로를 정하게 된다. 계속해서 선교 사역을 원하는 청년들은 장기 사역에 합당한 단체들을 연결하여 계속해서 사역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하여 진로를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는 1년의 경험들에 관한 추천서와 증빙 서류 등으로 지원한다. 이후 2기, 3기 HWM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그 사역들을 연계해서 받고, 새로운 사역들을 창조적으로 열 수 있게 돕는다. 1년의 사역 기록과 영상들은 선교 사역의 소중한 자료들로 사용하게 되고 어느 방면으로 진출하든지 이 사역을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동역자로서, 후원자로서 계속해서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인맥으로서 함께 하도록 조직이 된다. 일차적으로는 한국어권 청년들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영어권, 아시아권 젊은이들과 중동의 젊은이들 또한 이 비전에 동참해 함께 나아가는 전 세계적인 선교 운동으로 불길처럼 일어나도록 우리는 청지기가 되어 실제적인 준비를 할 것이다.

덧없고 허무한 인생에 참되고 영원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부르고 계신다. 우리의 눈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벗겨지고, 우리의 귀에 인 박혀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습관적으로 거역하고 도망쳤던 완악한 마음이 변화 받아 가장 소중하고 영원하고 참되고 값진 것에 우리의 자원들을 드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암흑의 조선 땅에 찾아왔던
초기 선교사님들의 기도를 우리는 알고 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멘.”

이제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때이다.

교회에서부터 선교사 파송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시작으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 선교지 현장에서의 사역의 어려움, 사탄 마귀의 나라 세력들의 집요하고 끈질긴 영적 공격들, 자원과 재정의 부족함,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흥과 시아파 순니파의 갈등과 혼돈, 무엇보다 우리들의 믿음과 순종의 부족, 내가 아닌, 우리 가정의 자녀가 아닌, 다른 청년들이 가기를 원하는 얄팍한 마음들까지…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인 청년들을 복음을 위해 드리는 것은 죄인이었던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몸에 드린 것과 같은 아름다운 행위가 됨을 알고 순종해야 한다.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상급을 바라보자. 우리의 가문과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영원한 가치에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인 청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함께 서서 나아갈 때이다.

하나님께서 HWM 청년 선교사 운동에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고 영적 권위와 기름 부으심으로 축복하셔서 이 선교의 운동이 한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하나님의 청년들과 교회들에 불어가도록 기도의 수고도 계속하기를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은총과 기쁨으로 주님의 날에 이르도록 함께 하실 것이다.

이슈

Tek 2020년 인권 침해 보고서

터키 개신교교회협회 (2021.02.22)

매년 TeK (터키 개신교교회협회)는 터키의 개신교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기록한 인권 침해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 터키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도입

우리는 터키의 개신교 공동체의 관점에서 인권 침해 보고서를 수년 동안 매년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다음 내용을 다룬다.

  • 터키의 개신교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역사적, 사회학적 정보 요약
  • 터키 개신교 공동체에서 대면 인터뷰를 통해 얻은 일반적인 우려 사항
  • 본 보고서의 목적
  • 보고서 중점 분야 요약
  • 보고서 중점 분야에 대한 자세한 정보

배경

터키의 개신교 공동체는 182개 이상의 다양한 규모의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에 있다. 개신교 모임은 10개의 종교 재단, 12개의 종교 재단 대표 지부, 34개의 교회 협회 및 53개 이상의 대표 지부를 두고 있다. 나머지 모임은 법적 실체가 없다. 약 17개는 가정 교회(1)이다. 7개의 모임은 사무실에서 만난다. 약 13개의 개신교 교회가 역사적인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 외 모임들은 그들의 장소나 임대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

2020년 개신교 공동체는 터키 국가 교육 시스템 내에서 자체 종교인력을 양성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개신교 공동체는 현장 훈련을 통해 종교 지도자를 양성한다. 소수만이 해외 신학대학원에서 교육을 받는다. 일부는 국내 세미나를 통해 목회 리더십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다. 현지 개신교 지도자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교회의 영적 리더십은 외국인 사역자 (개신교 영적 지도자)가 제공한다. 그러나 2019년부터 2020년 내내 외국인 사역자의 터키 입국을 허락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비자 또는 거주 허가를 거부한 것은 헌신된 외국인 사역자들에 의해 주도된 개신교 모임들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개신교 공동체는 위계적이거나 중앙 집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지역 교회는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개신교 간 통합과 연대, 파트너십을 목적으로 교회 목회자들이 함께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에 이러한 통합은 구조적 추진력을 얻었고, 그들은 TeK로 알려진 ‘개신교교회연합’을 결성했다. TeK는 협회와 관련된 이전 법률의 한계로 인해 터키에서 공식적인 대표 기관이 되는 데 어려움을 계속 겪었다. 협회법의 변경으로 TeK는 협회가 되었고, 2009년 1월 23일 개신교교회협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개신교교회협회는 터키 대부분의 개신교 공동체를 대표하고 통일하는 기관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신의 개신교 신자 정체성을 고려할 때, 터키의 어떤 상황이 당신을 슬프게 하거나 걱정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변이 정리돼 있다. 이러한 질문은 2020년 동안 개신교 공동체 구성원들과 대면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졌다. 터키의 상황에서 특별히 편견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단순히 그들의 신앙 때문에 사회의 반역자로 여겨지거나 외국 권력의 협력자, 스파이 등으로 간주되고, 결과적으로 모욕 과 경멸을 당하고 신앙에 대한 무례함이 초래되었다.(2)

2007년부터 개신교교회협회는 터키에서 개신교 공동체의 상황을 설명하는 감시 보고서(3)를 발간했다. 개신교교회협회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큰 중요성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협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무원, 시민 사회 및 언론과 함께 개신교 공동체의 실태를 설명하는 이 연례 모니터링 보고서를 작성하여 배포하고자 한다.

요약

종교와 신앙의 자유는 세계인권선언뿐만 아니라 국가 및 국제법에서 기본권의 하나로서 터키에서는 헌법상의 권한으로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보호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사회는 2020년에 몇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계속 경험했다. 본 보고서는 터키의 신앙 자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2020년 개신교계가 종교의 자유와 관련해 경험한 긍정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4) 2020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전년과 비교했을 때, 2020년에는 단순히 신념으로 인해 개신교 기독교인이나 기관에 대한 물리적 공격을 포함하는 증오 범죄가 많이 감소하였다.
  • 또한 2020년에는 개신교와 개신교 교회에 대한 혐오 목적으로 서면이나 방송으로 사회를 자극하는 혐오 발언이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하지만 다른 종교나 종교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과 공격은 개신교 공동체에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 2020년 코로나 19 대유행은 사회 전체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 예배당 사용 요청, 예배 시설의 지속적 사용 요청, 기존 교회 건물 사용 신청 등에서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 협회 설립을 통해 개신교 공동체의 법적 지위를 얻는 추세는 2020년에 중단되었다. 협회와 관련된 법 개정은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 2020년에는 교회가 종교 재단을 신청하는 경향이 크게 증가하였다.
  • 기독교인들이 종교 사역자들을 훈련할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척이 없었다. 많은 외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추방당했거나 터키 입국이 거부되었으며, 거주 허가를 갱신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2020년에는 개신교 공동체가 경험한 인권 침해가 크게 감소했다. 이러한 감소의 이유는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한 불확실한 상황과 봉쇄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드러나지 않고 의사소통이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대유행의 모든 징후와 영향이 끝나면 이런 관용의 문화가 터키 사회에 완전히 수용되기를 희망하고 바란다.

증오 범죄와 혐오 발언, 언어 및 물리적 공격

2020년 7월 22일, 이전에 교회를 공격했던 전과가 있는 사람이 칼레이치에 있는 안탈리아 성서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다. 보안군에게 알려졌고, 보안군은 그를 지역에서 쫓아내었다. 교회가 항의하자 보안군은 나중에 범인을 체포했다. 그러나 가해자는 진술 후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이후 사법 중재자에게 회부됐지만, 중재자는 가해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이와 관련된 법적절차가 진행 중이다.

2020년에는 개신교 단체에 대한 공격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2020년 다른 기독교 단체들에 대한 공격은 가톨릭 노부부의 실종에 이은 부인의 시신 발견, 전통적인 교회 건물과 묘지에 가해진 물리적인 피해 등 개신교 공동체의 심각한 우려를 야기시켰다.(5) 우리 공동체를 특히 슬프게 했던 2020년의 새로운 일은 교회 참석자들에게 정보제공자가 되라는 유인책이었다. 특히 아나톨리아의 동부, 남동부의 많은 도시에서 정보국의 일원으로 자신을 밝히는 이들이 터키인 및 난민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여 특정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 교회는 사회에 개방되어 있다. 그들은 토지법에 따라 투명하고 책임 있게 감독을 받는다. 이러한 법적 체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형의 의심스럽고 불투명한 접근 방식은 매우 우려된다.

예배 장소와 관련된 문제

교회 건물을 세우고 유지할 권리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행사에 대한 제한은 계속 경험되고 있다. 터키의 역사적인 기독교 공동체와는 달리, 개신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의 일부인 종교적인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신교 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인 교회 건물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개신교 모임은 협회 (터키어: derneck)를 설립하거나 기존 협회나 종교 재단의 지부 형식 얻은 뒤, 전통적으로 예배에 이용되지 않았던 가게나 창고 같은 곳을 임대하거나 매입함으로써 예배 장소를 찾는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몇몇 회중들은 자체적으로 독립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의 대부분은 예배 장소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된 예배 장소가 얻는 이익을 받을 수 없다. 당국에 교회라고 소개하면 합법적이지 않아 폐쇄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는다. 그러나 예배는 어떠한 사전 허가 없이 실현될 수 있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이다.

2020년 말 개신교 공동체가 예배 장소로 사용한 건물은 다음과 같다.

  • 18개의 공동체가 자신의 단독/독립 건물 (개인 또는 법인 명의로 등록됨)에서 예배를 드린다.
  • 32개의 공동체가 다른 재산에 부속된 건물 (개인 또는 법인 명의로 등록됨)에서 예배를 드린다.
  • 13개의 공동체가 역사적인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린다.
  • 101개의 공동체가 임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린다.
  • 17개의 공동체가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린다.
  • 1개의 공동체가 예배당 (채플)에서 예배를 드린다.

가정 모임과 장소를 임대하는 모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 공동체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리고 이 문제가 개신교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020년 11월 17일, 아프리카인과 한국인이 예배에 사용한 개신교 예배 장소 3곳이 2020년 11월 16일자 공문번호 E-60931568-450-5962에 따라 무기한 폐쇄되었다. 이스탄불 에센유르트 지구장이 발행한 공문에는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제한에 따라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속한 예배 장소의 법적 지위가 명확해질 때까지 폐쇄”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후 논의에서 보안부서는 팬데믹 제한이 제되면 활동에 대한 허가가 주어질 것이라고 구두로 보장했다. 피해를 당한 공동체는 법적 절차로는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다고 보고 이런 상황을 받아들였다. 지속해서 성장하는 개신교 공동체에 예배 장소와 관련된 어려움은 2020년에도 계속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종교를 전파할 권리

© World Bank, CC BY-NC-ND 2.0, via flickr

2020년에 이 권리의 위반은 보고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지역 내 활동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육 및 의무 종교 지식 수업에서 직면하는 문제점

2020년에 교육권을 제한하는 위반행위는 보고되지 않았다. 주된 이유는 주 교육 시스템에서 기독교 학생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학교가 코로나 19로 일반적으로 휴교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020년 동안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수업 (RCMK)과 이 수업에서 면제받을 권리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사건은 보고되지 않았다.( 6) 비록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 수업의 의무에 대해 지역 법원과 유럽인권재판소 (ECHR)가 종교의 자유와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무화되어서 는 안 된다고 선언했지만, 이러한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7)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 수업의 의무 교육과정과 교실에서 사용되는 자원은 현재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은 이슬람 종교의 관점에서 제시되며 기독교 자체의 의견과 견해를 포함하지 않는다

종교지도자를 양성할 수 없는 문제, 외국인 개신교도가 직면한 문제

2020년 터키의 법률은 기독교 성직자 양성과 종교 공동체 구성원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학교를 열 가능성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발전시킬 권리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의 기본 중 하나이다. 개신교 공동체는 현재 현장 교육을 제공하고, 터키 내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며,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거나 외국인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2020년에는 외국인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추방, 터키 입국 거부, 거주 허가 거부, 입국 비자 거부의 사례가 계속 발생했고, 그 결과 많은 공동체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개신교 공동체의 외국인 신자들도 터키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우리 협회는 2019년 1월부터 세부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2019년에는 35명의 개신교 외국인이 이러한 조치를 받았다. 전염병으로 인한 여행 제한에도 불구하고 2020년에는 30명이 추가되었다.

2020년에 적어도 30명의 외국인 개신교 신자들이 터키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중에는 미국인 10명, 영국인 1명, 독일인 4명, 한국인 3명, 몰도바인 2명, 노르웨이인 1명, 핀란드인 1명, 아르메니아인 1명, 중남미인 3명, 기타 국적 4명이 포함됐다. 이들의 가족들을 고려하면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러한 금지 조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수치는 매우 작은 개신교 공동체의 상황에서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과 그 가족은 수년 동안 터키에 거주해 왔다. 그들 중 누구도 어떤 형태의 범죄 기록이나 유죄판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상황은 주요한 인도주의적 문제를 나타낸다. 예고 없이 내려진 이러한 입국 금지 조치는 가족 단결을 방해하고 개인과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혼란스러운 상태를 만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N82 코드를 받았다. (터키 입국 시 사전 승인 절차로 연결) 법적 방어에서, 이러한 코드를 발행한 당국은 N82의 제한은 입국 금지가 아니라, 단지 사전 승인을 얻기 위한 요건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자를 신청한 모든 사람이 거절당했다. N82가 입국 금지령은 아니지만, 터키에서는 사실상 입국 금지령과 같다.

이런 상황에 맞서기 위해 열린 법정 사건에서 당국은 이들이 터키에 해를 끼치는 활동을 추구하고, 선교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연례 가족회의 (우리 협회가 20년 동안 개최해 온 모임)에 참석하거나 비슷한 세미나와 모임 (완전히 합법적이고 투명한)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법원 사건 중 일부는 결론을 내렸고, 구체적인 이유 없이 이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된 사건들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항소한 상황이다. 현재까지 승소한 항소인은 없으며, 대부분의 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2020년에 최소 5건에 달하는 터키 시민과의 국제결혼 가정이 이 조치의 희생양이 됐다. 이 사건의 대부분은 터키인 목사(종교 지도자)와 결혼한 외국인 아내에게 적용되었다. 피해를 받은 사람 중 대부분은 교회에서 성직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주부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터키 시민권자인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민을 강요받거나 그들의 가족이 분열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2020년에는 배우자가 교회 지도자이고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는 이유로 시민권 신청이 거부되기도 했다.

우리 협회는 국가의 주권 즉 국경 내에 누가 있을 수 있고, 있을 수 없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들이 단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적용되는 이 조치는 심각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차별이라고 본다. 교회를 범죄를 저지르는 곳으로 묘사하고, 순수하게 합법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마치 범죄인 것처럼 사람들의 삶을 뒤바꾸는 것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한다. 특히 터키 시민과 비시민권자 결혼 가정에 발생한 혼란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개신교 공동체가 표적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은 전국 개신교 사회에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법적 실체/조직권

법인체의 부족은 터키의 모든 종교 집단에 해당하지만, 소수 집단에게 더 큰 문제가 된다. 개신교계는 주로 협회와 재단을 설립하거나 기존 협회/재단의 대표 지부가 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2020년 현재, 개신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10개의 종교 재단, 12개의 재단 대표 지부, 34개의 교회 협회, 이들 협회와 연결된 53개 이상의 대표 지부를 설립하였다. 나머지 교회들은 어떤 형태의 법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법적 실체를 확보하려는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교회’나 ‘예배 장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종교 회중들이 법적 실체가 되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의 법적 경로는 신도들이 ‘종교적 교회’로서 법적 정체성을 얻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소규모 교회들의 경우, 현재의 ‘협회 설립’ 과정은 복잡하고 실행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재단 설립 비용이 매우 많이 들고 법적 절차가 길어 소규모 교회는 법적 실체를 얻기 어렵다. 소규모 회중들은 기존 교회 협회나 종교 재단의 대표 지부가 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재단 설립 허가를 받게 되어 최근 몇 년 사이 교회들이 재단을 설립하는 추세를 보인다.

2020년 협회를 관장하는 법률에 대한 변경(8) , 특히 정부가 관리자를 임명하고, 활동 중단 및 협회와 이사들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는 권리, 회원명부를 제공해야 하는 요건, 자선 기부금 모금 변경 등은 협회의 권리가 제한될 위험이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개신교 교회가 협회를 형성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의무적 신앙 선언

터키 새로운 신분증 뒷면 샘플© ekds.gov.tr, CC BY-SA 4.0, via Wiki Commons

신분증에 종교를 눈에 띄게 인쇄하는 대신, 새로운 신분증 칩에 소지자의 종교적 소속을 기록함으로써 차별의 위험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최근 몇 년간 이 주제에 대한 불만이 줄어들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식 문서에서 종교 섹션이 완전히 삭제되고 대신 개인의 구두 선언으로 대체되기를 바란다.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 수업에서 면제받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선언하거나, 심지어 이 신앙을 증명해야 하는 요구는 인권침해로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헌법재판소와 지방법원이 내린 결정이 이행돼야 한다.(9)

코로나 19 대유행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 및 차별

2020년 전 세계와 마찬가지로 터키에도 영향을 미친 코로나 19 대유행이 개신교 사회와 다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주말 봉쇄는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지키는 기독교 시민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봉쇄 결정이 내려졌을 때 기독교 시민들은 고려되지 않았다. 교회가 모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한 어떤 정부의 회람이나 지침은 없었다. 방역 지침에 대한 요청에 답변은 없었고 대신 일반적인 진술로 표면적으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교회들에 혼란을 야기했다. 우리 협회는 이슬람 사원에 대한 세부적인 제한 사항을 바탕으로 교회에 자체적인 조언을 제공했다.

협회 활동 금지가 교회 협회에도 적용되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몇 달간 지속됐다. 정보를 명확히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마침내 2020년 12월 24일, 이스탄불 주 내무부 시민사회 관계국은 교회 협회가 제한 대상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슬람 사원은 예외로 두고 교회에 이러한 제한을 적용하는 것은 차별적이며 평등한 대우 원칙에 위배된다. 이에 따라 이스탄불 에센유르트 지구에 있는 3개 교회가 대유행 제한의 일환으로 폐쇄되는 것이 우려된다.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교회 관계자들에게 일요일에 이동할 수 있는 제한된 허락은 긍정적인 발전이지만, 전체 상황을 평가할 때 기독교인들은 대유행 기간에 더 큰 불이익을 받았다.

