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교회 안팎에서 공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때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미디어에서는 연일 복잡한 팔레스타인 상황과 중동문제, 예루살렘 및 땅과 얽힌 문제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에 이스라엘은 국제외교, 정치, 군사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된 지 오래고, 이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은 나날이 증폭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도 근래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 회복 운동과 히브리 뿌리 회복 운동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적 반응으로 인해 일각의 이단 시비와 함께 열띤 논란이 있어 온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던, 그저 흘러간 과거의 유물이 된 민족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 또 교회 가운데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좋든 싫든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해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갖도록 요청받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더욱 심화할 것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적으로 이스라엘은 모든 종말론적 시나리오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구속사 완성의 핵심적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특히 마지막 때인 지금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히 이해할 수도, 거기에 동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이스라엘에 대해 분명하고 올바른 성경적 이해와 입장을 가지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
이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찾아온 약속된 이스라엘의 왕, 그들의 메시아를 맞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후 70년과 135년 두 차례의 유대인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열방에 포로로 끌려가 흩어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화려했던 성전은 불에 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 버렸다. 이후 유대인들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예수를 죽인 민족이란 오명을 덮어쓰고 온갖 저주와 멸시, 박해를 받아왔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 언약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교회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새로운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을 ‘대체’할 ‘영적인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해 왔다.
또한 구약에서 성취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주어진 모든 종말론적 예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신약교회를 통해 이미 ‘영적’으로 다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한 민족, 국가로서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성취될 약속도, 언약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계획도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다. 교회가 ‘진정한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수많은 이스라엘의 종말적 고토귀환과 회복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 이미 ‘영적으로’ 성취되었거나 장차 성취될 말씀으로 여겼다.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상징으로 이 땅에 남아서 교회에게 하나의 경종과 본보기가 되는 정도였다. 이러한 견해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소위 대체신학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대체신학을 절대 지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는 많은 명백한 구절들이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폐해졌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성경 내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 외부에 있다. 그 근거는 바로 주 후 70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 그리고 유대인들의 온 열방으로의 흩어짐이었다. 즉, 그런 역사적 사실이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결정적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유대인들의 포로됨은 정확히 과거에도 한 번, 바벨론 유수 때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바벨론 유수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증거 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파기한 증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70년의 포로기가 끝나면 다시 회복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실제 역사 속에서 그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을 뿐, 이스라엘과의 언약 파기의 증거는 아니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벌어진 일 역시 바벨론 유수와 같다. 성경은 장차 이스라엘이 온 열방으로 사로잡혀가게 될 것과 열방에서 당할 고난,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온 열방으로부터의 고토귀환이 있을 것을 여러 차례 걸쳐 예언하고 있으며, 이는 성경의 예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바벨론 유수와 모든 점에서 유사한데도 교회는 주후 70년의 사건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성경 예언의 문자적 성취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논리와 태도인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유대인들의 온 열방으로의 포로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증거가 아니라 바벨론 유수 때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으며 그 자체가 구약의 수많은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다. 또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전 세계로부터의 고토귀환과 이천 년 만의 건국, 예루살렘의 회복 역시 하나님 말씀의 예언의 성취이다. 동시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하나님이 이를 신실히 지키고 계신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이스라엘에 대해 대체신학적 견해를 가졌던 마틴 루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라고 스스로 내세운 증거가 역설적으로 이것이 사실임을 반증한다. 루터는 이스라엘의 고토귀환과 재건국에 관한 성경의 예언 성취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결정적인 성경적 증거로 보았다. 그것은 옳은 견해였다. 그런데도 그가 잘못된 반대 결론을 내린 것은 그러한 일들이 그가 살았던 16세기 초까지는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살아서 유대인들의 고토귀환과 현대 이스라엘의 재건국을 눈으로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그의 성경적 논리대로라면 그러한 일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지난 이천 년간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교회 전체가 다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17-18세기 이래 청교도와 개신교 신학자, 목사 등 많은 저명한 신앙인이 성령의 조명 아래 장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믿는 회복신학적 견해를 가졌으며 이에 관한 다양한 설교와 글을 남겼다. 그러나 대체신학적 견해를 가진 주류 교회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다. 19세기 후반 이후 시작된 전 세계로부터 유대인들의 고토귀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1948년 이스라엘의 이천 년 만의 재건국, 혹자의 표현에 의하면 세계 신학계에 ‘지진’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났고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은 그간 교회가 지녀온 대체신학적 입장의 타당성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 그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성경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이스라엘의 종말적 문자적 회복을 믿는 운동이 신학계와 교회 안에 급격히 확산하고 성장하게 되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교회와 신학계 내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완강하게 대체신학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 하신 약속을 결코 변개하실 수 없는 언약의 하나님은 그분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고 계신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해 그분의 교회를 깨우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시며, 그 열매로 이스라엘에 대한 교회들의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고 그 이해가 하루가 다르게 열려가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
그렇다면 오늘날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는 무엇인가?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수많은 약속과 예언은 차치하고, 그리스도 이후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언급을 로마서 11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기 백성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 11:1a)