소통

2020년 개신교 사회/교회 대표들은 정부나 공식 단체에서 주관하는 종교 단체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는 터키 개신교 공동체의 존재를 여전히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2020년 특히 대유행 기간에 이러한 소통 부족이 교회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020년에 몇몇 지자체와 긴밀한 소통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공직 및 기관들과 비슷한 수준의 소통을 하기 원한다. 개신교 공동체는 공공 기관, 특히 정부, 의회 및 지방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계속해서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권고 사항

2020년 5월 봉쇄령이 내린 이스탄불 갈라타사라이 광장 © Myrat,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정부 및 다른 공공기관간의 대화는 편견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분야의 경험을 통해 소통의 통로가 열리면 많은 문제가 빠르게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 범죄와 편협함은 2020년에 많이 감소했지만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고된 범죄가 처벌받지 않을 경우 심각한 우려와 불안감을 조성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단계는 기존의 모호한 법들을 개정하고 법제에서 혐오 발언과 증오 범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혐오 발언과 혐오 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을 높이고 대중을 교육하는 공영방송을 통해 대중들의 교육문화 인식에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킬 것이다.
  • 역사적인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은 개신교 공동체를 위한 예배 장소 설립 문제는 수년째 문제가 되고 있으며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표현의 기본권은 문제가 되는 쟁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방 및 중앙 당국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원 개념과 비슷하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작은 예배 장소 (채플)를 열 기회가 필요하다. 지방 자치단체, 문화부 및 기타 정부 기관이 소유하는 교회 건물의 경우 최소한 교회 신도들이 일요일 또는 종교적 절기의 예배를 위해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예배당 건립을 위한 부지 제공 등의 문제가 있을 때 공무원들은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 교회 협회가 직면한 문제를 고려하여 종교 목적, 예배 및 종교 전파를 위해 모일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 팬데믹 기간에 제한사항을 결정할 때 기독교 시민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 인권교육의 틀 안에서 관련 공무원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시도 대신에 투명한 의사소통 경로를 구축해야 한다.
  • 교육부는 가족들이 항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기독교 가정과 학생들이 직면한 낙인과 사회적 압박의 위험을 고려해 비무슬림의 권리와 종교 수업 면제 문제에 대해 사전에 학교에 알려야 한다. 공존과 신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발전을 위해 희망적 사고를 넘어서는 조치를 취하고 그 이행을 감시해야 한다.
  •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 수업에 대한 면제는 개인의 자기 선언에 근거해야 한다.
  • 중앙 및 지방 공무원, 특히 교육부를 통해 적극적으로 의제를 올려 다른 종교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이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터키 시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공유문화 구상을 장려해야 한다.
  •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라는 틀 안에서 혐오 발언, 선동적인 수사 및 편견으로 영상과 인쇄 출판물을 다루는 언론의 편협성에 대한 효과적이고 신속한 감독 메커니즘이 구축 되어야 한다. 사법당국은 공식적인 불만이 제기되기 전에 증오 범죄와 연설에 대한 공식 조치를 취해야 한다.
  • 혐오 발언에 대한 지역 언론인 (기자, 특파원 또는 칼럼니스트 등)의 인식을 높이고, 언론 기관 및 기타 시민 사회 단체가 이 문제에 대한 민감성을 조성하는 공식 교육을 요구해야 한다.
  • 혐오 발언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터키의 소셜 미디어 사무소 또는 소셜 미디어 회사의 터키 부서, 특히 모니터링에 종사하는 모든 직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유형의 불만 사항은 더 엄격하게 조사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위반하는 계정은 폐쇄되어야 하며, 관련 메커니즘이나 알고리즘을 구현하여 이러한 개인이 쉽게 다른 계정을 여는 것을 막아야 한다.
  • 개신교 공동체의 외국인들에게 갑자기 충격적인 방법으로 입국을 금지하는 정책이 해제되어야 한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어떤 범죄에도 기소되지 않았고 순전히 그들의 종교적 믿음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이 상황은 중단되어야 한다. 터키 입국 허용에 적합한지를 결정하는 정책은 객관적이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법치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가정 교회는 회원들이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그룹을 말하며 공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2. 2022년에 지역사회의 의견과 경험을 담은 더 폭넓은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3. 연합'이라는 이름은 2009년 이전에 사용되었다. http://www.protestankiliseler.org/?page_id=638
  4. 우리 사회는 믿음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 권리는 믿음을 갖지 않는 자유를 포함한다.
  5. https://www.hristiyanhaber.net/2020/07/29/200-gundur-kayip/
    https://www.hristiyanhaber.net/2020/07/29/hac- kararina-kuran-ayetli-gerekce/
    https://www.hristiyanhaber.net/2020/05/09/kilisenin-kapisini-yakmak-istedi/
    https://www.hristiyanhaber.net/2020/02/14/mezarda-bile-haca-tahammul-yok/
  6. 면제권은 1990년 7월 9일 종교교육총국 교육학습고등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적용되어 왔다. 이 결정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소수학교 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기독교와 유대교 신념을 가진 터키 시민은 종교문화 및 도덕지식 수업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만약 그들이 그 수업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부모로부터 서면 요청이 필요하다."
  7. https://www.hukukihaber.net/egitim/mahkeme-zorunlu-din-dersinden-muafiyet-sartini-hukuka-aykiri-buldu- h344451.2011
  8. https://siviltoplum.gov.tr/ankara/cok-onemli-duyuru-5253-sayili-dernekler-kanununda-bazi -degisiklikler-yapildi https://www.siviltoplum.gov.tr/ankara/dernekler-kanunu-ve-yardim-toplama-kanununda-onemli-degisiklikler-yapildi
  9. https://www.hukukihaber.net/egitim/mahkeme-zorunlu-din-dersinden-muafiyet-sartini-hukuka-aykiri-buldu- h344451.html

파트너 칼럼

어떻게 터키 교회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레벤트 큰란 목사

아름다운 나라, 소중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터키는 3개의 큰 바다에 놀라운 해안선이 있고 매우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이곳은 다양한 문화, 멋진 풍경, 놀라운 음식 그리고 다채로운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제국, 도시, 왕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시대를 거쳐 몰락하고 일어났던 다채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많은 유적지에 새겨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1세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안디옥 교회, 동굴교회가 있는 갑바도기아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큰 역할을 했던 성경적 장소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터키에는 오늘날 방문할 수 있는 수많은 신약성서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아나톨리아 본토 전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폐허 속에 서있는 역사적인 교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때 그리스도의 수많은 증인을 세계 구석구석에 보냈던 이 땅의 활기찼던 기독교에 관한 증거들입니다.

터키 사람들, 특히 아나톨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미소와 도움의 손길이 항상 준비되어 있으며, 다른 이들을 친절하게 환영합니다. 그들은 따뜻하고 성실하게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식탁에 앉아 식사하도록 초대받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만약 여러분이 기쁘게 초대에 응한다면, 그들은 여러분보다 더 행복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인구는 8천만 명이 넘으며, 주된 종교는 이슬람교입니다. 터키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복음을 거의 듣지 못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은 정말 슬픈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도 대부분의 터키인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복음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죽습니다.

터키 기독교의 역사

터키에서의 초기 기독교 활동은 특히 개신교 운동이 많았던 19세기 오스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개신교도들은 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대부분은 무슬림 투르크인이 아닌 아르메니아인이나 그리스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지만, 소수민족들에게도 유익한 일이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복음적인 교회 몇 곳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다가가 세례를 주는 것은 항상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복음이 드물게 전해지기는 했지만, 터키 사람들은 이해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터키인 사이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에 대한 많은 잘못된 정보, 오해 및 거짓 소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많은 적대감도 물론 있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복음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는 터키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현대 터키 공화국의 첫 기독교 사역자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극소수의 터키 기독교인들만 있었습니다. 70년대 터키에 살았던 한 기독교 외국인에 따르면 터키 기독교인의 수는 4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지하에 숨어 있었고 그들의 삶, 집, 직업 그리고 친구들을 잃을까 봐 그들의 믿음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터키인 기독교 지도자도, 터키인 복음 전도자 및 설교자 또는 성경 교사도 없었습니다. 터키인들이 세운 교회 역시 없었습니다. 따라서 최초의 외국인 사역자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받아들이고, 오랜 세월 동안 거의 열매를 보지 못한 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동안 이슬람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도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많은 것들은 그들의 수고에 빚진 것입니다. 그들은 영웅과도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활발한 기독교 활동과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운동이 있었던 나라에 사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꽤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과 수십년 전 터키의 모습입니다. 감사하게도 첫 번째 사역자들이 터키에 얼마나 많은 필요가 있는지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면서 기도하고 중보하며 복음과 함께 오기 위해 계획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터키어로 된 신약성서는 1980년대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역자들의 기도와 수고가 마침내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새로운 터키인 신자들이 생겨나고 1980~90년대에 점차적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하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 씨앗이 밭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고 복음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첫 번째 열매

그 이후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현재 터키에는 복음주의 교회와 컨퍼런스 및 단체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터키인 교회 지도자, 터키인 복음 전도자, 터키인 설교자 및 성경 교사들이 있습니다. 터키 사회 전반적으로 기독교 터키인의 존재를 점점 더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많은 터키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터키인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각한 오류이며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돈에 유혹당하고 세뇌당해 속아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터키인을 반역죄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들은 믿음 때문에 가족과 직업, 집과 심지어 그들의 목숨까지도 잃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터키의 젊은 기독교 신자 중 일부는 거짓과 비방을 견디고 그들의 삶과 가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면서, 수년간 터무니없는 법정 사건에 연루되어야 했습니다. 터키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은 2007년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로 인해 세 명의 기독교인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 명은 독일인 형제였고 다른 두 명은 터키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그분을 따르는 데 드는 높은 대가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셨지만, 터키 기독교인들의 작은 공동체는 그제야 이 냉혹한 현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도 요구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초기의 많은 적대감과 저항,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 교회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두 개의 터키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이 위성을 통해 방송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FM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이 있습니다. 성경은 현재 현대 터키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많은 신약성서가 전국에 배포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 자료와 성경 공부 교재, 영성과 제자도에 관한 서적 등이 번역 출간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터키 기독교인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일반적인 추산에 따르면, 터키 기독교인들의 수는 현재 7,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찾았지만 믿음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터키인들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터키 교회의 필요들

우리는 많은 분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수년에 걸친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바다의 한 방울 같습니다. 많은 일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우리 앞에는 여전히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구 8천만 명 중 7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작은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터키 사람들 대다수는 여전히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과 복음의 놀라운 은혜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모든 터키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그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터키 교회의 필요를 소개합니다.

1. 사랑

니다. 우리는 그가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불순종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인들에게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끝에서 우리는 그의 가장 큰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이 심판받아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15)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하늘 보좌를 떠나 죄와 어둠과 멸망이 가득한 세상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제물로 그의 삶을 바친 이유도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주된 동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터키 교회와 터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있습니까? 터키인들을 향한 사랑의 부담이 있습니까? 대다수의 터키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은혜 없이 오늘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다 죽는 것입니다

2. 기도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터키 교회와 터키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기도입니다. 터키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기 위해서는 터키에 있지 않아도 되고, 터키어를 몰라도 되고,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독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언어로든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역인지요! 또한 기도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거짓을 드러내고 부정과 속임수를 폭로하며 하나님의 빛으로 어둠을 파괴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분야에서 많은 사역이 이루어졌습니다. UPM(연합기도운동)의 연합중보기도회, 비전 트립, 기도 순례, 기도 편지 등 모두 터키에 매우 귀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터키를 위해 기도하는 전 세계의 기도 용사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터키에 초점을 맞춘 기도 네트워크에 연결되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나 기관에서 소그룹의 기도와 중보기도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터키 교회가 성장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터키 교회는 아주 어립니다. 교회가 성숙하고 진정한 구도자들이 일어나며, 교회의 새로운 제자, 목사 및 청지기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자신의 백성에게 다가갈 겸손한 마음을 가진 성령 충만한 터키 목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터키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 그리고 표적과 기사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꿈은 하나님께서 터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용하시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터키 사람들을 복음으로 부르는 풍성한 꿈들을 풀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터키 교회가 실제로 기도하기 시작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터키를 위해 기도하는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 때문에 터키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터키 기독교인에 의해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터키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강력한 기도의 겉옷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기도는 아직 터키 교회의 강력한 측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장이 기도에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고려할 때 기도의 중요성은 결코 최소화될 수 없습니다. 터키 교회가 정말로 기도와 중보로 불타오르면 터키 사람들에게 큰 영적 각성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지에 대한 간증은 중요합니다. 터키 기독교인들은 간증에 감동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 일의 모범을 통해 격려를 받으면 훨씬 더 열정적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산을 옮기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도에 관한 강력한 간증이 있습니까? 터키 사람들에게 일상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이러한 간증을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기도에 관한 제자 훈련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주된 방법은 물론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터키 기독교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기도 행진, 기도 여행, 중보기도 모임에 참여하여 그들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으로 그들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할 수 있는 방법을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3. 나눔

터키에서 매우 비극적인 일이 2019년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터키는 외국인 기독교 사역자들을 조직적으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형제자매가 가족과 함께 터키를 떠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땅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키웠고 많은 사랑을 주었고 신실하게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터키를 사랑하고 터키인을 사랑하며,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국가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매우 슬픈 이유로 그들을 추방했습니다! 진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극적인 일들의 결과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터키 교회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자매들이 여러 사역을 돕고 있었는데 이제 그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이제 이미 많은 짐을 지고 있는 지역의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비극적인 손실 외에도 코비드 19는 2020년 터키 교회에 또 다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일부 기독교인은 일자리를 잃고 일부는 급여가 감소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기본적인 필요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너무 작아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목사와 장로를 지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는 사역할 시간이 거의 없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합니다.

‘나눔’은 ‘협력’에 해당하는 사역일 수도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특히 이러한 때에 그 자체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눔을 권면합니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돕고, 강한 교회는 약한 교회를 돕고, 부유한 교회는 가난한 교회 등을 돕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주는 것’은 신중하게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사람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채널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와 조직 및 사람들이 이미 있습니다.

4. 협력

터키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이 있습니다. 번역, 출판, 인쇄 및 기독교 자료 배포 등이 있습니다. 또 기독교 지도자를 세우고 훈련하며, 지원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구현하고 개발하는 등의 일에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구체적인 부담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사역과 다른 사역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이라는 두 가지 주요 목적에 기여하게 됩니다.

교회 개척은 매우 중요한 사역입니다. 여러 나라의 많은 기독교 사역자가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제자화하기 위해 그들의 노력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추천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추방으로 인해 장기 체류를 계획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외국인이 터키에 장기간 거주하도록 요구하는 다른 사역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물론 짧은 방문은 가능합니다. 짧은 여행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은 작지만 중요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없는 지역으로의 기도 여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교회를 돕기 위해 세미나나 컨퍼런스를 통해 가르치는 것도 권장할 만한 사역입니다.

장기적으로 기존 터키 교회와 협력하면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지역 교회의 삶과 성장 및 사역에 기여하는 것은 귀중합니다. 이것은 외국인이 장기적으로 여기에서 살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현재 터키에는 100개가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도움이 필요한, 매우 작고 연약하며 고군분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선택하고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짧은 기간이 아니라 장기간의 동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번의 단기 방문, 온라인 회의 및 기타 장거리 지원 방법으로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많은 영적 전쟁이 있고 터키 교회의 성장은 느리고 점진적이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작은 그룹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잘 세워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파송하는 교회를 보는 것은 얼마나 큰 보상이 될까요! 매우 귀중한 일일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든 저는 스스로 시작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교회와 사역 또는 조직을 돕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지역 신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도록 돕는 것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외국인 사역자가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알기 위해 몇 년을 보내는 대신 터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의견과 상관없이, 마지막 부름에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라고 부르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기존의 사역과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일을 존중하며 겸손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오면 좋습니다. 또한 그들이 수년에 걸쳐 수집한 확고한 경험, 지식 및 분별력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여러분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것만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터키와 터키인들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역이 사랑에서 시작하여 지혜와 겸손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파트너 칼럼

흑해 지역을 향한 주님의 은혜와 비전

오르한 피차클랄 목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귀한 형제자매들께,
저는 터키 흑해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오르한 목사입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 교회의 사역과 지역 상황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또한 저와 우리 교회의 비전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영적인 공허함을 느낀 무슬림

저는 1971년 터키의 동쪽 지역 도시인 가지안텝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가족의 고향은 제가 태어난 도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저의 아버지의 할머니께서는 아람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소수인 아람인에 대한 박해와 억압이 있었고,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증조할머니의 아버지께서는 종교가 없었지만, 딸이 무슬림과 결혼하면 곁에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무슬림 가정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은 무슬림이 되었고, 저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게 되었습니다. 터키의 모든 어린이는 초등학교 여름 방학이 되면, 모스크에 가서 꾸란을 배웁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꾸란 전체를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영적으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미국 TV 시리즈 “초원의 집”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드라마의 내용은 미국의 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 시리즈에 나오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시고 “이 사람들은 이교도 (gâvur)들인데 우리보다 좋은 사람들 같구나. 도와주는 일을 좋아하고 교회에 가서 계속 기도하고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좋지 않은 뜻으로 이교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지만, 어렸을 때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은 언제나 저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공허함을 느끼던 때에 어머니가 하셨던 이 말씀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제가 살던 도시에서 도서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는 처음으로 성경 가판대가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한 테러 조직이 그곳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다른 종교들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든 사건이 저를 기독교에 관심을 두게 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신문에서 “당신은 복음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무료로 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보았고 바로 성경을 요청했습니다. 약 한 달 뒤에 요한복음이라고 적힌 책이 왔는데,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

터키어 요한복음 © 2021 bibleinmylanguage

저는 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꾸란을 읽을 때 먼저 정결 의식을 하고 꾸란을 배보다 높게 들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 옆에 기독교인 있었다면 그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제 주변에는 기독교인이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담대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정결 의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배보다 위에 성경을 들고 읽었습니다. 성경에는 위대하고 놀라운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큰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선지자이신 나사렛 예수가 매우 좋았고,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까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그저 선지자 중 한 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라고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과 귀한 복음을 통해 저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제 아내와 많은 친구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삼순

그 무렵 저는 큰 회사에서 수석 회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군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안탈리아에 있는 회사에서 회계 관리자를 찾고 있어. 원한다면 지원해 봐. 안탈리아는 좋은 지역이고, 더 높은 직책과 돈을 벌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큰 기회처럼 보였고 즉시 지원했습니다. 그 회사에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데, 제가 선발되었습니다. 안탈리아에서 일을 시작한 후에 직업과 관련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친구와 특별히 가까워졌고, 어느날 저녁 그와 밖에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오르한, 우리는 이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어. 각자 다른 도시에서 이곳으로 왔지. 그런데 너에게 한가지 고백할 것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이스탄불에 있는 한 교회에서 터키어 성경을 구했어.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정말 특별해. 원하면 너도 읽어 보지 않을래?”라고 말했습니다. 가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친밀함의 표시로 볼 키스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일어나 그에게 입맞춤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술에 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행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기독교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그의 사무실이나 제 사무실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에는 인터넷 사용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궁금한 부분을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읽은 성경에 대해 이해한 부분들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기독교인들을 찾기 시작했고 이스탄불에 있는 교회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안탈리아의 가정 모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만났고 그 모임에서 신약과 구약이 모두 있는 성경을 받았습니다. 저는 드디어 성경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를 다 읽기도 전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 이래로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로 한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날 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사역자들은 우리에게 와서 기회가 있는 대로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여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격려했고 이후에 교회에서 다른 형제들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였고, 세례를 위한 성경 공부가 끝난 후 1998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제가 일을 하던 곳과 교회의 거리는 120km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매 주일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항상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사람들은 주중에도 교회에 옵니다. 저는 주일에만 쉴 수 있어서 주일에만 교회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매주 120km를 왕복합니다. 안탈리아에 저의 일이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젊은 나이였지만 적지 않은 돈을 벌었습니다. 제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었고, 한동안 이스라엘에 가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과 차,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은행에 일부의 돈도 저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알게 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사람이 저에게 안탈리아 중심에서 동업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안탈리아에서 일하게 되면 계속 교회에 있을 수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면 더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조사해보기도 전에 승낙해 버렸습니다. 좋은 장소를 선택하여 회사를 설립했고, 모든 비용은 제가 지불했습니다. 동업하기로 한 사람은 나중에 비용을 대기로 했습니다. 저는 회사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 많은 시간을 가족과 그리고 교회를 위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그가 사기꾼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회사에 왔을 때 회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은행과 다른 사람들에게 회사 이름으로 많은 부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부채를 갚았습니다. 삶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저의 잘못된 생각이 저 자신과 가족들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장도 없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저를 잘 아는 안탈리아 교회의 목사님이 저에게 “삼순에 가지 않겠습니까? 그곳에서 사역하는 한 사역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터키인 사역자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와 이야기하였고, 아내는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순으로 이사했습니다. 삼순에는 기독교인이 없었고 저는 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 터키에서 웹사이트 만들기가 유행하였는데 저도 기독교를 알리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이트 개설 후 약 2주 후에 한 소녀가 성경을 요청했고 우리는 성경을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그 소녀는 한 달 후에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 소녀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했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성경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요청한 사람이 몇 달 동안 6~7명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교회의 비전

저는 마이애미 국제신학교에서 터키어 과정으로 4년 동안 신학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에 우리 모임은 지속해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우리 교회의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 교회의 비전이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한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르한, 네가 안탈리아에 살았을 때 교회는 너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역자들이너에게 와서 성경을 가르쳤다. 흑해 지역에는 17개 도시가 있지만 교회가 없으니 너 역시 그 도시들에 가서 복음을 전해라” 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은혜와 비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계속 삼순에서 가까운 도시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사역도 계속되었고, 성경을 요청하거나 궁금해하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만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가서 도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이즈미르에서 사역하시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르한, 지금 두 명의 한국인 형제들과 함께 있는데, 그들이 터키의 교회들을 방문하기 원하고 특별히 삼순 교회도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방문이 가능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미소가 가득한 얼굴을 한 사이먼과 피터라는 두 친절한 사람이 삼순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월세로 가정집을 임대해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교회 위층에 있는 방에서 지냈습니다. 언어가 달라서 통역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대화의 시간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겸손한 두 형제와 교제하면서, 그들은 SWM이라는 단체에서 왔으며, 터키 안에 주님의 몸을 만들고 그 몸을 강하게 하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는 단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시 우리 교회에 방문하였고, 저에게 터키 지도를 하나 주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있는 도시와 교회가 없는 도시가 표시된 지도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격려해주었고, 저는 그 지도를 책상 위에 두고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연합중보기도회를 통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형제자매들이 터키를 위해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터키의 복음화를 위해 강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SWM과 동역을 통한 사역의 확장

SWM 리더들과

주님께서 흑해 지역의 오르두, 시놉 그리고 초룸에 하나님의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현재는 아마시아에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십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약하고 힘없는 믿음을 봅니다. 앞에서 나누었듯이 저는 무슬림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새로 세워진 교회나 새로운 성도들도 저와 같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힘이 없고, 실업자, 난민 또는 은퇴했거나 저임금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이 교회를 지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교회의 전기 및 가스비를 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성도들이 교회의 사역자들과 전도자들을 위한 사역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들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SWM과 동역하는 많은 교회가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이전보다 빠르고 강하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세가 기도할 때에 아론과 훌이 팔을 드는 것을 도왔던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는 팔을 들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삼순 교회 전경

삼순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월세로 사용하던 예배 장소는 우리에게 작았습니다. 사이먼 형제가 방문하여 저에게 교회를 위해서 어떤 기도가 필요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물을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건물 교회는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 매우 필요했습니다. 또한 월세를 내는 것과 18년간 5번의 이사를 하는 일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는 1리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저 기도를 부탁할 따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교회 건물을 위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교회 물을 위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고, 비전에 대한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6~7개월 안에 필요한 비용들을 채워주셨습니다. 7~8개월 후에는 터키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을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시작할 때 저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셨고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교회는 점차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도시에 모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에 맞닥뜨렸습니다. 몇몇 도시에 모임들이 생겼는데, 누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한 이란인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역자는 전기와 관련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터키의 고용 정책에 따라 일주일에 6일을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휴일은 주일뿐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무슬림이기에 직업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라크인 모임이 있습니다. 이라크인 모임을 섬기는 사역자도 식당에서 일을 합니다. 그는 주일에도 일을 합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만 허락을 받아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바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복음을 듣고 모임에 나오려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관계를 맺고 양육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일과 사역을 병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2번 정도 허락을 받고, 3번째가 되면 일을 그만 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터키의 상황에서 전임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필요한 일입니다. SWM 선교회를 통한 교회들의 지원은 우리가 교회개척자 (CP)들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는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매년 교회에서 30여 명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에 출석하여 충성스러운 신앙인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비전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흑해에서 500km 이상 멀리 떨어진 도시에 가게 되었고, 악사라이와 에스키쉐히르에서 20명 이상의 성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떠났지만 그들은 스스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SWM을 통해 교회개척자로 지원을 받는 사역자들은 주일에는 삼순에서 찬양과 설교, 그리고 다양한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가족들을 집에 두고 시놉으로 갑니다. 일부는 오르두, 초룸 아마시아와 같은 도시로 갑니다. 삼순에서 150~2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있는 형제들과 모임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삼순 교회
시놉교회
초룸교회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르두교회

어떤 형제들은 “왜 난민들을 도와야 합니까? 왜 그들을 위해 장소를 빌려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난민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오르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오르두를 위해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곳의 오래된 교회 건물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뒷자리에서 어떤 사람들이 와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기도 후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이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없어서, 우리처럼 이곳에 와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도시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며, 하나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르두에 있는 또 다른 오래된 교회 (이 교회는 현재 극장이 되었습니다) 맞은편에 작고 볼품없는 가게를 주님의 도우심으로 임대를 했습니다. 이란 성도들은 스스로 가게를 고치고, 그곳에서 난민 가족들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1달 후에는 20명, 2달 후에는 25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문에 교회라고 적어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때로 터키인들은 오르두를 방문하는 우리에게 와서 “당신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터키의 젊은 사람들을 속이려고 왔습니다. 이곳에는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왜 오르두에서 교회를 시작하려 합니까?”라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이곳에 이미 25~30명의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러자 터키인들의 비판이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이제 오르두에 10명 이상의 터키인이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터키어 성경을 배포하고, 매달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악사라이 세례자

현재 세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 더 편안한 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터키는 중간 기착지 중에 한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일부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터키에 와있습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흑해 지역에도 수천 명의 난민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하나님을 명확히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심장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기회와 비전을 주셨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형제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영적인 도움과 육적인 필요에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으로 우리 교회에는 이라크인 사역자와 이란인 사역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난민으로 오게 된 신앙인들과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난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난민들은 터키보다 편안한 나라로 가기 원합니다. 그런 나라에 가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관한 예가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한 젊은이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스위스로 가게 되었고, 현재 스위스에서 아프간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 이란인 목사는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미국에서 이란인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또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난민이 독일에서 교회의 충성된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듣고, 그의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본 후에 주님께 충성된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그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다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주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삶의 모든 순간에 기억하고 이것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이 난민들이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은 후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팔이 들려 있도록 기도로 도와주시고 아낌없는 도움을 주신 교회와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만나고 형제 자매가 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기도해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터키의 교회

흑해의 교회와 터키의 교회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 마음에 평안함이 가득합니다. 먼저 터키의 교회들은 앞으로 경제적으로 강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의 아들은 의사이고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할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기술자, 선생님, 의사 또는 다른 좋은 직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다음 세대에서 교회의 사역자들이 되고, 또한 교회에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터키 교회는 지원을 받지 않고 대신 더 어려운 나라의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스스로가 전도자가 되어 가거나 다른 전도자들을 도울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어렵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는 더 안정적인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예를들어 주변 사람들은 저나 다른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돈 때문에 종교를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슬림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바꾼 이유가 어떠한 보상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이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대는 터키 교회의 모든 면에서 더 강하고 좋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오르한 목사와 삼순교회 사역자들

터키의 무슬림들은 아랍인들과 다릅니다. 터키인들의 다른 종교에 대한 관점은 유럽, 미국, 한국과 같은 방식이 아닌 터키만의 무슬림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후에 큰 열정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합니다. 세례를 받기 원하고, 매주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세례 교육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교회 참석률이 줄어듭니다. 어쩌면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참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에 그리고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라고 이야기하면 저에게 “오르한 목사님, 저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왜 제가 계속해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슬림일 때 매일 기도하지 않고 오직 바이람 (명절)에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예전의 생각들을 버리지 못합니다.

룻기서를 보면,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에게 데리고 갈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 3장 3절은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라고 말씀합니다. 의복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이전의 옷들은 죽은 전 남편에게 속한 낡은 옷들입니다. 보아스 옆으로 갈 때, 즉 새로운 신랑에게 갈 때에는 새로운 의복을 입고 가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터키의 기독교인들은 새롭게 되었음에도 헌 옷을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기독교인이며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성도들 또한 교회의 한 부분으로 자랍니다. 이 사람들이 새로운 옷을 입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흑해 지역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흑해 지역은 터키에서 가장 어렵고, 강한 지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구에 비해 가장 적은 사역자가 있는 지역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민족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7년 전 한 청년이 저를 죽이려고 계획했지만 일을 실행하기 직전에 잡혔습니다. 그 일 이후로 저는 경찰과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도 여러 차례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24시간 경찰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합니다. 어려운 땅이지만 이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큰일을 행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오래 걸립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방문하는 다른 사역자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에 가서 한 사람에게 성경을 주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30~40분 정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주님을 영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 지역은 이렇지 않기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주기 전에 성경이 변하지 않았음을 긴 시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 명의 신이 아니라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가져온 책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교육을 수년 동안 받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제가 한 말이 믿어지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그들을 만져 주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보내 주시고 일꾼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나눈 것처럼 하나님은 흑해 지역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가 없는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주님의 도움이 계속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를 섬기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터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현재 저와 함께 사역하는 몇 명의 청년 사역자들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직업으로 인하여 사역을 중단하거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게 된다면 제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우리의 기도제목을 여러분들과 나눌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바울 사도와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 믿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주 되시고,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합니다. 기도동역자 여러분과 동역 교회들이 주신 많은 도움과 헌신을 주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께 가득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파트너 칼럼

Let Go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아지즈 사역자

The dead man came out, his hands and feet wrapped with strips of linen, and a cloth around his face. Jesus said to them, “Take off the grave clothes and let him go.” (John 11: 44 NIV)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나사로는 4일 전에 죽었지만,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바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그의 얼굴은 천으로 싸여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사로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거듭났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사람 중 제가 첫 번째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묶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우상이 있고, 생각 속에는 강한 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이든 문화적이든 믿음의 단계를 밟기 전에 특정한 배경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은 수년 동안의 신념, 원칙, 사상 및 전통의 영향을 받아 성격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의 영역인 스올에 갇혀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사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새로운 신앙인도 그와 비슷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자라온 것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신을 묶고 있고 올바른 방식의 영적인 성장을 막는 부정적인 문화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건강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이자 신부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기심과 나 또는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사도적 교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나누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가 자유롭게 되도록 돕는 방법들을 주셨습니다. 이 방법의 하나는 바로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모인 그분의 몸, 교회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사로를 풀어 놓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무덤 입구를 막는 큰 돌을 옮기는 데 참여했던 나사로의 주변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도록 도움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하여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가로막던 거대한 정신적, 영적 돌을 옮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여기서 끝일까요?나흘 동안 죽음의 상태였던 나사로는 근육과 정맥이 말라버려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의 베와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기고 그가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나사로의 혈액이 순환되어 자연스럽게 정맥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리고 그의 근육들이 점차 살아날 때까지, 그가 혼자서 다시 걸을 수 있는 순간까지 잠시 기대어 있는 것을 상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구속되어 있던 것을 벗고 마음과 생각을 묶었던 천을 풀지 않는 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초기에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손을 잡고 기대는 데에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개척하는 형제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까요? 새로 태어난 교회는 이와 비슷합니다. 막 탄생한 교회는 작은 일을 시작하지만, 혼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교회들의 지원과 도움이 필요하며,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재정이나 교육적인 부분에서 핵심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사도적 몸인 교회는 이제 막 시작된 개척 교회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여정에서 자립을 도와줍니다. 개척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사도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장한 후 새로운 교회를 지원하고 다른 곳에 다른 교회를 개척할 것입니다.

교회들을 향한 도전

새로 태어난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형제 자매의 필요를 겸손하게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개척교회 지도자로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교회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부탁할 수 있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겸손하게 이 손에 기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약해진 다리와 장기에 의존해서 앞으로 걸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몸(교회)에 우리의 혈액을 재순환시키는 것을 도와줄 사역자들과 자매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감히 인정해야 합니다.

기존 교회들에게 도전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영적인 아이 같은 형제가 의지하고 도움과 기댈 것을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해서 우리는 버팀목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형제와 자매의 역할을 대신해서 ‘풀어 놓아’ 주는 것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교회로서 우리는 겸손과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난 기독교 공동체를 지지하고 세우기 위해 자원과 시간, 노력 중 일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립할 수 있고 스스로 (놓아) 다닐 수 있도록 아기와 같은 기독교 공동체를 돕고 지원하기 위해 우리의 호화로운 휴식시간의 일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이 공동체가 충분히 성숙해졌을 때, 여기서 우리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짝 물러나서 놓아줄 준비가 되었습니까?

세 가지 기도 요청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 기도할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만약 여러분이 손과 발에 아직 어떤 묶임이 있고, 마음과 생각에 ‘놓이지’ 못하게 하는 천으로 싸여 있다면, 그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둘째, 아직 ‘놓임’ 받지 못한 형제나 자매가 기억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풀어 놓아주시는’ 여정에서 여러분에게 기대고 있는 형제나 자매의 약함을 견딜 수 있도록 힘과 인내를 구하십시오.
셋째, 목사, 교회 지도자, 장로, 집사, 심지어 교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서 갓 태어난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를 알고 있다면, 성령께서 지혜의 입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은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어린 형제들을 돕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채워주신 은혜를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교회가 초기 기독교 때처럼 사도적 교회로서 역할을 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도움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아지즈 사역자는 시리아 난민으로 터키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현재 안디옥 개신교회에서 아랍어 예배를 섬기고 있으며, 난민사역 및 청소년 사역을 돕고 있습니다.

파트너 칼럼

당신은 신의 은총을 입은 자 무슬림 여성의 믿음과 꾸란

김선희 사역자

이슬람 순니 시아파 분포 (Ghibar derivative work: Keltorrics,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인 이슬람은 19억의 추종자와 함께 세계 인구의 24.9%를 차지합니다. 무슬림들은 중동,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등 세계 50여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오직 알라신 한 분만을 전능자로 믿습니다.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 (AD 570~632년)가 받은 계시를 적은 경전을 꾸란이라고 부르며,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의 책으로 여깁니다. 꾸란은 구어체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이슬람의 근본 신앙과 사상을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꾸란을 읽고 외우며 의심 없이 내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디스는 꾸란의 설명서로 무슬림의 행동 지침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담은 책입니다.

이슬람은 크게 순니파, 시아파, 수피 (신비주의) 3개의 종파로 나뉩니다. 순니파는 무슬림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며, 16억 인구를 가진 가장 큰 종파로 정복자 칼리프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르는 시아파는 전체 무슬림의 13% 정도로 약 2억 3천 명입니다. 나머지 수피 이슬람은 대중에게 우회적, 간접적으로 다가가며 전통 음악, 춤, 그림 같은 것으로 이슬람을 표현합니다. 터키의 메블라나 형식의 춤은 수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스크가 아닌 예배 장소 (젬 에브, Cem Evi) 같은 곳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교제합니다. 수피 이슬람은 여러 지역과 나라에서 배척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피 이슬람의 한 종파인 알레비 집단은 순니 이슬람으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받은 역사가 있으며, 이들은 아직도 순니 무슬림 종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al-islām)은 ‘복종한다’라는 뜻으로 이슬람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그리고 맹목적인 무슬림의 삶을 따르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는 “신은 오직 알라 한 분만이 존재하며 꾸란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전이며,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는 신의 메신저이다”라고 대중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무슬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신앙고백인 샤하다 (Shahada), 하루 다섯 번 기도인 살라트 (Salat), 자선 행위인 자카트 (Zakat), 라마단 금식을 지키는 사움 (Sawm), 메카 순례 하즈 (Hajj)의 다섯 가지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의무는 경건한 무슬림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더 큰 믿음이 요구될 때는 ‘거룩한 전쟁 (지하드)’에 가담하여 이슬람의 정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평화적인 종교임을 가장하려고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19세기 근대화 이후 프랑스 법치주의를 준용하면서 헌법과 법률 체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샤리아법은 이슬람 사회에 지배적입니다. 이슬람의 샤리아 법은 꾸란에 근거한 엄격한 행동의 제한과 무자비한 처벌로 모두에게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했을 때 그 사람의 손을 절단하거나, 남녀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을 때는 여성을 투석으로 사형시키는 등의 극단적인 처벌을 합니다. 사건 사고의 전말을 시간을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지역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에 의해 현장에서 바로 처벌하는 것은 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사실을 증언하는데 어려움을 줍니다. 또한 한 명의 남성이 두 명의 여성 증언과 같다는 논리를 내세움으로 특별히 나약한 무슬림 여성에게 가해지는 처벌은 여성의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만듭니다.