바울은 1절에서 오늘날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하나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의 논증을 시작하고 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이 과연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자기 백성’은 교회나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아니며,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 그것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 백성’이 교회나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이 이들을 버리셨는가의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놀랍게도 “절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단호히 대답하고 있다. 이 답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전히 ‘자기 백성’으로 여기고 계시며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민이자 언약 백성임을 뜻한다. 로마서 11장 전체는 1절에서 내린 이 놀라운 결론에 대한 바울의 장대하고도 치밀한 성경적, 신학적 논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논증은 26절에 이르러 단언적 선포로 절정을 이룬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1:26a)
여기서 언급된 ‘온 이스라엘’ 역시, 지금까지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혹자가 주장하듯 그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 곧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온 이스라엘’이 유대인을 포함한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그 말은 결국 ‘예수 믿는 자는 누구나 다 구원 받는다’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울은 ‘온 이스라엘’의 종국적 구원 및 이방 구원과 연관된 하나님의 진리를 25절에서 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할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이 단지 교회가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반드시 알아야 할 ‘비밀’이라고 했을까? 너무나 당연한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과연 바울이 로마서 11장 전체를 걸친 논증을 펼쳤을까?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1:25-26a)
바울이 말하는 비밀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 비밀은 25절이 말하듯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된 것”과 이어지는 26절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사실이다. 이 비밀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종말적 민족적 구원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온 열방과 이스라엘을 아우르는 전 인류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와 계획에 대한 비밀이다. 그 비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택하심과 넘어짐, 그리고 종국적 회복과 구원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바울은 논증의 상당 부분을 이스라엘의 넘어짐, 즉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들의 민족적 메시아를 거부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는 두가지 측면에서 설명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 스스로의 불신앙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방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넘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1)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롬 11:8) 28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복음에 원수가 된 것이 바로 우리, 이방을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19절에서도 이스라엘의 원가지 일부가 꺾여져 나간 것이 그들의 불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이방으로 접붙임 받게 하려 하기 위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롬 11:28)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19)
즉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바로 온 이방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라는 것을 로마서 11장은 거듭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이방 구원을 이루고 난 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한 민족을 택하사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이방 구원을 위해 그 민족의 눈과 귀를 가리우사 잠시 넘어짐을 허락하셨다. 이를 통해 구원이 이방에 이르러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그 민족이 계속 부분적으로 완악함 가운데 있도록 하신다. 마침내 이방인의 수가 차게 되었을 때 결국은 넘어졌던 그 민족마저 구원하심으로써 온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것, 이것이 바로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비밀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을 사용하실까 의문이 들수도 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0-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열방, 둘 모두를 불순종 가운데 두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온 열방, 그리고 먼저 부르신 이스라엘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9장 1절에서 고백하듯이, 바울에게는 천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자기 민족이, 정작 그 메시아가 왔을 때는 그를 거부한 일이 너무나 큰 고통이자 의문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1)
그러나 11장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방 구원,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결말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경륜과 비밀을 마침내 깨닫고 나자 바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3-34)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바울은 위의 이유 외에, 로마서 11장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다. 바울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사건이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6-27)
여기서 언급된 언약은 모세의 언약이 아니라 렘 31:31-34과 겔 36:24-28에서 언급된, 원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되었으며 장차 이스라엘의 고토귀환 후 성취되기로 약속된 ‘새 언약’, 바로 복음을 가리킨다. 즉, 롬 11:26-27은 원래 이스라엘에 약속된 새 언약이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적으로 성취될 날이 올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바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1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는 장차 민족적으로 반드시 성취될 언약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됨은 29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
바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부르심과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후회하심이 없다’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뜻은 ‘취소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은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부르심이 취소될 수 없는 이유를 바로 앞의 28절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택하심이 ‘조상들을 인함’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롬 11:28)
즉 이스라엘이 택함을 입은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키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역이 그 언약을 취소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있어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은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 이후 신약 시대에서도 이스라엘을 교회와 구별되는 어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실체로,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의미가 있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신학에서는 이런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대체신학은 예수님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의미가 있는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구약시대로 끝이 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오직 교회만이 새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이 있는 실체이고 이스라엘 가운데 예수를 믿는자들은 단지 그 일원으로 교회에 포함될 뿐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이스라엘을 교회와 구별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는 실체로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로마서 11장과 에베소서 2-3장은 신약시대의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논하고 있다.