이슬람은 1400년의 세월 동안 지역 공동체 안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쳐왔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 공동체와 차별적인 성 역할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취약한 무슬림 여성의 권리와 역할을 향상시켜 여성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며 현대 사회의 요구에 맞게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슬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향상되어가고 그들의 활동 범위가 늘어나는 가운데서 함께 동등한 역할을 담당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슬람은 전 세계의 인구 증가와 함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며, 앞으로 세계 변화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슬람 사회를 좀 더 깊게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글에서는 이들의 전통과 삶 그리고 가정에서 모든 가사와 자녀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의 위치와 권리에 대하여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1. 무슬림 여성의 기본 신앙

1) 무슬림 여성의 정체성
무슬림 여성의 복장

이슬람을 국교로 신봉하는 나라의 무슬림 여성은 자라면서 배운 관습적인 행동 양식과 맹목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 우월주의와 함께 강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본 신앙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배타적 태도를 취합니다.

무슬림 여성은 전능자 한 분은 오직 알라신이며,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를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슬람만이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자신의 장래와 가족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슬람의 다섯 가지 의무를 잘 따르는 것이 정숙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그럴 때 알라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헌신적인 깊은 신앙을 요구한다면 여섯 번째 의무인 지하드에 가담한 자의 신부가 되어 알라의 뜻을 이루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1)

무슬림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전통 의상인 차도르나 부르카를 입어 자신의 몸 전체를 가리거나, 히잡을 머리에 둘러 공중 앞에서 종교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무채색이나 짙은 색의 외출복으로 꾸란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남성이 성적으로 유혹당하지 않도록 여성의 몸을 감추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초경이 시작될 무렵부터 남자를 유혹하게 만드는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여 히잡으로 가리는 것을 시작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차도르나 부르카를 입어서 결혼 전까지 남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순결을 지키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전통 복장으로 신체를 가리거나 머리에 히잡을 쓰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이 지배적입니다.(2)

“하티제는 독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터키 여성입니다. 그녀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히잡을 쓸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녀가 히잡을 쓰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했을 때 그녀는 터키의 삼촌 집으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티제는 여성으로서 히잡을 쓰지 않고 밖에 나가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느낌이 든다고 말합니다.”

무슬림 여성에게 전통 의상을 입도록 권유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가족이 어떤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행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파트마는 교사로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히잡을 쓰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여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길 원했으며 형식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형식적인 종교 모습이 필요치 않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 휴가에서 그녀의 남동생이 심장마비로 혼자서 죽어갔다는 사실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히잡을 쓰지 않아서 알라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가족에게 불행이 오지 않도록 히잡을 쓰고 다닙니다.”

경건한 무슬림 여성은 꾸란에서 요구하는 히잡이나 차도르를 입어야 알라신의 노여움을 피하고, 가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회의 불건전한 퇴폐를 막는 것도 남성들을 성적 유혹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꾸란에서 요구하는 무슬림 의상을 입음으로써 해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3)

2) 무슬림 여성의 헌신적 신앙

무슬림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최고의 신앙적인 헌신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지난 2월 영국 고등법원에서 샤미마 베굼에 대한 시민권 거부 관련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2015년 당시 15세로 런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거룩한 전쟁에서 이슬람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무슬림 남성들을 위해 ‘지하드 신부’가 될 것이라 선언한 후에, 두 명의 학교 친구들과 함께 터키를 통해 시리아로 들어가 IS에 합류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IS 대원과 결혼을 해서 3명의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그녀가 시리아 IS 캠프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영국 정부와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본국으로 되돌아올 것을 명령받았지만 무시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IS 캠프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으며, 그녀의 세 번째 아들이 죽었을 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난민보호소에서 인권 변호사를 통해 런던의 가족 품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절차를 밟았지만, 최종 판결에서 그녀의 시민권은 거부되었습니다.

샤미마 베굼과 같이 유럽에 이주해 사는 많은 무슬림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함께 유럽 사회의 생활 구조에 심각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과 지역 공동체에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배우고 믿는 십 대들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과 함께 이슬람 사회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보입니다. 유럽 사회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거룩한 충성심과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4)

이슬람 테러 집단 IS는 이슬람의 정의를 위한 거룩한 전쟁에 관한 수많은 동영상과 홍보물을 젊은이들에게 전달하여 감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슬림 여성에게 최고의 헌신적 신앙심을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샤미마 베굼과 같은 십 대 무슬림 여성은 꾸란에서 요구하는 차도르나 히잡으로 신체의 일부를 가리는 것보다 최고의 헌신적 신앙으로 거룩한 전쟁의 지하드 신부(5)가 되는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충성심과 공동체 단결의식이 맞물려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쉽게 보여줄 기회가 되고, 헌신적인 무슬림 여성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 대 무슬림 여성을 자극하는 ‘지하드의 신부’가 신앙의 헌신적 최고의 단계라면 과연 꾸란에서는 무슬림 여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2. 꾸란에서 언급하는 무슬림 여성

1) 꾸란에서 신앙의 본이 되는 여성

꾸란에서 묘사하는 무슬림 여성은 누구이며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무슬림 여성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첫째 부인이자 든든한 재정 후원자인 카디자를 전설적인 인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함마드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미망인으로 무함마드의 정신적, 경제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맹목적인 충성과 무함마드에 대한 절대 복종은 이슬람의 여성의 근본 신앙이 되었지만, 사실 꾸란에서 그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꾸란은 오히려 예수의 탄생에 등장하는 동정녀 마리아를 알라에게 칭찬받은 거룩한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꾸란 19장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마리아의 이름이 신약성경보다 더 많이 거론되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의 내용은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다르게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와 섞여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꾸란의 19: 20~22에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그녀는 “어느 남자와도 접촉하지 아니했고 또한 부정을 저지르지 아니했는데, 제가 어떻게 아들을 가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천사는 그녀에게 알라신에게는 쉬운 일이며 “그 아들은 백성을 위한 징표가 될 것이다. 너는 알라의 은총을 입은 자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6) 라고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미흐랍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향해 동쪽으로 세워진 기도 처소)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천사가 다가와 그녀의 순결과 함께 신의 영이 그녀의 몸에 생기를 넣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계시했습니다. 또한 “이슬람은 유일한 종교이며, 나는 너희의 유일신 알라이니, 나만을 경배하라”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알라로부터 “영 (ruh)과 계시 (Kerem 케렘)”를 받은 최초의 여성으로 선지자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남성의 권위에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여성으로 남게 합니다.

꾸란의 4: 34에서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알라신이 남성에게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에” 여성은 반드시 남성의 지배와 보호 아래 있어야 합니다. 알라는 남성을 여성보다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여성은 사회적 적응력이 떨어지고 남성보다 무지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마리아가 무슬림 여성 사이에 존경을 받고, 새로 태어난 여자아이들의 이름으로 선호되는 것은 오직 그녀만이 꾸란에서 알라신에게 칭찬받은 유일한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알라의 은총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꾸란 수라 19:21)

마리아는 여러 번 꾸란에서 알라의 은총을 받은 자로 나타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 그녀는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에 선지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꾸란에서 요구하는 선지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일에 참여하여 만나는 사람들과 거침없이 논쟁하고 이슬람을 설득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남성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2) 꾸란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

무슬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꾸란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꾸란 4장은 ‘여성의 장’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은 이슬람의 알라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등함을 보이며,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남자나 여자는 낙원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7)또한 꾸란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영을 가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성의 영은 남성의 영과 같아서 감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이 가사를 돌보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여성의 출산은 자손을 번성시키는 중요한 것이므로 이것을 실행한 여성은 남성과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부모의 자격으로 존경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8)

무슬림 여성이 이슬람 공동체의 인구를 증가시키고 물질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며, 그 의무를 다한 여성만이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하는 것도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며, 자녀가 할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도 무슬림 여성의 의무입니다. 할례는 주로 십 대가 되기 전 남자아이에게 이루어지며 이것은 전통예식과 함께 무슬림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에게도 할례를 요구하여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만, 순종적인 무슬림 여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의식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순종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무슬림 여성이 이슬람의 모든 의무를 따르고 난 뒤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수 있을까요? 무슬림 여성이 낙원에 들어가는 숫자는 아주 제한적이며, 그곳에서 여성은 남성의 존재를 높이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무슬림 여성이 세상에 살 동안 평생 가사를 돌보고 양육하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에덴의 낙원에 갈 수 있는 여성은 77명의 아름다운 처녀들 입니다.

“에덴의 낙원은 바로 남성들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나니 남성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풍성한 과일과 달콤한 술로 즐길 것이며, 같은 나이의 눈을 내리감은 순결한 여성들이 남성들 옆에서 시중을 들것이다” (꾸란 수라 38:50-52)

무슬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권리를 나타내며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관습과 사회 구조는 여성을 나약한 존재로 여기고 언제나 남성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슬림 여성이 밖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 남성은 십 대의 소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남성의 보호가 필요한 여성은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상실하기 쉬우며 성의 불균형을 느끼게 됩니다. 꾸란에 의해 알라가 창조한 남성은 여성보다 항상 강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며 여성을 반드시 지배해야 합니다. 이에 여성은 자아 존중이 낮은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아 존중이 낮은 여성들이 있는 사회는 결국 불균형적인 구조를 이룰 것이며, 무조건 강한 자 남성에게 의존하는 모순된 공동체를 만들 것입니다. 이슬람 사회의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하여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며,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전통적인 구조 형태를 먼저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스크의 한 공간을 무슬림 여성을 위한 기도 처소로 지정하여, 그곳에서 여성들이 금요일마다 행하는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등 모든 여성이 알라신이 만든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대의 젊고 활기찬 무슬림 여성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여 성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무슬림 여성의 명예와 희생

1) 명예살인과 일부다처제

이슬람 사회에서 무슬림 여성이 부적절한 행동을 하여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에 수치를 안겨준다면 그녀는 가차 없이 가족의 남성으로부터 명예살인을 당할 수 있습니다.

“꿈 많은 십 대 소녀 하잘은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으며, 마을을 뛰어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남자를 모르는 순진한 소녀였던 그녀는 집에 처음 방문한 사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하잘의 사촌은 그녀에게 마을을 떠나 함께 결혼해서 살 것을 요구했으며, 그녀는 사촌을 믿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잘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친척들에게 알렸고, 하잘은 친척 남자들의 손에 의해 다른 지방의 호텔 방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명예살인이 일어나는 이유는 남성의 성적 호기심과 유혹을 자극하는 것을 무조건 여성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족과 공동체에 수치심을 안겨준 여성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 여성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희생을 치러야 그녀의 명예가 회복되며, 마을 공동체에 안겨준 수치심과 소문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남은 가족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관습으로 이어온 명예살인은 많은 여성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많은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런 일이 서슴없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은 남성 중심의 지배적 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구조에 따른 것입니다. 강한 힘은 연약한 자를 보호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무슬림 여성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희생은 꾸란에서 허용하는 일부다처제입니다. 무슬림 여성은 15세가 지나면 서둘러 결혼을 합니다. 이들은 일찍 결혼하여 여성의 역할인 출산을 감당하고 남성의 보호 아래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성은 결혼식 전날까지도 신랑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원하지 않는 남성과 결혼해 평생을 함께 살아가며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무슬림 여성은 남편이 원할 때 언제든 이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성은 능력에 따라 여러 명의 부인을 두어 한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여러 부인과의 결혼은 종교 지도자 이맘에 의해 간단하게 이루어지며, 결혼하는 여성들에 대한 법적 보호나 책임을 묻지도 않습니다. 일부다처제는 여러 가지 취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가족의 신뢰를 파괴하는 근본 요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많은 여성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생명의 위협과 사회 불신을 가져오기 때문에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2) 무슬림 여성의 문맹률과 폭력의 정당성

무슬림 여성의 기본 권리 가운데 여전히 논쟁의 대상인 것은 여자아이들을 문맹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무슬림 여성이 동등한 의무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문맹 및 경제적, 사회적, 법률적인 무지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7명의 자녀를 둔 무슬림 여성 아이세는 한 번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강요에 의해 가사를 돌보는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녀는 16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정해준 친족과 결혼을 하여 자녀들을 출산하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딸 아이세가 생활고를 면할 수 있도록 재산을 남겨 주었는데, 아이세는 남편이 건넨 이름 모를 증명서에 서명을 한 후 이혼을 당했습니다. 아이세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으며, 법적인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니는 일터에서도 정당한 권리 청구를 할 수 없었으며, 그녀의 일곱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필요한 증명서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 보조금을 신청해 도움을 받고 싶어도 글을 모르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이슬람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교육 센터의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151개국 가운데 이슬람 여성은 다른 종교 집단의 여성보다 교육 수준이 낮습니다. 무슬림 여성의 교육 수준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낮은데, 여성의 2/3 정도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9)꾸란 96장 3~5절을 보면 “읽으라 알라는 자비로운 분으로 연필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인간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노라” (10)고 합니다. 전능자 알라신은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기에 필요한 '읽기'를 가르쳐주어 인간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종교적으로는 알라의 가르침을 읽고 깨달아 진정한 무슬림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역시 문맹이었습니다. 그가 메카 근처 히라산 동굴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광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계시의 책을 읽으라고 합니다. 무함마드가 읽지 못한다고 말하자, 천사는 기적을 베풀어서 꾸란을 줍니다.(11) 그러나 무슬림 여성이 지식을 배우기 위해 히잡을 쓰고 혼자서 집을 떠나 다른 남성들과 얼굴을 맞대고 배우는 것은 꾸란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여성을 가르치는 남성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 경우에는 잘못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여성은 오직 여성 교사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여성이 사무를 보는 곳에서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구조는 남녀가 함께 모여서 바쁘고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오직 성별로 구분지어서 사회 구조를 만든다면 여러 부분에서 불균형이 초래될 것입니다. 물론 부유한 이슬람 국가나 일부 중동에서는 여성 교육에 많은 변화를 보이고 여성의 사회 참여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문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수는 간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슬림 여성으로 살아갈 때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꾸란에서 언급하는 신체적 폭력입니다. 꾸란 4:34을 보면, 만약 여성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면, 남성은 여성에게 먼저 충고하고 잠자리를 같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가볍게 때려 주라고 합니다.(12) 이 구절을 해석하는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특별히 얼굴이나 손 등 신체의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곳을 제외한 부분에 학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정 폭력은 무슬림 여성의 존재감과 권리를 상실시키는 큰 이유입니다. 강한 남성들로부터 자행되는 폭력과 구타는 약한 여성을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불균형적인 구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남성 중심의 이기적인 행동을 방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계속해서 반복될 때는 이슬람 사회에서 원하는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찾는 데 많은 방해 요소가 될 것입니다.

“25년간 지체 장애를 지닌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는 셀마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은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심하게 뼈가 휘어지는 척추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작은 아들이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매일 아들을 업고 등교했으며,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도록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감당해야 할 병원비와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족 전체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녀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온종일 고된 노동으로 살림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원하는 요구에 반응하지 않을 경우 그녀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학대와 폭력 그리고 욕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작은 아들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 원인은 셀마에게 있다며 폭력을 행사하고 셀마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꾸란에서 요구하는 순종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남성의 폭력도 감당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은 가정의 모든 가사와 함께 육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고 양육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며,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여성이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녀 양육에 많은 심적 부담을 안고 있는 한편 남성의 감정 변화에 따라서 행해지는 폭력에 노출되어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이와 같은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격려하고 협력하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성의 존재가 인정된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서 여성들은 더 지혜롭고 풍성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성의 권위와 지위를 넘어서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가정에서 근절되어야 하며 모두가 함께 신의 창조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무슬림 여성과 복음

1) 무슬림 여성이 믿는 예수

무슬림 여성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는 단지 선지자 중의 한 분이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지 않고 하늘로 바로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알라신이 예수를 대신해 가룟 유다를 세워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고 주 장합니다.(13)2천년 전 예수를 박해하는 무리와 집행관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수와 비슷한 형상의 다른 사람 (가룟 유다)을 세워 대신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세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면 알라신은 사람들을 속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2천 년 전 로마의 집행관들과 예수의 죽음을 원하는 군중들을 속이고 굳이 선지자 예수의 죽음을 막아야 할 뚜렷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이를 증명하려면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꾸란의 학자들이 명확한 근거와 이론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주장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만큼 오랜 시간 달리지 않았고,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꾸란에서 언급하는 십자가의 사건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꾸란은 명확하게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꾸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은 금기이며, 신실한 무슬림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알라에게 맡기고 가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2) 무슬림 여성의 간증과 복음의 능력

무슬림 여성이 주위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인정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오는 핍박과 따돌림, 생명의 위협까지 감당해야 할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과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는 무슬림 여성을 향해 주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보다 죄인 한 명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14)

대부분의 무슬림 여성은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어본적도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좋은 선지자이며 죄없이 거룩하게 살아온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의 가르침을 적은 성경은 변질되었기에 읽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건물을 제대로 본 적도, 공식적인 주일 예배에 참석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를 혼동시키고 젊은이들의 사고를 문란하게 만들며,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항상 저주의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가끔 미디어에 비치는 교회 건물의 예배나 결혼식을 담은 동영상은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교회를 악의 거처로 더 많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무슬림으로 살아온 휴리는 어느 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그녀의 거실에 찾아온 눈부신 빛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밝고 따뜻하여 그 빛이 주님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휴리는 세 딸과 남편을 깨웠으며,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게 했습니다. 그 후 휴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그녀는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휴리가 방문하는 마을 곳곳마다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병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치유가 일어나고, 고통받는 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개종은 마을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마을 공동체는 그녀의 가족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정착하여 텐트를 치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복음 전도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지역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무슬림 여성은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들에게 귀한 복음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든 자가 일어나고, 억압받고 갇힌자들이 악한 영에서 놓여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한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던 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간증합니다. 이들의 변화된 삶을 지켜본 가족이나 이웃들 역시 주님의 이름 앞에 큰 능력이 있음을 믿고 두려워합니다. “양치는 목축업을 하는 하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녀는 버스 정류소에서 한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죗값을 치렀다고 전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산 제사이며, 더 이상 양을 죽여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전했습니다. 그녀는 복음을 듣고 감격했으며 자기 아들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하리의 목장에 가서 아들의 치유를 위해 속죄 제물인 어린양을 살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는 물질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자유함을 얻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복음과 함께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제이네프는 첫 번째 남편의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도망쳤습니다. 그녀는 친구 집에 머물면서 한 남성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이네프의 두 번째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그녀는 배 속의 아이가 다운증후군으로 지적 장애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낙심하여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출산을 앞두고 제이네프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그녀의 친구 집에 찾아온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정식으로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며, 자신의 아이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제이네프와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건강하고 정상적인 아들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불리는 곳마다 권능이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과 함께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야살의 어머니는 16세에 결혼을 하여 자녀를 키울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딸을 출산했습니다. 야살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경험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야살의 부모는 그녀를 폭력적으로 키워왔으며 종종 화장실에 가두는 등 끊임없이 학대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울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녀는 부드럽고 인자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사는 지역에 단 하나의 교회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2시간 거리의 가정교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야살은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거듭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직장인 병원에서 복음 전도자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녀의 변화된 얼굴은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함께 기도했을 때 환자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그녀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갈급해 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하는 그녀에게 부모는 여러 가지로 시험을 주고 있지만, 그녀의 견고한 신앙은 어떤 어려움도 강하고 담대하게 이겨내고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기독교인이 되면 믿음으로 인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면서 그분의 절대적인 인도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따르고자 하는 모든 무슬림 여성에게 계속해서 기적의 은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3) 무슬림 여성이 바라보는 성경의 여인

무슬림 여성이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영접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찾았다면, 이들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계속 넘쳐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고 신앙의 목적을 이루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오스양은 작은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여 정착하여 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복잡한 도시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이웃을 사귀는데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녀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모스크에 가서 기도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인데, 그곳에서 좋지 못한 경험을 한 뒤 그녀는 이슬람 신앙을 포기합니다. 어느 날 그녀는 라디오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지역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교회 생활과 말씀을 통해서 신앙을 성장시키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습관이 되어버린 남을 험담하는 일과 거짓말로 인해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가정 모임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습관이 되어버린 남을 험담하고 욕하는 것을 고쳐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이후로는 주님을 위해서 말씀을 나누는 자가 되길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복음으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교회나 믿음의 모임이 없는 곳에서 혼자서 말씀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야 합니다. 대부분의 무슬림 회심자 여성은 간증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이해하기 쉽고 신앙의 본이 될 수 있는 구약 룻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룻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소망을 좇아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얻은 축복과 그녀의 등 뒤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많은 무슬림 회심자 여성이 감동을 받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에서 살았던 이방 여인이자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신세로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시어머니와 함께 유대 땅에 들어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이어가는 고되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으로 결코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하고 과부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믿음과 주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모든 필요를 은혜로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과거가 결코 다가올 미래의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되어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족보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룻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무슬림 여성이 자신을 이방 여인인 룻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주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룻과 같이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에 깊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룻의 믿음으로 결단하여 다시는 이방 신을 섬기러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확고한 믿음 안에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며 회심하는 무슬림 여성을 우리는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을 날마다 사랑으로 격려하고 보살펴 주면서 룻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자녀들을 축복하며 신앙의 유산을 전하는 통로로 쓰이길 함께 기도합니다.

5. 결론

주님은 무슬림 여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들이 과거에 어떤 모습으로 살면서 누구를 섬겼었는지 관계없이, 그분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포로된 자의 사슬을 풀어주며,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며, 악한 영으로부터 건져주시며 지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죄의 형벌에서 구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주님은 무슬림 여성의 아버지가 되어 사랑으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며, 때로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된 성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시험을 당하는 자들에게 더 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무슬림 여성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남성으로 이 땅에 오셨나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남성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은 무슬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슬림 여성이 복음을 받아 변화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권세와 함께 하늘의 영광과 땅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1.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0/nov/25/report-condemns-uk-over-britishwomen-and-children-held-in-syria-citizenship-barbaric-conditions
  2. https://www.pewresearch.org/fact-tank/2014/01/08/what-is-appropriate-attire-for-women-in-muslim-countries/
  3.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가로되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나타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그리고 가슴을 가리는 머리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 시아버지, 그녀의 아들, 남편의 아들, 그녀의 형제와 형제의 아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여성 무슬림의 하녀들에게 성욕을 갖지 못하도록 그리고 성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않도록 하라. 또한 여성이 발걸음 소리를 내어 유혹함을 보여서는 안 되니 믿는 사람들이여 모두 하나님께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회가 번성하리라 (꾸란 수라 24:31)
  4.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한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세를 떨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리니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 하심이라 (꾸란 수라 9:5)
  5. 지하드 신부들- https://en.wikipedia.org/wiki/Brides_of_ISIL
  6. 그녀가 말하길 어느 남자도 저를 접촉하지 아니했고 또한 부정을 저지르지도 아니 했는데 어떻게 제가 아들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에 그가 말하길 그렇게 되리라 당신의 주님께서 그것은 내게 쉬운 일이라 그로하여금 백성을 위한 예증이 되게 하고 하나님 의 은혜가 되도록 이미 그렇게 명하여진 일이었노라 (꾸란 수라 19:20-21)
  7.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남녀가 천국에 들어 가나니 그들이 받을 보상은 조금도 부정함이 없노라(꾸란 수라 4:24)
  8.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명령하여 부모를 존경하라 했거늘 그의 어머니는 태아를 가짐과 이 년간 젖을 먹이므로 말미암아 허약하여지니라 내게 감사하고 그리고 네 부모에게 감사하라 내게로 옴이 최후이니라 (꾸란 수라 31:14)
  9. https://www.popcouncil.org/research/womens-education-in-the-muslim-world
  10. 읽으라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 연필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기르쳐 주셨노라 (꾸란 수라 96:3-5)
  11. 그대는 이 성서가 계시되기 전에 글을 읽을 수 없었으며 그대의 바른 손으로 쓸 수도 없었거늘 만일 그대가 그럴 수 있었다면 불신자들은 그것을 의심하였으리라 (꾸란 수라 29:48)
  12.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서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적으로 남성을 따를 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 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꾸란 수라 :34
  13. 마리아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 라고 그들이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노라 (꾸란 수라 4:157)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파트너 칼럼

터키에서의 제자 양육

이스마일 쿠락치올루 목사

1990년대 초에 터키 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약 30년의 짧은 시간 동안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지역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재단 (vakıf 바크프), 협회(dernek 데르넥) 그리고 가정 교회들을 포함한 총 170여 개의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70개의 교회 중에 45개 교회는 비정부 기구 (NGO)입니다. 이 조직들의 지부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60개의 교회들을 포함하면, 100개 이상의 교회가 국가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60개에 가까운 교회들이 잠재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터키에서의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은 주로 외국 교회들과 선교단체에 의해 이뤄졌지만, 현재는 터키 지역의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주도하에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터키의 법적 지위 조건

터키에는 아직 교회가 종교 단체로서 기독교 신학 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를 개설하기 위한 법적 규정이 없습니다. 교회들과 교육 사업을 하는 단체들은 재단이나 협회와 같은 비정부 기구를 등록하여 당국과 사회에 공식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제자 양육 프로그램은 ‘연구’ 또는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글과 시각 자료들이 사용됩니다. 이런 세미나들을 통해서 제자를 양육하고 전략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교회에서 제자를 양육하는 목적을 위해 쓰인 시각 자료를 활용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으로 제자 양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자 양육에 대한 견해

첫째, 모든 지역 교회는 제자를 양육하기 위한 비전, 전략, 단기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170여 개의 교회 중 몇 개의 교회가 제자 양육을 위한 비전과 전략 그리고 목표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 양육의 효율성을 높이는 우선적인 조건은 교회가 비전, 전략적 프로그램 그리고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필요가 명확해지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둘째, 목회자 (장로 또는 감독들)은 가르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키우는 데에는 학생과 그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교회 지도자 및 교사들과의 일대일 관계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3년간 함께 했던 제자들도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봉사하는지를 예수님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지도자는 교회에서 매우 많은 사역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를 세워나가는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제자 (μαθητές, 마데테스)의 개념은 영적인 성숙과 함께 완성됩니다. 제자가 되어 “따르는 사람”은 교육을 받고, 훈련받아 파송되고, 믿음이 있고, 봉사의 훈련을 받는 실제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신자들과 세례받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복음 전도, 제자 양육, 기도, 예배, 구제 사역에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효과적인 제자 양육 프로그램

30년간 많은 지역 교회가 자체적으로 제자 훈련을 진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역 교회와 협력하는 해외의 자매 교회와 선교 단체는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 분야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몇 가지 프로그램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신자들과의 일대일 성경 연구 (예: 요한1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갈라디아서와 같이 짧지만 복음과 신앙의 삶을 설명하는 서신서들)
  • 세례 전 기초 교육 (예: 에베소서)
  • 짧은 보조 자료들 (보조 자료들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학생의 관심이 성경이 아닌 자료로 가게 된다면 바로 성경 말씀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 세례 이후 그룹 모임 (성경 또는 다른 자료들)
  • 교회 안에서의 세미나
  • 원격 교육

모두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있지만, 제자 양육에서 학생들을 지역 교회에서 계속 봉사하게 하면서, 최소 한 학기는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터키의 제자 양육을 위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 정도의 짧은 훈련 기간은 학생과 삶을 단절시키고, 종종 성숙하지 않은 채 사역에 보내지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팬데믹 이전에 이뤄진 많은 세미나가 실질적인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강도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자 양육을 세미나에서 세미나로 운영하여 빈 사역으로 변모되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습니다. 단기 성경학교와 도움이 되지 않는 세미나에 기초한 제자 양육은 돈을 삼키는 블랙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들은 삶에서 많은 가치 있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께 부름을 받은 후 약 10년간 준비 기간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 바울을 찾아왔고 그와 함께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5-26)

이후 사역을 하며 때로는 믿는 사람들의 헌금으로, 때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 4:10-18)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행 18:1-3)

터키에서는 직접 일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약하고, 그들은 사회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습니다.

제자 양육 프로그램의 확장

제자 양육 전략에 관해 위에서 언급한 프로그램을 확장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의 발이라면 또 다른 발은 제자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는 진정한 제자를 양육하는 비전, 전략 그리고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각 교회는 그 자체의 역동적인 구조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구조이기에 공동체는 그에 따라 전략과 목표를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항상 앞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비전의 예시(1)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이다 (척도: 섬기는 자의 충성도, 출석자들의 증가)

전략의 예시
  • 신자들의 정기적인 성경 읽기, 기도하기, 개인 예배에 대한 장려
  • 교회의 제자 양육 프로그램
  • 성경에 기반한 설교와 성경 연구
  • 1년에 2회 이상의 전략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세미나
  • 관심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성경 공부 장려, 기도
  • 세례자들을 방문하고 영적으로 바라보기
  • 여성을 위한 모임과 세미나
  • 어린이들을 교회의 한 지체로서 양육하고 섬기는 것
  • 형제자매들의 은사를 이해하고, 사용을 장려하는 것
  • 봉사자들과 교회에 충성되게 참석하는 (교회 출석) 숫자의 증가
  • 실제적인 봉사들 (차, 환영/환대, 음식, 기술적 부분)을 통해서 책임 의식 함양
  • 한 달에 한 번 봉사자들과 시간 보내기
  • 두 달에 한 번 세례 받은 사람과 시간 보내기
  • 사역 책임자와 3개월에 한 번씩 평가수행

원격교육의 활성화

최근 몇 년 동안, 의미 있는 제자 훈련의 기회가 교회를 떠나지 않고도 협회의 세미나 과정으로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고 있습니다. 또한 해외의 공인된 학부 및 대학원에서 터키어 프로그램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원격교육 또는 하이브리드 교육 과정은 조금 다르지만, 약 1만 5천 페이지의 읽기, 조사 및 연구 보고서, 에세이 과제가 포함됩니다. 학습 과목들의 적용을 포함한 교육들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것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결론

제자 양육은 광범위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많은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터키에서 유익한 결과를 보이는 모델을 중심으로 자격 있는 학생들의 교육과 효율성을 향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주님께서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 일하실지 기도하며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부르사 개신교회에서 단체 연구를 통해 비전과 전략이 개발되었다.

파트너 칼럼

신성한 명령중동의 제자화

제리 매틱스 사역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a)

그리스도의 명령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가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그러나 우리는 “가서 복음을 나누어라”, “가서 교회를 개척하라” 또는 “가서 유대-기독교적 가치를 전파하라” 등으로 이 명확한 명령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나쁘지는 않지만 부족합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 잃어버린 세상에 보내기 위한 그리스도의 전략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몇 년마다 나라들에 대한 새로운 전도 전략이 제안되고 전 세계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략이 초기 성공 후 유지되지 못합니다. 제자를 만드는 것만큼 기본적인 것이 선교의 비밀일 수 있을까요? 이런 간단한 방법이 신성한 명령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사역 동안 그의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한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하기를 부탁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현대에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독창성의 희생양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거나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선교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도록 뒤섞이게 할 뿐입니다. 저와 아내는 20년 동안 중동에서 활발한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 즉 제자화를 바탕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그 어느 때보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사역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에 대단히 중요한 패러다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개척

제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 겸손을 가르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 지역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물론 복음 전파에서 교회가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작게 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나라에 나타내려 애쓰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제자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중동에서 우리는 유학생과 이주 노동자의 신분인 매우 일시적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이끌었던 많은 사람이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다소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사명은 큰 회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고 따르는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인상적인 인원수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시간에 따라 우리에게 돌보라고 보내주신 각각 믿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우리의 많은 시간은 정기적으로 성도 개개인을 만나는 데 사용됩니다. 바로 그때 실제 많은 인격적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만나는 개인들에게 급진적인 제자가 될 것을 도전하고 더 많은 제자를 만들기 위해 확신을 가지고 시간을 사용합니다.

상담 사역

인생이 바뀌는 걸 보는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알 수 있도록 돕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상담입니다. 저의 아내 사라는 이 분야의 훈련을 받아 사역 가운데 많은 결실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여성들의 수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믿지 않습니다. 상담을 시작할 때 아내는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고 대담하게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그녀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다면, 그녀는 그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도시에는 중동 전역에서 온 학생들이 다니는 큰 대학이 있습니다. 유학생 중 많은 이들이 모든 종류의 학대를 겪으며 매우 억압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내는 끈기 있게 그들의 말을 들으며 격려와 지혜의 말을 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머지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들을 찾아오셨는지를 증언했고, 그 과정에서 그를 친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그들과 만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가르치고,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돕습니다.(1)

많은 간증이 있지만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란에서 온 바나는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녀는 과거에 받은 학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저희를 만나보라고 권유해 주었고 그녀는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마귀에게 시달렸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많은 기도 끝에 그녀는 그리스도께로 왔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믿음을 키워나갔고, 2년 후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기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서원한 1년간의 사역이 끝나면, 그녀는 젊은 여성들을 제자화하기 위해 아내와 더 긴밀히 동역하기로 했습니다.

온라인 아웃리치

바나를 사역자로 파송합니다

중동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협박과 위협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상적인 현실입니다. 이 시기에 점점 더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세대들은 부모의 종교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제한된 접근성, 그리고 계속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터넷에서 더 많은 기독교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이 지역에서 전례 없는 복음의 길을 더욱 열었습니다. 저는 그런 자료들을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놀라운 결과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온라인 활동을 통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를 받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이 전 세계에 끼친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동에서 복음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폐쇄정책 때문에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더 많은 성도를 만나기도 하고 복음을 더 폭넓게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디야르바크르의 아흐멧 목사는 지난달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생중계된 주일 설교를 봤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제자화로 이끄는 것이 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팔로우하거나 당신의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지역의 유일한 신자이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근처의 다른 신도들과 연결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이 전적으로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전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지역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

중동 제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수업

젊은 성도들은 신앙의 성장과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허둥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제자훈련의 다양한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숙한 제자를 만들고 그들이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에서는 헌신적인 성도들을 위해 주중에 심층적인 성경 수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주 수업에 참석하고, 숙제를 하고, 심지어 시험을 치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 일의 중대성을 알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수업은 실용적 연구에서부터 신학적인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경을 다룹니다.

또한 매년 한 번씩 체계적인 성경 교육을 접할 수 없는 중동지역 신도들을 대상으로 집중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약 12명의 사람을 모아서 2주간의 매우 깊은 가르침과 기도, 예배, 그리고 교제를 갖습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랍인과 유대인들, 터키인과 쿠르드인, 페르시아인과 팔레스타인인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도전은 변함없습니다. 제자가 되어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난민 사역

예지디 소녀들과의 외출

마지막으로 우리 사역의 또 다른 부분으로 인도주의적 활동이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라크에서 온 8명의 젊은 여성들, 주로 예지디인들을 초청해 왔습니다. 그들은 시리아 전쟁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은 여전히 난민 캠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의 도움과 지도로 그들은 지역 대학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주어서 그들이 돌아가 지역사회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또한 그들의 나라에서 학대받는 결혼 생활에서 탈출한 몇 명의 여성과 그들의 아이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을 안전하게 구출하는 것은 끔찍하게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가까이에서 그들을 계속 보살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 성도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어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제자화의 목표로 이러한 사역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가 섬겼던 것처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주님을 믿지 않은 수천 명의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이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셨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성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받은 것에 대해 정기적으로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의 모임에 참석했고 그들은 모두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축하 행사에 참석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영원한 결실을 보기를 소망하고 신뢰합니다.

터키에서의 제자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최근 터키 전역의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저는 제자화에 대한 토론 모임을 주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터키 목사님들은 제게 가르치지 말며, 참석한 다른 목사님들 중 누구도 설교하도록 허락하지 말라고 분명히 지시하셨는데, 이것은 설교자들이 가득한 방에서는 불가능한 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파키스탄 출신 목사가 일어서서 설교해서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그의 나라에 거대한 텐트를 치고 수백만 명의 영혼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했고, 우리가 터키에서 왜 같은 일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했습니다. 터키 목사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터키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남아공에서 온 또 다른 목사님의 발언이 더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는 목사가 제자로 헌신하지 않는 한 전도에 종사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터키 교회 지도부는 이번 컨퍼런스에서 외국인 동역자들에게 제자화가 전도나 교회 개척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제자화가 모든 기독교 사역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복음 전도가 첫 단계일 수도 있고, 교회 사역이 필수적인 결과일 수도 있긴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화 사역의 일부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이 우리의 중심 사명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하나님이 정해주신 수단으로 제자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제자화는 한마디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복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바울이 말했던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이것은 무리한 명령입니다. 그냥 ‘교회를 개척’하거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훨씬 더 많 은 것을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투자하도록 요구됩니다. 이것은 할 일의 목록을 만들어 표시하는 서양식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높은 곳과 낮은 곳에 처하며, 사람들과 함께 먼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놀랄 만한 것인가요?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한 일이 이것 아닌가요? 그가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하라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얼마나 제자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요?