접붙임의 관계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상호관계는 접붙임으로 묘사된다. 신약교회는 원래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붙여짐으로 탄생한 존재이다. 또 참감람나무는 그리스도를 거부해서 꺾여진 가지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원가지로 나뉜다. 이 꺾여진 가지의 ‘꺾여짐’에는 자신의 불신앙과, 그 꺾인 자리에 이방을 접붙임으로써 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 두 차원이 다 존재함을 앞서 이미 설명하였다. 접붙여진 돌감람나무가지는 참감람나무의 뿌리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과 그 언약의 궁극적 성취인 그리스도)로부터 ‘진액’을 원가지와 함께 받아 좋은 열매 (언약에 따르는 모든 축복과 신분)을 얻고 누리게 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접붙여진 돌감람나무 가지는 비록 원가지와 함께 같은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아 같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여전히 원가지와는 구별된다는 점이다. 그 구별은 ‘기능적’ 구별이며 신분이나 특권, 권리나 축복에서의 차별은 아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꺾여진 가지들조차 장차 하나님께서 그 불신앙을 되돌이키사 다시 참감람나무에 되접붙임 받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롬 11:23-24)
그날이 바로 26절의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는 때이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을 포함한 모든 교회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도, 소수의 믿는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꺾여진 가지들의 불신앙으로부터 돌이킴과 되접붙임으로 인한 마지막 날 이스라엘 전체의 민족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새 사람의 관계
에베소서 2-3장이 규정하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한 새 사람’의 관계이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이스라엘과 교회, 이 둘을 나눈 담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고, 과거의 원수 관계가 해소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야 할 ‘이스라엘’은 단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몇몇 유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시각은 ‘한 새 사람’의 비전을 그저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안의 모든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차원의 말 정도로 축소하고 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바울이 여기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따로 거론하여 둘 사이의 하나 됨을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한 새 사람을 이루어야 할 ‘이스라엘’은 신구약 시대에 걸쳐 계속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고 지금도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서 11장에서 말하듯이 장차 그 ‘부분적 완악함’이 거두어져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이루게 될 이스라엘을 염두에 둔 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한 새 사람’의 온전한 성취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온 이스라엘’이 민족적 구원을 얻게 될 때 마침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교회가 ‘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둘이 합쳐져 둘 사이의 구별과 구분조차 없는 어떤 혼합적 실체가 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는 것은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교회가 곧 새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대체신학적 시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한 새 사람’이 된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진정한 관계는 에베소서 3장에서 정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
이러한 관계는 이스라엘과 교회, 각각의 독립적 실체가 구분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모든 권리와 축복을 동등하게 참여하고 누리는, 소위 ‘언약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낸다. 언약의 동반자 관계야말로 에베소서가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정확한 관계이다. 이러한 언약적 동반 관계는 정확히 로마서 11장에서 말하는 돌감람나무였던 이방 가지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가지, 즉 열방 교회가 원래의 원가지에 대해 갖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의 접붙임의 묘사는 에베소서 2-3장의 ‘한 새사람’의 묘사와 상통하며 일치한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한 새 사람’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주신 ‘형제 사랑’의 계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는 차원의 의미가 있다. 원래 이스라엘과 이방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부름을 받았으며, 실제 초대교회 당시의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형제로서 동거하고 서로 화평을 누렸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대교회 때 잠시의 동거와 평화는, 로마에 의한 기독교 공인, 교회 내 반유대주의의 심화,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교량이 될 나사렛파의 단절 등의 과정을 거치며 급속히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기독교 내 유대적 뿌리가 단절되고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관계는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특히 대체신학적 시각에 사로잡힌 교회에 의해 근 이천 년간 거듭된 극심한 유대인 박해의 불행한 역사는 둘 사이의 관계를 거의 원수처럼 벌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대로 마지막 날 민족적 회복과 구원을 이룬다 한들, 서로 원수처럼 지내온 교회와 이스라엘이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구속사가 끝난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인간은 더 이상 이 두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죄 사함을 얻게 하셨고 마침내 이 두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간의 모든 불화와 원수 관계가 녹아지고 해소되어 형제 사랑의 계명도 이루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고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들을 향한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한 형제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거의 원수처럼 지내왔다. 