  1. 사라 매틱스 사역자의 최근 저서에 무슬림 여성과의 상담 사역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Sarah Mattix(2021), "Healing Broken Hearts: Trauma Counseling in the Middle East"

파트너 칼럼

우리 삶에 풀어지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

김밀알, 글로리아 사역자

멀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의 비전

우리 가족은 2004년 이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는 부푼 가슴과 믿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이란에 선교단체를 만들고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헌신하며 용기 있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란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깊은 순종을 요구하는 일인지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이란에 살면서 그 땅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었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묵상하게 되었다. 그 옛날 남의 나라, 심지어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거대한 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원수의 나라를 섬겨야 했던 다니엘과 에스더를 생각했다. 그들이 살았던 땅인 페르시아, 바로 이란에서 그들의 느꼈을 감정과 매일 분투하며 살아가야 했던 어려움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매일 눈을 뜨며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한순간 한순간이 쉽지 않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희미해져 가는 비전과 하나님께서 부어주셨다고 생각하며 꿈꾸어 왔던 것들이 정말 나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의심하게 된 것이었다. 한 명, 두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가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더군다나 선교단체를 만들어 그들과 함께 열방에 복음을 전한다는 꿈은 너무나 멀리 있고 거대해 보였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한순간도 순종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쓰러지는 나 자신과 성장하지 못하는 영성, 깊은 의사소통으로 발전되지 않는 페르시아어, 나를 괴롭히는 현지인들과 그들의 문화,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과 선교사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한탄 어린 후회가 나의 온 존재를 휘감아 버렸다. 나는 결국 무너졌고 쓰러졌다. 도저히 다시 일어나 그분의 뜻을 따라갈 힘이 없어진 것만 같았다. 자책의 눈물과 부서져 버릴 듯한 고통이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함께 우시는 주님

어느 날 아이들을 재운 후 옆 방에서 새벽까지 배를 움켜잡고 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이 실제로 내 온몸에 느껴졌다.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렇게 쓰러져 있는 순간, 난 주님이 내 옆에서 울고 계심을 느꼈다. 그냥 느껴졌다. 아주 선명하게… 새벽 4시까지 계속 내 옆에서 울고 계셨다. 나와 함께 울고 계셨던 주님. 왜였을까? 그렇게 잠이 들고 난 다음 날 아침,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을 펴서 묵상하기조차 힘들었던 내가 아주 편안하게 묵상 노트를 꺼내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말씀이 읽어지고 찬양이 드려지고 예배가 되어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혼자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쳐도 되지 않던 것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 왕궁에서 이런 느낌이었을까? 성령께서 그녀를 위해 다녀가신 후 싫기만 했던 하루하루를 감사와 찬양으로 채워갔을까? 선교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하는 것일까? 순종이란 무엇인가?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루에도 수없이 질문을 쏟아내고, 삶의 목적을 끊임없이 묻는 내게 그렇게 성령께서는 나의 영을 터치하셨다.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선교라는 것, 비전이라는 것, 그것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대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묵상을 하며 주의 이끄심을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통해 몇 명의 사람들이 연결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우리 집에서 가정 모임이 시작되었다.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찬양집 뒤에 있는 기타 코드를 보고 익힌 몇 개의 코드로, 제대로 설명도 할 수 없는 페르시아어로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임을 처음 경험하는 무슬림들을 데리고 몇 달을 예배드리던 어느 날, 한 자매가 몇 년 전 시위 인파에 휩쓸려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이 사라져 버린다는 이란 감옥, 가족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읽었던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당신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저를 이곳에서 꺼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울부짖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감옥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우리를 만나게 되었노라고,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겠노라고 고백했다. 이 자매의 고백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매를 보면서 우리는 떨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가정교회에 한두 명이 더 참여하게 되었고, 매주 우리 집에서는 예배 후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한 번 시작된 기도는 몇 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등 주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영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이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닌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기도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인가? 매우 놀라웠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러나 안식년 후 다시 겨울처럼 차가운 3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여러 선교사 가정들이 추방되었고, 보안 문제로 인해 몇 안 되는 가정들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며 지냈다. 계속 크리스천들이 잡혀가는 상황 속에서 현지인들에게 닥칠 위험으로 인해 친구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당시 8살이던 둘째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테헤란에 있는 한국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이에게 심리적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같은 반에 동급생은 두 명뿐이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때리기도 하고 조건부로 놀아주며 아이에게 무언가를 시키기도 하였다. 학교 담임 선생님은 우리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이들과 놀 수 없고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며 우리를 몰아붙였다. 결국, 아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현관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부모인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아이는 그 상황을 충분히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린 상태였다. 밤마다 바닥을 뒹굴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엄마 나빠”라고 외쳤다. 자기는 목이 잘려서 피가 나는 것처럼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무슬림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고 한국 학교여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밖에 못 나가는 아이를 보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 말소리도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비자 문제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아이를 맡기고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었고, 내가 페르시아 문학을 공부한다고 하니 이란 북쪽 지역 속담 하나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다. “힌두네 베 하르보제 체 랍티 더래”라고 이야기한다. 번역하면 “수박과 멜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뜻이다.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걱정할 때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학교 선생님들과 그 아이들의 행동은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의 행동에 분노하지 말고 너는 너의 길을 가거라.” 그 이후 3주 동안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며 소리치며 아파했다. 나는 계속 숨을 쉴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라고 물으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네, 주님! 이 아이는 주님의 아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오늘부터 내가 이 아이의 치료를 시작하였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 예레미야 33장 2-3절 말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이 나에게 왔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같은 날 한국학교의 한 고학년 아이의 엄마가 둘째 아이에게 주라며 인형 세 개와 짜장 한 통, 카레 한 통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곰돌이 인형 세 개를 받아 들고 각 인형에게 하늘이, 별이, 천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곰돌이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고요히 잠이 들었다. 바로 주께서 말씀하신 그날 밤부터 자기 시작했다. 감사와 안도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아이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하자 우리는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의 두 친구,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을 용서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에게도 우리에게도 너무 가혹한 일 같았지만, 그 쓴 뿌리들이 마음에 자리 잡기 전에 우리는 비워내야 했다. 아이가 또박또박 용서하는 기도를 따라 했다. 나 또한 용서하기 싫어하는 억척스러운 본능을 거슬러 아이와 함께 기도했다. 가족 모두가 용서하는 자리에 나아갔다.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이 이렇게 억척스럽고 거스르기 힘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성숙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주의 은혜가 우리 가정에 넘쳤기 때문에 그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학교를 옮기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이를 치료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 섬세한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아이가 지금처럼 마음과 몸이 건강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훌륭한 아이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마지막 시대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정말 작은 경험으로 하나님의 큰 세계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을 겪으며 우리의 시각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견고해져 갔다.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내 인생의 목적 같았던 ‘선교’라는 단어를 내려놓았다. 난 그저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는 일을 할 뿐이었다. 거대해 보였던 비전들은 주께서 이끌고 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란을 떠나기 전 이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뼛속 깊이 새길 수가 있었다. 눈물이 강물처럼 계속 쏟아졌다. 골목 골목마다 주의 보혈이 흘러가길 기도했다. 그곳에서 고통당하는 주의 자녀들과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성령을 부으시길 기도했다. 그곳을 떠날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기도하며 우리를 다른 곳으로 강하게 이끄시는 성령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터키로 이동하였다.

터키에서 풀어지는 새로운 부르심

터키로 이동한 후 다시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터키에 조금씩 적응해 가고 1년쯤 지난 시점에 우리는 에스키쉐히르라는 도시에 작은 이란 가정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 이후 조금씩 하나님의 인도로 아프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로운 부르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란 친구들과 함께 한 명 한 명 아프간 사람들을 만나며 전도하러 다녔다. 사역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이란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며 아프간 가정집들을 방문하며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거대해 보였던 선교단체를 세우고자 했던 비전이 어느덧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교회 모임이 생겨나기도 하고 때로는 아프간 난민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로 넘어가 교회 모임이 통째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란 사역자들을 세우고 아프간 사역에 헌신하도록 격려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아프간 사역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교회를 개척하고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그들의 삶의 모습도 함께 발전하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프간 사람들에게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10명 중 10명 모두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길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기 이전부터 그 필요를 다 보고 계셨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셨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며 한국의 빨간펜 선생님처럼 우리가 방문 교육을 해야 할지, 영어를 가르칠지 수학을 가르칠지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고민만 하였다. 그러다 안식년을 가지게 되었다.

안식년 동안 모 단체의 성경연구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는데 그곳에 난민들을 대상으로 영어 교사를 양성하는 테솔 (Tesol) 교육과정이 있었다. 우리는 국제 학생이어서 그들의 연습대상이 되어 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난민들을 위한 영어교육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주님은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우리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지 모르겠다. 안식년 후 터키로 돌아와 난민 아이들에게 영어와 미술 등의 교육을 무료로 제공하는 빅드림 스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어찌 우리의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는가? 아프간 난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현재 600명 이상의 아프간 아이들과 어른들이 이 빅드림 스쿨에서 영어와 미술 등을 배우고 있다. 최근에는 레고 교육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Last Call (SNS를 통한 온라인 전도와 제자양육) 사역을 통해 터키의 도시들과 아프가니스탄 본토에 복음을 전하고 연결된 사람들을 온라인 예배로 인도하여 양육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양육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아프간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준비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본토에서 여러 사람이 연결되고 있고, 그들의 갈급한 심령을 볼 수 있었다.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기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고 계신다. 곳곳에 마음 아픈 일들이 일어나지만, 주의 나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확장되고 있다. 지난 1월 초 지난해 우리도 함께 노력하고 기도해 왔던, 아프가니스탄에 한 컨테이너의 의약품을 보내는 일이 한국의 NGO를 통해 이루어졌다. 작년에 이 일들을 추진하며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40년 이상 전쟁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하는 일들이 수년 내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겠다는 것과 나도 그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여러 모임에서 만나는 아프간 사람들의 기도 제목은 하나같이 아프가니스탄을 회복시켜달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지길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픔을 씻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토록 참혹한 생활을 보고 경험했던 사람들이 용서를 이야기하고 서로 용서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그들에게서 진정한 용서를 배워간다. 그들의 기도 속에 아프가니스탄의 골목 골목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그분의 피가 뿌려지길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이란에서 내가 이란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매주 예배 모임을 통해 나 스스로 회복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아픔과 회복과 성장은 나를 뜨겁게 격려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하게 한다.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나에게 아프간 성도들의 모임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일할 것을 계속 독려한다. 나는 탈레반이 너무 무섭고 현재는 한국 사람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아프가니스탄 본토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듯하다. 내가 수년간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일해 온 많은 분 앞에서 감히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을 꿈꾼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갈등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의 꿈이 그려지고 그분의 나라가 상상되어 가슴이 뛴다. 이번 팬데믹 기간에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온라인에서 아프간 바이블 칼리지를 오픈하였다. 처음에는 AANC 교회 안에서 10명의 우리 성도들을 데리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2학기 때에는 24명으로 늘어났고, 3월 2일에 시작된 3학기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참여하는 8명을 포함한 14명이 추가되어 총 30여 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열정적인 반응에 시작한 우리도 깜짝 놀라고 있다. 아프간 사람들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이렇게 대단한지 몰랐다. 곳곳에 숨은 인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이 학생들이 미래 아프가니스탄의 영적인 지도자로 자라나길 소망한다. 온라인에서 현재 진행 중인 아프간 바이블 칼리지와 더불어 여성대학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리더들을 키워내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땅을 내가 밟아볼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며 그분은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가슴 속에 매일 자라간다. 주께서 우리 아프간 난민 성도들이 꿈꾸는 그 일들을 이루어주시길 간절히 간구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땅을 밟으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순간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파트너 칼럼

아라랏 미션의사명과 선교

백승환 사역자

© CuriousGolden,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아르메니아는 터키, 이란을 비롯한 인근 이슬람 국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의 교두보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나라입니다. 이러한 소명을 가지고 아르메니아에서 선교 사역을 섬기는 아라랏 미션의 사명과 비전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중동, 아시아권을 연결하는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주후 301년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합니다. 긴 세월 동안 터키, 러시아 그리고 이란, 이라크 등 주변 강대국들이 아르메니아를 지도상에서 없애기 위해 수많은 전쟁과 인종 대학살까지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기독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아르메니아 현황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현황 © Yerevanci,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아르메니아의 인구 3백만 명 중 95%가 아르메니아 정교(Apostolic church) 신자이며, 5%가 개신교입니다.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1,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전형적인 디아스포라 국가입니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전통과 문화가 깊지만, 종교적 형식에 치우쳐 있어서 모두가 전도 대상이며, 특별히 성령체험이 필요합니다. 구소련으로부터 1990년 독립했으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 어려워졌으며, 부패한 정치와 일자리 부족으로 심각한 경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9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인당 국내총생산은 $4,622.73으로 세계 90위입니다. 오랜 역사와 기독교 문화, 전통이 지난 1,700년 동안 지속되어 문화적 자부심이 무척 강한 민족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랏산 (창 8:4)은 아르메니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와 터키 간의 영토 분할 협정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후 원래 아르메니아 땅이었던 아라랏산이 터키 영토로 강제 귀속되었습니다.

1915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이 살해당한 대학살의 아픔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있어, 터키와는 오랫동안 국경을 닫고 모든 교류를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쟁 이후 실리를 앞세운 사람들에 의해 국경을 열자는 쪽으로 러시아의 중재 하에 의견이 나오는 중입니다.

지난해 9월 아제르바이잔과 영토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일어나 44일 동안 6천여 명이 전사했는데, 이 전쟁의 여파로 현재 총리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라랏 미션 센터 (Ararat Mission Center, AMC)

아라랏 미션에서 돌보고 있는 150명의 불우 아동 Giving Hope Day 이벤트

아라랏 미션은 아르메니아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7년간 현지인 지도자 훈련 및 장기 선교사 양성을 위한 제자훈련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올해부터는 5가정을 터키와 이란의 장기 선교사로 파송하는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라랏 미션 센터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슬림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구제 사역입니다. 구제 사역은 현재 불우 아동 150명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소그룹을 조직해 성경공부, 현장 학습, 여름 캠프, 가족 심방 등의 활동으로 사랑과 돌봄의 관계를 지속해서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불우 아동과 가족 돌봄은 일시적인 방문이나 선물을 나눠주는 데서 벗어나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소망을 심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선교는 주님께서 오늘날 아르메니아에 맡겨 주신 소명입니다. 지난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해서 모든 일이 중단되고, 국경이 닫히고 모임도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어 연초에 계획했던 사역들을 도중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것이 변경, 중단되는 일이 생겼더라도 이슬람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무슬림 선교에 장기적으로 헌신할 아르메니아인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2020년 2월부터 선교사 훈련학교를 시작했습니다. 30명의 학생이 입학해 선교의 열정을 키워가던 중에 코로나 사태가 확산하면서 2달 후에는 학교를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안으로 온라인 수업을 통해 10개월 코스를 모두 마치고, 지난해 11월 말, 24명의 학생이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생 가운데 6유닛을 선발해 현재 터키로 4유닛, 그리고 이란으로 2유닛을 파송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왜 아르메니아가 터키와 이란 선교의 교두보인가?

아라랏 미션 스쿨을 졸업한 24명의 장기 선교사 후보생

터키와 이란 그리고 인근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시리아 등 중동 국가에는 수많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들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찾을 수 없지만 터키의 이스탄불에는 아직도 많은 아르메니아 정교회들이 존재하며, 아르메니아 학교와 커뮤니티들이 터키인들의 보이지 않는 핍박과 차별 가운데서도 생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에서 가장 복음의 불모지이며 아직까지 교회개척이 이뤄지지 않은 흑해 연안의 터키 동부 지역에도 아르메니아 후손으로 불리는 헴신족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헴신족은 이미 오래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터키 국적으로 살고 있지만 아직도 아르메니아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언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아르메니아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접근하면 쉽게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터키에 외국인 장기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많은 훈련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 장기 선교사가 터키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예산으로 파송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재정적 부담으로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어려운 일을 아르메니아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선교사 훈련을 시키면 비교적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경제,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가 아르메니아를 벗어서 해외로 나가고 싶어 합니다. 사실 이런 현실적인 상황도 젊은이들이 장기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는 좋은 객관적인 여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선교사는 터키와 이란에서 할 수 있는 사역의 영역이 넓습니다. 현지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는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있는데, 이들과 연결되면 쉽게 사역의 기반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란의 경우,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란 정부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종교 단체이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선교사로 이란에서 사역을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로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비교적 쉽게 터키어와 이란어를 습득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터키와 이란 현지에서 아르메니아 말을 하는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들을 찾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이슬람권 나라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데 가장 힘든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유일한 기독교 국가로 아르메니아를 선택하셨고, 지난 1,700년 동안 기독교 국가의 정체성을 기적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아르메니아를 복음의 교두보로 삼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장기 선교사로 세워 이슬람 국가에 복음을 뿌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코로나 이후 이슬람권 교회개척 비전

지난 2020년 한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사역이 중단되었고, 대부분의 교육과 모임을 온라인 미팅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위기는 더 효과적인 기회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희는 코로나로 인해 아직 국경이 닫혀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이를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는 선교 전략들을 기도하면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021년에 새로 준비한 아가락 선교센터 (이란 국경)와 바투미 선교 센터 (터키 국경, 조지아)입니다. 아가락 선교센터는 아르메니아 최남부 이란 국경의 아가락(Agarak) 도시에 세워졌으며, 이란 선교 준비 및 훈련을 위한 선교 센터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던 지난 2020년 8월부터 이 사역을 시작해 현재까지 국경 도시에서 이란 사역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귀한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아가락 선교 센터는 국경 도시의 특수성을 가지고 이란어를 배우기 원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어학 학교를 시작해 학원 사역을 통한 지역 복음화 및 현지 교회개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벌써 주일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개척의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선교팀이 아가락 선교 센터를 방문해 지역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란 선교에 헌신한 청년들은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란을 위한 중보기도, 이란어 연수 등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바투미와 아가락의 전략적 위치© Flalf,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터키 국경 흑해 연안의 바투미 선교 센터 또한 같은 전략으로 세워지는 선교 센터입니다. 바투미는 조지아에 있으며 터키 동부 지역에 사는 터키인, 쿠르드족, 헴신족들이 많이 방문하는 휴양도시입니다. 또한 많은 터키인이 이곳에서 비즈니스 투자를 하고 있어 터키인들을 쉽게 만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략적인 도시입니다. 그래서 아라랏 미션에서는 이곳에 10명 이내의 선교학교 졸업생을 선발하고 파송합니다. 그리고 바투미에서 터키인을 향한 전도 활동, 지역 교회와 연합한 사역 그리고 터키어 집중 연수 등을 약 6개월 정도 받습니다. 바투미 선교 센터와 아가락 선교 센터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중간 사역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이곳이 아르메니아 장기 선교사들을 위한 중간 사역 본부, 또는 게스트 하우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영적 부흥과 무슬림 선교의 관계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식 © Grig24, CC BY-SA 43.0, via Wikimedia Commons

아르메니아의 영적 부흥의 열쇠는 무슬림 선교입니다. 아르메니아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순종해 더 많은 선교사를 이웃 나라, 원수의 나라에 파송하게 될 때, 아르메니아의 영적 부흥은 불타오르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터키 선교에 올인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에 대해 가진 민족적 분노의 감정은 상당히 큽니다. 아마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민족 감정의 10배 이상이라고 말하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인의 반터키 감정은 한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터키가 배후 세력이 되어 아제르바이잔과 영토분쟁 전쟁이 발생했고, 그 결과 6천명 이상의 젊은이가 총도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이 수치스러운 전쟁으로 반터키 감정의 깊이가 더 깊어진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인생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언제까지 악인들이 잘되고 정의가 실행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될 것이냐”라는 울부짖음에 주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는 답변을 주셨던 것처럼, 오늘날 현실 가운데 좌절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어쩌면 더욱 역설적인 답변을 주시고 있기도 합니다. “아르메니아, 너희가 터키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모든 어려움과 좌절이 극복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르메니아를 매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이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주셨고, 오늘날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만들어 한민족과 같이 전 세계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 국가로 사용하시기 원하고 계십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아르메니아 젊은이들이 장기 선교사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며, 아라랏 미션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선교에 전념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미션 프론티어스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기독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

레베카 루이스

나는 하와이에서 용암이 붉게 흐르는 것으로 유명한 화산을 방문했다. 뜨거운 용암이 공기에 닿자마자 빠르게 냉각되어 검은 껍질을 형성하고, 바위 안에 담겨 흐르는 동안 표면을 걸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글지글 끓는 강력한 붉은 용암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분출되고, 열과 압력은 바다로 흘러갈 때까지 끊임없이 축적된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떠올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을 때, 그는 이후 세계를 거침없이 누비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강력한 운동의 도래를 계시하셨다.

메시아 왕국은 먼저 유대교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로마를 전복하고 그들 민족의 통치를 다시 정립할 것으로 기대했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율법의 강화된 규제에서 벗어나 그리스-로마 세계에 그 변화된 힘을 가져왔고, 통치자들의 마음을 제외한 어떤 정부도 쓰러뜨리지 않았다. 바울은 이방인 세계로의 놀라운 하나님의 움직임을 ‘복음의 신비’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언서에 숨겨져 있었지만 그의 때에 밝혀졌다. 베드로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 10:34-35)

1세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에서부터 에티오피아,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하나님 나라의 표현 하나하나가 형태를 이루며 인류가 만들어낸 케이스로 굳어지면, 운동은 서서히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의 능력은 쉽게 길들여지고 억제되지 않는다. 로마 신자들이 이 현상을 조직하고 관리하기 위해 제국의 지배 구조와 문화적 강점을 선택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진 켈트족 아일랜드에 노예였던 한 소년을 통해 그의 나라를 세우고 계셨다! 한편 블랙리스트에 오른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메시지를 중국까지 전달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그의 나라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기독교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의 살아있는 능력은 한 번도 그를 따르는 이들의 최선의 노력에 효과적으로 담긴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쇄기의 발명은 성서 자체를 성직자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고, 예수를 통해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근본적인 재확인과 함께 완전한 개혁을 일으켰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믿고 있는가?

현대 교통과 인터넷 통신은 이 놀랄 만큼 좋은 소식으로부터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마지막 장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제한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주신다는 사실에 우리가 놀랄 차례이다. 고넬료와 같은 이교도 가정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할례를 받지 않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은 그에게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이 ‘선호되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무슬림, 불교도, 힌두교도 그리고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옳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우리가 그것을 보관하려고 하는 상자들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허락과 상관없이 그의 연회에 가장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두려운 일을 다시 한번 하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많은 종교적인 맥락의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신약에서처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세우기 위해 종교 구조나 형태가 확립되는 것에 관심 두지 않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그는 종교 간의 경쟁을 우회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곧바로 다가가고 있다.

출처: https://www.missionfrontiers.org/issue/article/the-kingdom-is-continually-breaking_free-of-christendom

특별기고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는 여성

술탄 자매

이슬람에서 여성의 지위

이슬람에서 여성의 지위는 끊임없는 논쟁거리입니다.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서도 항상 논의되고 의견 차이를 일으키는 이슈입니다. 어떤 이슬람 학자는 여성들이 이슬람교와 함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어떤 학자들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합니다. 이슬람 시대 이전 아라비아반도에서 사회학적 관점으로 여성의 상황을 연구한다면, 여성이 이슬람교와 함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슬람의 모든 보편성 논제를 반박하기 때문에 근거 없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슬람 시대 이전 아라비아반도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나빴다는 실질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연구한 하버드 신학대학교의 이슬람 연구원인 레일라 아흐메드는 이슬람 전의 아라비아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슬람 문명은 이슬람 이전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표기하는 역사적 구조를 구축해 이슬람을 모든 문명화의 유일한 근원으로 보여주고, 이 구조를 자신의 역사를 새롭게 작성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중동의 지난 문명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소실되었다. 분명히 이 구조는 이념적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중동의 일부 문화권에서는 이슬람이 일어나기 전에 여성들이 훨씬 더 잘 살았지만, 이슬람이 발생한 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감추었다.”

남녀평등론에 반대하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경계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여성의 소리를 하람(금기)이라 여기고 능력 없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사회생활 참여를 제한하고 비난하며, 여성은 남성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는 남녀의 왜곡된 관계를 보여주며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이슬람 지지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며 그것이 이슬람의 근원인 꾸란과 관계가 없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가진 이슬람 학자들의 생각의 근원은 꾸란입니다.

꾸란 속 여성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써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적으로 남성을 따를 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 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꾸란 수라 4:34)

꾸란의 이 구절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남성이 여성에게 정신적 또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꾸란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혼한 여성은 삼개월을 기다리게 되나니 이는 하나님이 태 내에 창조한 것을 숨기는 것을 막고자 함이라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내세를 믿어 남편이 돌아을 의사가 있을 때는 남편은 이 기간에 돌아을 권리가 있으며 또한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으나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나니 하나님은 만사형통 하심이라” (꾸란 수라 2:228)

꾸란의 이 구절에서 다시 한번 남성이 우월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언자여 실로 하나님이 그대에게 허용하였나니 그대가 이미 지참금을 지불한 부인들 하나님께서 전쟁의 포로로써 그대에게 부여한 자들로 그대의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이들과 삼촌의 딸들과 고모의 딸들과 외삼촌의 딸들과 이주하여 온 외숙모의 딸들과 예언자에게 스스로를 의탁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여성들과 예언자가 결흔하고자 원할 경우 그대에게는 허용되나 다른 믿는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은 그들의 부인들과 그들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관하여 믿는 자 이들에게 의무화한 것도 알고 있노라 이는 그대에게 어려움이 없도록 함이니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꾸란 수라33:50)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특권을 설명하는 이 구절의 세부사항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전쟁의 전리품은 사회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이구절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전쟁에서 사로잡힌 여성들도 전리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마도 여성들 중에는 남편, 아버지 또는 남자 형제들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이 평범한 삶을 방해하지 않는 하나의 질서와 현실로 간주될 때, 전쟁의 포로이자 전리품인 여성에 대한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길고 복잡한 과정을 포함합니다. 아랍 사회에서는 전쟁을 통해 전리품으로 얻은 여성을 첩으로 불렀습니다. 다른 전리품들과 마찬가지로 첩은 아랍 신자들 사이에 나누어졌습니다. 아랍 남성들은 첩을 집안일이나 성적인 목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싫증이 나면 노예 시장에서 판매하거나 다른 첩과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집에 오는 손님에게 첩을 제공하고 손님과 성관계를 갖도록 강요했습니다.

“결혼할 능력을 갖지 못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능력을 줄 때까지 자제하라고 하라 그리고 너희가 소유하고 있는 하인들 중에서 일정금액으로 해방 증서를 원할 경우 너희가 그들 가운데서 신임을 발견한다면 그들에게 중서를 주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푼 재산중에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라 그러나 현세의 이익을 얻으려 하녀들에게 간음행위를 강요하지 말라 그들은 순결을 지키고자 하니라 만일 그녀들에게 강요하는 자가 있어 강요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푸시니라” (꾸란 수라 24:33)

꾸란의 이 구절에서 첩이나 전쟁 때 전리품으로 잡혀간 첩들은 대가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해방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놀라운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첩들이 매춘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은 아랍인 무슬림 남성들이 전쟁 피해자인 첩들에게 매춘을 강요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더욱이 이 구절은 강요를 받아 매춘을 한 자들은 용서받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을 매춘으로 몰아넣은 남성들의 처벌에 관한 어떤 경고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첩에게 매춘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명예롭게 남기를 원하는 첩에 따라 조건부로 이뤄집니다. 이것은 만약 첩이 매춘과 관련하여 반응이 없다면 ‘매춘을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준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번 또는 세번 또는 네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그녀들에게 공평을 베풀어 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 너희를 부정으 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 (꾸란 수라 4:3)

위의 구절은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일부다처제가 남성에게만 적합하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은 남편을 다른 여성 또는 여성들과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이 구절에는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꾸란의 강하고 비현실적인 구절들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는 일부 이슬람 옹호자들의 말과는 반대로, 남성이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의 수는 4명에 국한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더욱이 꾸란의 구절들을 자의적 해석을 통하여 부드럽게 만들고 받아들일 만한 상태로 다듬으려 노력하는 이슬람 옹호자들의 불필요한 노력은 오히려 이 문제가 심각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편적이고 명확한 요소들은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의 꾸란의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한 예증으로 계시했나니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인도하시니라”(꾸란 수라 22:16)
“일러가로되 내가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 심판을 구하겠느뇨 너희에게 그 성서를 보내시어 명백히 하신 분이 그분이시라 그 성서를 받은 그들은 그것이 그대의 주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임을 알고 있나니 너희는 의심하는 자 가운데 있지 말라 하였노라” (꾸란 수라 6:114)

이슬람 학자들은 원어인 아랍어 꾸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명확한 뜻을 번역하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현실과 무관한 꾸란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과 모순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문제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닌 우상을 불러들이니 사탄을 숭배하고 있노라” (꾸란 수라 4:117)

이 구절에 ‘우상’이라 번역된 ‘inas’는 여성을 의미합니다. ‘inas’가 본래의 의미가 아닌 ‘여성 우상’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라트, 웃자, 마나트와 같은 여성 신에서 기원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이슬람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 세계 전의 아랍 여성들이 매우 나쁜 상황에 있었다고 말하는 이슬람 지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 전의 아라비아반도에서 여성이 가치 없는 존재였다는 주장은 아랍인들인 여성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는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그 구절의 단어 자체의 의미를 고려하면 여성을 신으로 보고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İnas’가 단어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여성 우상’의 뜻으로 사용될 때, 왜 해당 우상이나 우상들의 성별을 특정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생리 기간이 끝나버린 여성이라도 너희가 의심할 경우는 그녀들을 위해 정해진 기간은 석달이며 생리에 이르지 아니한 여성도 마찬가지라 또한 임신한 여성의 기간은 출산할 때까지로 하나님을 두려워한 자 하나님은 그의 일을 편하게 하여 주시니라” (꾸란 수라 65:4)

꾸란의 이 구절은 아내와 이혼하고 싶은 남자가 이혼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기간’은 여성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생리 기간이 끝나버린 여성’은 폐경에 들어간 여성을 말하고, ‘생리에 이르지 아니한 여성’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여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슬람에서는 아직 사춘기에 이르지 못한 어린 소녀와 결혼하고, 심지어 결혼 후 이혼까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열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배우자와의 이혼에 있어서, 이혼할 권리는 오직 남성에게 있습니다. 만약 여성이 이혼을 원한다면 그녀는 남편에게 요청하고 그것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믿는자들이여 일정기간 채무를 계약할 때는 서식으로 기록하되 양자 사이에 서기로 하여금 공정하게 쓰게 하라 하나님의 가르침이시니 기록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되며 또한 채무를 진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할 것이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할 것이며 두려움을 소흘리 하지 말라 그 당사자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허약하여 받아 쓸 능력이 없을 경우는 그의 후원자로 하여금 공정하게 쓰게 하라 그리고 두 남자의 중인을 세을 것이며 두남자가 없을 경우는 한 남자와 두여자를 선택하여 증인으로 세우라 한 증인이 잘못 한다면 다른 중인이 기억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 증인으로 요청이 있을 때는 거절하지 말라 그 계약의 기간 또는 규모가 적던 크던 기록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라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보다 옳은 것이며 증거로써 보다 적합하며 너희간의 의심을 없애는 보다 편리한 것이라 그러나 너희가 즉석에서 거래하는 경우라면 기록을 하지 않아도 죄가 아니나 상업적 거래인때는 증인이 있어야 하며 증인이나 서기에서도 손해를 주지 말라 만일 손상이 있다면 너희에게 사악함이 있도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라” (꾸란 수라 2:282)

이 꾸란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남성의 증언은 두 여성의 증언과 같은 효력을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슬람은 여성이 지성이 부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명의 남성을 두 명의 여성과 동일하게 보는 사실은 꾸란의 상속 공유에 관한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속에 관한 말씀을 하셨나니 아들에게는 두명의 딸에 해당하는…” (꾸란 수라 4:11 상반절)

이슬람의 천국에 관한 이해 속에는 여성과 여성과의 성관계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성은 알라에게 순종하는 남성에게 보상으로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자들은 승리한 것이 있나니 천국과 포도들이 있고 나이가 같은 청순한 배우자가 있으며 넘치는 잔이 있도다” (꾸란 수라 78:31-34)

이슬람, 여성의 몰락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는 25세에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선지자 역할은 40세 때 시작되었습니다. 카디자와 결혼하고 15년 뒤입니다. 이 사실에 따라 이슬람이 태동하기 15년 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카디자는 과부였지만 남성 없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매우 강력했습니다. 카디자를 현재 비즈니스 여성과 같이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이슬람 전의 아라비아반도를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하면, 이슬람 종교는 여성의 몰락이었습니다. 이슬람 전의 아라비아반도에서 자유로웠던 여성 커리어우먼인 카디자가 이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기고

꿈의 학교빅드림스쿨

서성훈 형제

복음 중심의 교육

복음 중심의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교육과 기독교는 세속주의 측면에서 별개의 실체로 간주합니다. 교육의 목적은 주로 기술, 지식, 육체적 건강 등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지타운, 에모리, 보스턴 대학을 포함한 미국의 많은 학교들은 기독교 학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학교라 하더라도 뿌리 깊게 박힌 세속주의와 이전 세대보다 커진 세속적 원칙의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 원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육에서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개혁의 수 세기 동안 루터는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개혁된 신앙의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믿었습니다. 캘빈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모든 학문의 근본”이며 “교양은 말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돕는 도구”라고 믿었습니다. 교육은 직업 기술이나 지식을 얻는 것 이상입니다. 교육은 성경과 기독교 원리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돕고,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는 관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나누는 매개체입니다.

선교로의 부르심

먼저 지난 3년 동안 발전해 온 저의 개인적인 꿈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터키 선교 여행을 했을 때, “이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뒤, 저는 제가 어떻게 현재 미국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교육, 신학, 음악, 미술과 관련된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직업 경력이 하나님의 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터키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은 순간을 저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봉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식당에서 김진영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전 세계적으로 취업 비자보다 선교사로서 종교 비자를 받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학교에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실무 전문가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서 나를 외부인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교회 개척 경험이 없는 상태로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를 두고 고민하였습니다. 관계 형성의 문제를 위해 저는 석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학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교육을 통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훨씬 더 쉽습니다. 석사 학위를 이수함으로써 저는 해외에서 더 많은 교육 기회와 직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개척에 대한 고민은 까다로운 주제였습니다. 저의 목표는 전임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 경험을 살려 지역 교회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지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예배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돕는 것입니다.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제 대답은 항상 제가 경험하지 못해본 일에 대한 추상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가 영적인 여정과 직업적 경력을 완전히 별개의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업은 단지 수입원이나 자신이 진정으로 가장 즐기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으로 여겨집니다. 놀랍게도 많은 기독교인이 그들의 직업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그들의 직업을 징벌로 여기기도 합니다. 직업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목적이 존재하지 않거나 세속주의에 의해 희석되기 때문입니다. 일부 환경은 실제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비전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목적이 됩니다. 인생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의 집단적인 문제가 됩니다. 축복은 특정한 한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터키에서 돌아온 지 몇 달 후, 하나님께서는 제가 여러 가지 꿈을 꾸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제 꿈 중 하나는 어려운 환경에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휴대용 장치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북부 이라크의 난민들 사이에서 교육에 대한 엄청난 요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작 조건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곳은 느리고 비싼 인터넷, 제한된 전기, 그리고 혹독한 날씨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형제 몇 명에게 교육 애플리케이션을 호스팅할 수 있는 시제품 장치를 개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몇 달간의 시행착오 끝에 시제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제 아내의 손만 한 크기의 이 휴대용 장치는 학생들이 현지에서 접속할 수 있는 내장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교육용 응용 프로그램을 호스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장치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꿈의 학교, 빅드림스쿨

저는 현재 빅드림스쿨의 자원봉사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빅드림스쿨에 관해 여러분께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학생들의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출신입니다. 그들은 현재 터키나 그리스에 거주하며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나이대가 다양합니다. 많은 난민이 더 나은 삶과 기회를 위해 서구 사회로 이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난민들은 난민 지위로 인해 차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터키에서는 난민이 정부의 승인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 그들의 꿈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찾기를 희망합니다.

팬데믹 상황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라인 공동체에서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역은 그저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번성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은 사실상 더 많은 선교의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하기 위해 수천 달러를 쓰거나 휴가를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라인 선교는 매우 효율적입니다. 우리는 집과 편한 곳에서 선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국제 선교 여행을 계획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릴 수 있지만, 온라인 선교는 단 몇 주 또는 며칠 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라인 사역은 즉각적이고 정기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줌 수업을 통해 난민들의 가슴에 씨앗을 심고 계십니다. 빅드림스쿨은 터키에 정규 교사들이 있고, 한국과 미국 전역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탄력적인 온라인 수업이 자원 봉사자들의 일정과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 사이의 시차를 맞추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한 학기는 약 3개월입니다. 일주일에 최소 1개의 수업이 있으며 수업 당 약 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온라인 수업 이전에는 영어와 미술이 주요 과목이었으나 현재는 영어 수업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학생층의 범위가 넓지만 주로 유창함의 수준과 연령에 따라 수업 그룹이 나뉩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학생들이 이곳이 기독교 학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행사나 단체에 무슬림 배경의 개인이 참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정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성경 이야기를 읽거나 성경 이야기를 요약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보람됩니다. 개인적인 상호작용은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 모두에게 이 사역의 주요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교육의 핵심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을 더 많이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자원봉사 코디로서 가장 큰 도전은 꾸준하고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일관성과 인정을 요구하는 일상적인 결정입니다. 감정으로 일하는 기독교인들은 자주 바뀌는 감정으로 인해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결정에 따라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선교를 우선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 교회, 가족, 학교, 친구 그리고 건강 상태 등 여러 가지가 우리의 주의를 흩어지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압도적 임재를 이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만족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사역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선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경험이자 기회이기 때문에 우리 가슴에 설렘을 안깁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하려는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생각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다른 개인과의 상호작용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무엇을 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문화, 언어, 집단이 하늘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선교 중에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옆에 서서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교는 그것을 엿볼 수 있는 천국의 예배입니다. 선교가 열정이 될 때, 그 열정은 생명이 됩니다.