이스라엘과 교회가 ‘한 새 사람’을 이루는 것은 바로 구속사 안에서 한 형제로 부르심 받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깨어진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섰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듯이 “네 형제,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교회에 묻지 않으실까? “네가 진정 형제 사랑의 계명을 지켰느냐?”라고 묻지 않으실까? 그럴 때 교회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유대인 구원을 위한 전략 및 도전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구원은 천하 만민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교회의 열방 선교적 사명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종족선교를 이루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과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 교회가 온전히 한 새 사람을 이루는 것은 열방 선교 전체와 맞먹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본 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주님의 재림과도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신구약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 명령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사 62:6-7)
대표적으로 시 122:6에서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 구하라’는 명령이 있으며, 사 62:6-7에서는 주야로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할 파수꾼의 중보 사명에 대한 말씀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마지막 날 모든 교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부르심이다. 모든 교회는 여기에 동참해야 하며 쓰임 받아야 한다.
간혹 몇몇 교회나 선교사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모든 교회가 다 이스라엘 사역에 직접 동참해야 한다거나 혹은 모든 선교사, 선교단체가 지금 섬기는 선교사역을 내려놓고 이스라엘 회복 사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독특하며 다양하다. 열방에 대한 땅끝 선교 역시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과 주님의 재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이들을 그분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미 부르셨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교회, 선교사 혹은 선교단체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이 없는 한 이미 부르신 곳에서 부르신 선교 사역을 위해 최선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회복 역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구속사적 필연이며, 특히 마지막 날이 가까운 오늘날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이루고 계시는 가장 핵심적 역사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마지막 시대를 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교회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미 열방 선교에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선교라는 큰 선교적 틀 안에서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가장 급선무는, 교회와 선교단체들 안에 종종 보이는 잘 못된 대체신학에 기반한 편견과 선입관을 내려놓고 이스라엘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갖는 것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이 아니며,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도, 참 이스라엘도, 영적인 이스라엘도 아니다. 단지 교회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 육적 후손인 이스라엘에 접붙여져 원래 이스라엘에 약속된 모든 언약의 축복에 동참하게 된 이스라엘의 언약적 동반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 계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이의 성취는 오히려 마지막 날, 세계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하심의 중심이 된다. 비록 이스라엘에 주어진 모든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고 또 교회에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러한 성취가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문자적 성취를 무효화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땅의 약속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 주어진 모든 언약을 결국은 이루실 것이며,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될 때 마침내 그들의 메시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영적 눈멂과 귀막힘이 제거되고 온 민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스라엘 사역과 열방 사역을 마치 제로썸 게임처럼 서로 경쟁 구도로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열방 사역에 대한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으로 여겨 경계하는 잘못된 피해 의식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피해 의식은 이스라엘이 가지는 구속사적 위치와 열방과의 관계를 모르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그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 한 나라의 회복과 축복에 그치지 않고 온 열방에 큰 영적 축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직접적인 가르침이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경적 원리 때문에 혹자는 ‘이스라엘은 열방 선교의 열쇠다’라고 말한다. 롬 11:12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의 풍요함을 가져왔는데 장차 이스라엘이 충만하게 된다면 그때 세상에 임할 풍요함은 얼마나 더 크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2)
이 풍요함은 온 열방에 임할 마지막 때의 대 영적 추수와 부흥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열방 사이에는 신비한 연결이 존재하는데 똑같은 성경적 원리가 이사야서에서도 발견된다.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 (사 27:6)
이사야 27장은 마지막 날 이스라엘의 회복되는 모습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결실이 “지면을 채운다”라는 말씀이다. 한글로 ‘지면’이라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온 세계, 전 지구를 뜻하며 (실제 모든 영역본에는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결과, 그 열매가 전 지구를 가득 채운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전 세계 열방 가운데 큰 축복, 즉 부흥과 영적 추수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것이 온 열방에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한 나라, 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열방과 어떤 특별한 관계와 위치에 있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열방의 장자, 첫 열매, 열방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 장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 열방을 대표한다. 한 집안의 아버지와 장자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면 장자를 통해 그 축복은 온 집안에 미치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 장자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제사장의 위치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제사장직을 통해 우리는
제사장이 이스라엘 전 지파들에 대해 가지는 신분과 직분,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전 민족, 지파들을 하나님 앞에서 대표하고 중보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다면 그를 통해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류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온 인류가 축복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소위 ‘대표성의 원리’는 성경 전반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과 부르심이 취소되지 않았으므로 지금도 열방의 장자요, 제사장 나라이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 장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회복된다면 영적으로 온 열방에 놀라운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주권적으로 정하신 변치 않는 ‘질서’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맞추어 정렬되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온전히 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주어진 영원한 약속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다”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 한 민족이나 국가에도 적용된다. 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질서 때문에 온 열방이 축복받는 열쇠인 이스라엘이 먼저 온전히 하나님의 축복 안에 바로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 질서, 성경적 원리를 이해했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거듭,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이방인들)에게로라”라고 설파한 것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열방에 임한 부흥 사건들을 연구한 많은 연구자가 그 부흥들이 이스라엘의 육적, 영적 회복 사건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역시 바로 이러한 영적 질서와 원리 때문이다. 비록 열방 선교로 부르심을 받았더라도 한 선교사나 선교 단체가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그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사 큰 선교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부름 받은 열방 선교에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해서, 그렇게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온 열방의 부흥을 위해서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적 원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는 이스라엘 나라의 종말적 회복과 구원을 인정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이상의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가르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사역의 예로는 귀환사역, 중보사역, 위로사역, 전도사역 등이 있다. 귀환사역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땅의 언약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돕는 것이다. 중보사역은 예루살렘의 평안 (시 122:6) 및 온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을 위해 (롬 11:26) 밤낮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며 파수꾼의 사명을 (사 62:6-7) 감당하는 것이다. 위로사역은 역사적으로 오랜 반유대주의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교회의 잘못을 그들에게 사과하며 그들의 상처를 달래고 위로하는 (사 40:1-2) 것이다. 전도사역은 그들에게 회복의 기쁜 소식, 무엇보다 예수가 그들의 메시아라는 복음을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열방 선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부르심에 구체적으로 동참할 수 있을까? 가장 우선적이고 현실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역시 기도와 중보사역이다. 모든 선교사와 선교 단체는 세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부르신 어떤 열방 선교 사역에 헌신하고 있든지, 그 부르신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며 헌신하는 것 외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고 더해야 한다. 혹 이전에 잘못된 대체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먼저 그것을 버리고 성경에 기반한 회복신학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아직 이스라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주위에 최대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경을 열어 가르쳐야 한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국제적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따돌림을 받고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편에 서서 그 땅과 민족, 나라에 대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성경적인 큰 그림과 틀 안에서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유대인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 23:39)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 그들의 신랑으로 환영하고 초청할 수 있도록 모든 영적, 육적 차원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나 선교 단체를 부르신 사역에 더 큰 열매를 주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에스라 선교사는 왕의 귀환 펠로우십 (Return of The King Fellowship) 선교회의 미국 디렉터이다. 뉴욕주립대 (버팔로) 물리학 박사이자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법학 박사로 미국 특허 변호사이기도 하다. 미주 한인 장로교 신학대학교에서 M.Div.를 하고 현재 왕의 귀환 펠로우십을 섬기고 있다. 왕의 귀환 펠로우십은 이스라엘 교회개척운동을 통한 이스라엘 복음화 사역 및 열방에 신학교와 미션스쿨 개척을 통해 모든 종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열방 복음화에 헌신하며 이를 통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공동체이다.