지난 2월과 3월 동안, 우리는 30건 이상의 자원봉사 신청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교직 경험이 없었고, 교육학 학위도 없었습니다. 정교사들과의 두 차례 훈련 후, 자원봉사자들은 수업에 배정됩니다. 많은 학생이 수줍어하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소통이 처음에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창의력을 발휘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을 부탁합니다. 또한 완벽한 수업을 하는 것보다 학생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합니다.

팬데믹이 지난 후에는 모든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터키와 그리스에 있는 학생들을 직접 방문하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이 단순히 매주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들이 터키와 그리스의 지역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고 체험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나누고, 학생들과 간증을 주고받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빅드림스쿨의 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큰 꿈입니다.

참고 자료 : F. H. Hilliard, Taylor & Francis Group ed. Christianity in Education: The Hibbert Lectures 1965. ProQuest Ebook Central. 2011. https://ebookcentral.proquest.com/lib/vt/detail.action?docID=958183.

빅드림스쿨은 터키에서 2018년에 시작한 난민 전문 교육 기관입니다. 터키와 그리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난민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면 교육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온라인수업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셨고, 지역과 장소의 한계를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교사를 모집하는 것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미주 지역에서 많은 봉사자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2021년의 목표는 60명의 자원봉사자 선생님을 통해 50개의 새로운 클래스를 개설하는 것입니다. 영어 교육의 경험이 없어도 됩니다. 영어로 대화를 하실 수 있는 기본적인 수준이면 현재 난민들을 교육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온라인으로 난민 아이들과 직접 만나고 영어를 가르치는 시간은 귀한 경험이 될 것이며, 고등학생들은 봉사 certificate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영어 교사로 섬겨 주실 분들은 아래 홈페이지에서 자원봉사 등록을 하시고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빅드림스쿨 자원봉사 홈페이지 www.bdsvolunteer.com

케빈의 성경이야기

- 예루살렘 공의회 -사울이었던 바울입니다

케빈 권 사역자

유대인과 율법

나와 함께 수학하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려고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 대답을 듣고서 그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우리 모두는 그 말에 감탄하고 동의하며 과연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토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말리엘 선생님의 문하에서 성경에 따른 가르침으로 우리가 배웠던 하나님의 법은, 모세가 허다한 이스라엘 백성 및 이방인들과 광야의 길에 들어선 3개월 즈음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신 약속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증거판 둘에 직접 써 주셨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대대에 걸쳐 지켜야 할 규례이며 곧 율법이었다. 이 율법을 배운 자라면 누구나 율법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확장된 율법의 종류만도 613계명이나 되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파생된 율법은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1)’과 ‘이웃 사랑(2)’이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해 주셨으니 참으로 그 지혜가 탁월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던 것이었다.

모세와 십계명

율법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은 종종 생활과 밀접한 일반적인 생활 율법의 해석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련된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율법적인 해석을 하려고 진지하게 논의를 하곤 했다. 우리 동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해서도 꽤나 오랜 시간 토론을 했다. 하나님께서 강제적인 법이나 규례를 우리에게 주시기에 앞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창조의 본래적인 의도였다는 것에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사실 아담이 죄로 인해 타락하기 전까지는 오직 한 가지 약속만 있었으니, 아담에게 명령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죄로 인해 타락하기 전까지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사용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12 사도 벽화

토라(3) 의 첫 번째 책(4)에서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시작된 원시 율법의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주시면서 이미 짐승의 희생과 제사를 제시하고 있으며, 대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방주 안으로 들어간 짐승들의 구분은 레위기에 나타나는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의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할례도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있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선포하신 것은 족장시대(5) 이후에 희미해져 버린 제사, 규례, 관습 등등을 새롭게 확고히 하여 이스라엘을 주권이 있는 국가, 엄밀히 표현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는 민족과 국가로 세워서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율법은 늘 성전의 예식이 포함된 종교의식과 함께 발전되어 왔지만, 바벨론 유수 이후의 포로 시대에 들어서면서 성전과 관련된 모든 종교의식이 박탈되었기에 오히려 문자 위주의 율법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히 진행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바리새파(6)는 포로귀환 이후 성전 중심의 제사장이나 성직자 계급에 있는 율법 학자가 아닌 일반 율법 학자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에 대한 해석과 엄격한 율법의 준행을 추구하는 바리새 운동을 확산하였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올바르게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이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그 후의 여러 규정을 준수하고 해석하는 데 매우 엄격했으며, 제의적인 정결, 십일조 헌납, 안식일의 준수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 천사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듯 율법에 대한 열심이 특심이었던 유대인들이었기에, 비록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유대인으로 익숙해져 있던 율법적인 모습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최초의 기독교 회의, 예루살렘 공의회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온 어떤 사람들은 전형적인 유대교의 유전을 이어받은 자들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는 자들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면서 더불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들도 함께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서 유대인이 아닌 믿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육신의 정결을 위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 안에 유대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들도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말로 인해 서로 의견이 나뉘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으로 오셔서 할례를 받았기에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모든 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과 일부 유대인과 대부분의 이방인 형제들은 할례는 유대인의 전통이니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다. 처음에는 할례로 시작을 했지만 나중에는 정결 의식과 먹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바나바와 나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켰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눅 11:42a)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눅 11:46)

안디옥-예루살렘 지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자세의 문제라고 강력하게 논증했다. 율법의 상징으로 불리는 모세도 모든 것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인 불신앙(7)과 겸손하지 못한 모습(8)으로 인해 결국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가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무리에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정체성을 율법에서 찾으려는 율법주의 유대인들과 율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점점 커져만 갔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안디옥 교회가 율법으로 인해 분리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더 이상 직시할 수 없어서 장로들과 교사들이 모여 논의한 후에, 나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9)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즉시 일어나 안디옥을 떠나서 서쪽 바닷가를 따라 난 길로 열흘을 걸어 베니게(10)에 도착하였다. 그곳의 교회들에게 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지와 수리아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님의 역사와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고 있는 일들을 말하여 많은 교회들을 위로한 후에 내륙의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수년 만에 기둥과 같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친교의 악수를 나누고 예루살렘의 장로들 및 교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수리아, 구브로, 밤빌리아, 비시디아와 갈라디아 지역에서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님의 사역을 증거하니 모두가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우리는 유대에서 온 어떤 믿는 자들로 인해 야기된 일들에 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이 문제와 관련된 사도들과 예루살렘 장로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우리를 파견했으며,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자 내용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야고보에게 요청하기를 이 문제는 단순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기도한 후에 다시 모이고자 제안하였다.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장로와 사도들에게 수리아 안디옥의 상황을 알리고 공적인 회의(11)를 수일 후에 열 것을 공지하였다. 수일 후에 여러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에 관해서 장시간 동안 각자의 의견에 따라 변론하는 것을 다 들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12)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행 15:7-11)

베드로의 환상

이에 힘을 얻어 나와 바나바는 공의회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 중에서 일어난 표적과 기사를 증거하며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인해 성령이 역사했다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일들을 증언했다. 우리가 말을 마치자 주의 형제인 야고보가 그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자하게 바라본 후에 베드로의 의견과 우리의 증언을 수용하여,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앞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유대의 율법과 문화가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결론을 지어 주었다. 율법은 장차 다가올 좋은 일의 그림자로 그 역할을 잘 감당했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으니 썩어질 구습을 쫓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임을 천명해 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포로시대 이후로 여러 민족 가운데 모세의 법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우상숭배와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등의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 관해서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유대의 율법과 문화적인 논쟁에 관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으로 앞으로 복음이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 증거되는 일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게 될지 그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감히 예견하지 못했다.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함께 결의한 내용을 나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전달할 인물로 바사바(13)라 하는 유다와 실라(14) 를 선택해 보내주었다.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떠나기 전에 조카인 마가를 잠시 만나러 간다고 했다. 마가는 버가에서 우리와 헤어진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안디옥을 왕래하며 여전히 주의 모임에서 봉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안디옥에서 그와 몇 번 마주쳤지만 서로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었다. 안디옥에 올 때마다 마가는 구레네인 시므온 장로의 아들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알렉산더, 루포 형제와 깊은 교제를 하는 것 같았다. 안디옥 교회 내에서도 좋은 평판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믿음의 형제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라면 아직 성숙하지 않은 마가의 신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되리라 생각했다.

예루살렘 만국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전송을 받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사도들이 직접 써서 보낸 편지를 가지고 여러 믿음의 공동체들을 하나하나 방문하여 읽어 주었고, 바사바와 실라는 편지의 증인이 되어 말로써 교회들에 문안하며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유대의 율법과 문화가 장애가 되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했다. 사도들의 편지와 바사바와 실라의 위로가 안디옥 교회를 권면하여 오랫동안 설왕설래하던 교회가 서로를 용납하며 하나가 되어 갔다. 바사바와 실라도 한동안 안디옥에 머물면서 더욱더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들을 여러 말로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몇 날을 머물다가 형제들로부터 환송의 인사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베드로의 안디옥 방문

예루살렘 다윗의 탑

바사바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베드로가 몇 명의 형제들과 함께 안디옥에 왔다. 깜짝 방문이었다. 베드로는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위로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요르단 동쪽 지역을 돌아 사마리아와 다메섹을 거쳐 안디옥에 왔다고 했다. 베드로의 심방 여행에는 실라가 동행했고, 꽤나 많은 짐을 등에 진마가도 일행 중에 있었다. 루포가 마가에게 어떤 짐인지 물어보니,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사도 베드로에게 직접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는 양피지라고 했다. 참 대견스러운 생각이다. 하지만 버가에서의 일로 인해 내가 선입견이 있는지는 몰라도, 볼혹의 나이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듯한 마가의 모습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드로와 일행들은 안디옥의 여러 공동체를 방문하고 문안하였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십자가의 구원을 믿음으로 이루어가는 형제자매들에게 말하기를,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중에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함으로 근심하게 될 것이고 환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나 진실하고 확실한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를 전하였다. 사실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바쳐야만 하는 행위 위주의 종교에 익숙해져 있던 대부분의 사람에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도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또 베드로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나는 사도 베드로의 이 권면의 인사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세워진 교회가 반드시 알고 인정해야만 하는 실체적 진리인 것을 알기에,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베드로의 인사 뒤에 부가하여 말하였다.

포로 시대 이후에 흩어진 자들로 예루살렘과 유대를 떠나 디아스포라(15) 유대인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로 작정한 사람들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안디옥의 교회들은 고난이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존 종교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며,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가 회복되어 가야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록 복음을 수용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가난한 부류였지만 그들은 마음을 다해 서로를 돕고 나누었다. 지식인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도 세상을 향한 애통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통해 그들이 가진 것을 흘러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복음이 주는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고, 이런 교회들의 모습과 이웃을 돌보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성도들의 행함으로 인해 세상은 놀라고 있었다.

이렇듯 교회 됨을 말하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으로 여러 공동체가 더욱 간절히 예수님에 관해서 듣기를 원했다. 헬라어나 다른 이방 언어가 편하지 않은 베드로는 공적인 모임에서는 통역을 세워 성경으로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지만 사적으로는 주로 유대인들과 교제를 했다. 하루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헬라인으로 믿음의 길에 들어선 한 형제의 가정에 초대를 받아 그 형제의 집에서 시편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의 말씀으로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였다. 도중에 야고보의 편지를 안디옥에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들을 영접하러 나갔다. 야고보에게서 온 형제들에게 베드로 일행이 여기에 있다며 헬라인 형제의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베드로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바나바에게 물어보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온다는 이야기에 급하게 그 자리를 일어섰고 그를 따라 다른 유대인들도 함께 떠났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규례에 따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 짐작이 되었다. 불과 수개월 전에 예루살렘에서 할례와 율법에 관한 논의를 할 때에 베드로 본인이 이방인으로 믿는 자들에 관해서 몇 가지 제한만 제시하고 다른 어떤 율법적인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였는데, 오늘 베드로가 보여준 행위로 인해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베드로가 비록 사도의 직분에 있지만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갈 2:14b)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데 외식하는 것은 베드로 자신의 거짓과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책망했던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에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는 것이다. 무례할 정도로 호된 책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겸손하게 자신의 외식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믿는 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이처럼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한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고백을 하였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 내부에서 소란이 되었던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여러 오해는 가라앉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베드로와 일행들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 바대인, 메대인 등등의 다민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가 안디옥 교회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그들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떠났으며, 실라와 마가는 안디옥 교회를 돕기 위해 남았다.

바나바와의 다툼

베드로가 교회들을 위로하기 위해 심방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서 수년 전에 바나바와 여러 형제와 함께 주의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쳤던 여러 성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또 모임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여 나는 바나바에게 우리가 복음을 증거한 지역들을 다시 방문하여 격려하는 일에 관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바나바도 내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우리는 안디옥 공동체들의 장로들을 만나 우리가 몇 년 전에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했던 지역들을 다시 방문하고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함께 기도해 주기를 요청했다.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와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많은 장로과 교사들이 있었고, 이제는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모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디옥 도시 안에서 흩어져 있는 여러 공동체의 형제들이 우리가 다시 전도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듣고는 십시일반으로 여정에 필요한 재정을 만들어 주었다.

바나바와 나는 첫 번째 여정에 함께 했던 형제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전도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형제가 기꺼이 동참할 것을 기대했는데, 지난번 여행의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지 많은 형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동행이 힘들 것 같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이 일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부르심이 필요한 사명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기간의 여행에 필요한 것들 준비하고 우리의 여행에 함께할 헌신자들을 구하며 기도를 할 때 실라가 와서 천국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면서 이번 여행에 우리와 함께 가고 싶다며 자원했다. 예루살렘 공의회 결과를 알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주님을 향한 그의 신실함과 충성됨, 또한 로마 시민권자로 로마의 곳곳을 여행하기에 적합한 실라가 합류하는 것에 우리는 환영했다.

출발하기로 예정한 날을 며칠 남겨 두고 바나바가 나를 찾아와 이번 여행에 자신의 조카인 마가가 함께 가기를 원하는데 같이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나바는 나의 성격을 잘 알기에 마가에 관해 변명하기를, 수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고 알렉산더와 루포 및 여러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면서 마가도 많이 변했으니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자고 했다. 하지만 버가에서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우리 일행을 중도에서 떠나간 마가를 나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애하고 인자한 바나바지만 이번에는 마가를 데려가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지난날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애썼던 바나바를 생각하면 마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지만, 나는 마가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대한 소명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가를 데려가는 일로 인해 바나바와 나는 며칠을 옥신각신하다가 감정이 상하여 서로가 큰소리로 다툼(16)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갈라서 각자가 다른 행선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첫 번째 여정과 동일하게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가는 길을 택하였고, 나는 실라와 디도와 함께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바나바와 나의 다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의 형제들은 우리 모두가 주의 은혜와 함께하기를 축복해 주었다.

  1.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2.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b)
  3. 토라 (Torah)는 히브리어로 가르침 또는 법을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모세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쓰여진 토라'와 '구전 토라' 전체를 포함한다.
  4. 토라의 첫 번째 책은 히브리어로 בראשית (Bereshit, 베레시트 - 태초에)라는 뜻을 그대로 인용하여 창세기로 불린다.
  5. 구약성경의 역사를 창조 시대/족장 시대/광야 시대/사사 시대/통일왕국 시대/분열왕국 시대/포로 시대로 구분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족장 시대로 명명한다.
  6. 바리새파는 '구별된' 또는 '분리된'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포로 시대 이후 주전 2세기경에 등장하여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율법 및 선조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고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인간 편에서 확보하려고 분투했던 유대교의 한 분파이다.
  7.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 1:37) 하나님을 믿기보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자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죄짓게 한 모세의 불신앙 때문이다.
  8.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민 27:14a) 신 (Zin) 광야 가데스므리바에서 물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격양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민 20:2-13 참고)
  9. 바울로부터 참 아들, 동무, 동역자, 교회의 사자, 그리스도의 영광 등으로 불린 디도 (Titus)는 안디옥에서 바울과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디도는 헬라 사람으로 안디옥에서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 공의회에 함께 참석하였다. 그 이후 평생 바울과 동행했다. 바울에게 있어 디도는 디모데와 더불어 단순한 동역자가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어 사태 수습을 위해 디모데를 보냈으나 해결하지 못하자 디모데보다 나이가 많고 경륜이 있는 디도가 파견되어 수습한 것을 보면 디도는 지혜로운 영적인 협상가의 면모도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10. 베니게 (Phoenicia)는 현재 레바논의 베이루트 남쪽 해안지역으로,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으로 고대 해양무역의 패권을 차지한 페니키아인들이 거주하던 두로와 시돈을 포함하는 지중해의 연안 지역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곳에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을 떠난 믿음의 공동체가 있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11. 예루살렘 공의회는 A.D. 50년 전후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최초의 기독교 회의로 복음이 유대인의 문화로 인해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며, 문화를 뛰어넘어 복음을 자유롭게 전파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12. 사도행전 10장 전체 참조.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임한 성령의 역사.
  13. 바사바는 행 1:23에서 맛디아와 더불어 사도로 추천받을 만큼 경건한 자로, 바사바, 유스도, 요셉 (행 1:23)이라 불렸고, 유다 (행 15:22) 또는 예수 (골 4:11)라고도 불렸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동행했던 70인 제자 중의 한 명이다.
  14. 실루아노라고도 불리는 실라는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자로 70인 제자 중 한 명으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바울과는 2차 전도여행부터 동행했을 정도로 이방 선교에 대한 바울의 인식과 동일한 세계관을 가졌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지역의 교회 개척에 역할을 담당했고,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5. 디아스포라 (Diaspora)는 고대 그리스어로 흩어진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바벨론 유수로 인해 중동 전역에 생겨난 유대인 집단으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16. 이 다툼은 감정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독자적인 권위가 인정되어 바나바의 도움이 바울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아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나바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바울에게 실망감을 느꼈을 것 같다. 이 다툼은 대등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를 거부한 지극히 감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나바와의 다툼과 마가에 대한 냉대는 바울의 성격에서 비롯한 고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마가 요한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바울도 그에게 감사하게 된다. (골 4:10, 딤후 4:11, 몬 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